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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솔직해지는 편을 '선택'했다.

- 20살의 내가 부끄러움을 인정하기까지.

 인생에서의 중요한 톨게이트가 될 고등학교를 막 입학했을 무렵이었다. 광역단위 자사고에 입학한 나는 주변 사람들의 신뢰와 스스로 부여하는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소녀였다. 자기 입으로 ‘소녀’라고 표현하는 것이 여간 쑥스러운 것이 아니다만, 한자어 그대로 ‘작은 여자’였다.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해부하여 재정의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나에게 있어 ‘작다’라는 것은 본인의 부족함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이를 수용할 만큼 그릇이 크지 못하다는 뜻이었다. 그 소녀는 스스로 자존감이라고 착각할 만한 자만감을 지녔고, 이를 무의식적으로는 어느 정도 인지하면서도 뿌리칠 만한 계기를 만나거나 능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중학교 때 전교 1등을 내리 한다거나 하는 눈부신 인재는 아니었으나, 스스로 남들에 비해 성숙한 생각을 한다고 자부했다. 생각을 남달리 한다는 것은 큰 장점이었다. 생각은 글과 말로 표현되었고, 어딘가 현란해 보이는 느낌을 주었으며 이제 막 새로 만난 친구들에게 어필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심지어 성격도 모나지 않아 그 현란함이 한낱 인상에 그치지 않고 관계를 지속하게 만드는 것에도 어려움이 없었다. 뭐든지 잘 풀릴 듯한 긍정적인 예감은 자연 ‘좋은 대학에 가겠다’라는 욕구를 부풀어 오르게 했다. 문제는 그 욕구에 우월감이라는 이물질이 끼어있었다는 것이었다.


 우월감은 질투심과 친구다. 수직적인 관계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기에 나보다 위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 질투심이 탄생하게 된다. 참 비극적 이게도 나에게 있어 그 대상은 나와 가장 가까운 친구 중 한 명이었다. 첫 모의고사에서 전교 30등을 했던 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적당한 만족과 적당한 우월감에 빠졌다. 문과였던 나는 이과와 함께 시험을 쳤는데도 이 정도라는 사실에 아쉬움보단 자만에, 욕구 실현의 잠재성에 취했다. 그러나 도취도 잠시, 내가 1등이 아니면 내 위엔 누군가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감을 느끼는 데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필 그 누군가가 가장 가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내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 반에는 상당히 우수한 인재가 많았다. 모르는 사람들까지 합쳐 몇백 명 사이에서의 30등과, 아는 친구들 사이에서의 5등은 같은 사실이라도 수치로 와닿는 감각이 천지 차이였다. 중요한 것은, 나는 우리 반에서 그리 우쭐댈 만한 처지가 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결정적으로 와닿게 된 사건은, 나보다 공부를 잘했고, 나와 가장 친하게 지냈던 A가 자신과 비슷한 성적의 B를 교내 대회의 파트너로 선택한 일이었다. 그 선택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나의 입장에서 그 선택의 의미 중 하나는, ‘나는 파트너로서 자격 미달’이라고 해석되었다. 게다가 그 엇비슷한 시점에 A가 눈에 띄게 B와 친해진 게 보이자 그 해석에 근거 없는 근거가 더해졌다. 나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우월감이었던 시절에, 그 사건이 내게 어떻게 다가왔을지는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 당시에는 명명할 수 없었던, 어쩌면 의도적으로 외면하려 했던 '자격지심'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이밀기 시작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애써 괜찮은 척하려 했다. 내가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것은 맞지 않느냐고, 이해하려고도 해보았고, 애초에 나의 가치는 그런 곳에 있지 않으니 상관없다며 회피를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괜찮지 않은데 괜찮은 척하는 일은 에너지 소모가 심한 일이었다. 나는 이미 너무 비참해져 있었고, 비참한 자신을 애써 외면하며 자기기만을 하는 것은 못할 짓이었기에 곧 관뒀다. 하필 관둘 만한 아주 좋은 대안이 있기도 했다. 그것은 바로 나에게 그런 비참한 감정을 느끼게 만든 A를 미워하는 것이었다. 혼자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꺼내 보며, 나만의 방식으로 의미를 부여했다. 되도록 A가 잘못됐다고 믿을 수 있는 방향으로. 그렇게 나 자신을 정당화했고, 이 감정은 합리적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하고 나니, 이제는 움츠리지 않아도 되었다.


 그 이후 나는 A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지냈다. 거리를 두고 지내니 한때의 감정은 어느 정도 연소가 되었다. 그러나 3년 내내 같은 반이어야 했기에 종종 머리를 들이미는 감정들을 외면할 수 없었고, 그때마다 미워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렇게 입학부터 졸업까지 시간이 지났다. 나에게는 많은 감정 소모를, A에게는 나름의 전략적인 행동들을 이끌어내었던 ‘좋은 대학 입학’이라는 공통된 욕구는 각자에게 다른 결과로 나타났다. 나는 재수, A는 모 명문대 입학. 이제는 당당히 얘기할 수 있다. 이는 당연한 결과였다.


 결과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지금과는 달리 깔끔한 인정을 할 수 없었던 그 당시의 나는 이미 주어진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또다시 공부를 해야만 했고, 입시라는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지만 고등학교 때와는 명확히 달라진 점이 있었다. 그것은 주변 시야에 휘둘리지 않고,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공부에 집중하다가도 간간이 과거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내 부족함을 확인하던 순간들, A가 나를 바라보던 그 눈. 그 기억들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고 있었다. 내 과거의 감정 처리가 잘못되진 않았는지에 대한 의심들, 은연중에 부유하던 그 의심들을 해결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경고였다.


 솔직해지자. 솔직해지자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나의 과오를 인정하는 것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그것은 아주 떳떳하고 현명한 행동이라고 생각하려 애썼다. 그러고는 마침내 인정해버리고야 말았다. 나는 A를 질투한 것이며, A는 욕구 실현을 가능케 할 만큼 능력치를 갖추고 노력을 한 사람이라는 것을. 예전처럼 ‘걔가 공부를 잘하긴 해,’라는 어쩔 수 없는 인정이 아니라, A의 가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에게 박수를 보낼 수 있는 솔직한 인정이었다.


 왜 이제야 가능했을까. 고등학생 때는 주변에 휘둘리기 쉬운 환경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감정을 분리수거할 만한 시간이 없었다. 모의고사 이후엔 수행평가, 수행평가 이후엔 중간고사, 중간고사 끝나면 다시 모의고사. 시간과 여유가 없을 땐 가장 편리한 선택을 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편리성은 종종 끔찍한 대가를 요구하기도 한다. 나에겐 ‘재수’라는 대가보다, ‘성장할 기회 박탈’이 더 쓰디쓴 대가일 수 있었다. 그러나 기억이란 참 다정히도 유예 기간을 주었고, 회피보다는 정면승부 덕에 마음이 편해질 수 있었다. 3년간의 생각과 행동이 잘못됐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란 수치스러우며, 과거의 시간이 아깝게 느껴질 것이라는 한때의 생각과 달리 오히려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성취는 놀랍기까지 하다.


 그때부터 인생을 살아가는 태도를 확고히 명명할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 단순히 말이 직설적이라서, 성격이 털털해서 솔직한 게 아니라 부끄러움을 부끄러움이라 인정할 수 있는 솔직함. 그것이 내가 선택한 솔직함이었다. 자신을 감쪽같이 속이는 것이 가능하다면 모를까, 분명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애써 합리화하는 것은 자신의 껍데기만 사랑하는 일이다. 겉으론 아무렇지 않아도 속으로는 애초에 합리화라는 소모를 하게 만든 자신을 원망하고, 후회한다. 그러니 나는 불행하지 않기 위해, 이제는 나의 가장 못난 면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려 노력한다. 그것은 이미 경험한 적이 있음에도 언제나 어려운 일이지만, 그 순간을 극복하면 나는 내가 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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