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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긍정적으로 대처하는 방법

- 길을 잃은 감정에는 출구가 필요하다.

 2018년은 나에게 있어 상징적인 해다. 내가 고2였던 그때 당시를 회상하자면 정말이지 ‘끔찍한’ 시간이었다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자만감으로 똘똘 뭉쳐있던, 열등감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자신과 막중한 책임에 걸맞은 능력을 요구하는 자리. 하필이면 그 둘의 만남은 나에게 있어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 욕심은 많고 목표는 높아 일을 한껏 벌려 놓고도, 정작 이를 수습할 능력은 나에게 없었던 것이다. 일단 이 상황을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압박감에 나는 내 업무들을 ‘처리’하는 게 아니라, 되는 대로 ‘해치웠다.’ 자연스럽게 자신감은 점점 떨어져만 갔고, 일에 대한 열정은 사라진 채 의무감만 남았다. 나는 그 상황을 대처할 여유도 없었을뿐더러 방법도 알지 못했다. 이에 대한 죄책감은 상황이 종료되었음에도 이어졌고, 이미 흘러가 버린 과거를 현재에 묶어두고 한 동안을 괴로워했다. 분명히 과거의 나 자신은 현재의 나 자신과 엄연히 다르고, 인생에도 페이지가 있다면 이미 그 페이지는 넘겨진 후였는데도. 얻은 것도 분명히 있었다. 나는 한 번 크게 앓은 덕분에, 노련함과 판단력을 얻게 된 것이었다.


 내가 성장했음을 깨달은 건 그 일이 있고 한참이 지난 후였다. 그렇게나 오랜 시간이 걸린 데엔 낮은 자존감도 한몫했겠지만, 결정적으로 ‘성장’이라는 낙관적 단어가 실재한다는 것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실재를 스스로 느낌으로써 확인한 후, 닥쳐온 고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게 되었다. 첫째, 이 상황이 언젠가는 종료될 것임을 생각할 것. 둘째, 상황이 종료된 후 달라질 나 자신을 생각할 것. 고난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고난이 끝난 이후 달라질 내가 중요했다. 해결되느냐, 마느냐가 내 인생이 흔들릴 만큼 중요하지는 않았다. 어떤 결과든 인생은 이어질 것이고, 그 위에서 달리는 운전자는 어떤 방식으로든 성장할 것이므로. 만약 사고를 냈다면 다음에는 사고를 내지 않을 방법을 머리 아프게 강구할 것이고, 멋지게 사고를 피해냈다면 그 당시의 감각이 손에 남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러한 사고관을 두고 너무 낙관적인 게 아니냐고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개인의 인생에서는 비관보다 낙관이 유리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특히 어찌 될지 모르는 미래를 두고는 더더욱. 이러한 사고관을 본격적으로 구축한 것은 재수하던 20살 때였고, 그렇게 나는 21살이 되어 대학생 생활을 시작했다.


 주변에서는 흔히들 ‘대학만 가면 꽃길일 거야’ 하고 나를 북돋아 주고는 했지만, 인생은 고난의 끊임없는 연속이라는 진부한 대사는 굳이 증명될 거리도 되지 못했다. 2018년이 고난으로 가득 찬 가장 끔찍한 해였음은 자명하더라도, 21살의 나는 21살의 고난을 맞이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8년의 고난과는 사뭇 결이 달랐다. 크고 부담스러운 과제가 아니라 학교 과제, 과외, 봉사, 스터디 과제, 시험공부 등, 나열하기도 입 아픈 자잘한 과제들이 나를 괴롭히는 나날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과제들을 두고 쌓인 설거짓거리를 대하듯, 하기 싫다, 놀고 싶다, 징징대었다. 그러한 단편적인 ‘싫음’의 감정들은 나를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지치게 했다. 게다가 호기롭게 시작한 스터디에서 당하는 몇몇 지적질은 종종 내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곤 했다. 불쾌감과 동시에 생겨나는 오기, 그와 동시에 피어나는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자기 의심. 이처럼 결코 긍정적이라고는 볼 수 없는 감정들이 쌓여갔고, 이는 피로감으로 이어졌다.


 그러다가 오래전 메모장에 묵혀두었던 문장을 보게 되었다. ‘사람들은 애써 진흙을 빚어 항아리를 만든다. 그러나 항아리가 만들어지면 실제로 쓰이는 것은 그 항아리가 품고 있는 빈 공간이다.’ 노자의 『도덕경』에 등장하는 말이다. 『도덕경』을 읽으면서 기록한 문장이 아니라 정확히 그 책의 어떤 맥락에서 등장한 말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나는 기록할 당시 이 문장이 본질의 형태를 아주 멋지게 비유한 표현이라고 생각했었다. 항아리는 본질처럼 보이지만 본질이 아니라는 것. 항아리는 본질을 담는 그릇일 뿐, 본질은 눈에 보이지 않는 ‘빈 공간’이라는 것. 그리고 시간이 지나 다시 그 문장을 만났을 때, 나는 잠시 잊고 있었던 낙관적 사고관을 환기할 수 있었다. 내가 본질이 아니라 항아리에 집착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과제는 항아리일 뿐 내가 정말로 성취해야 할 본질이 아니었다. 이미 앞서 경험한 적이 있지 않았던가. 고난은 고통으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며, 고통이라는 항아리 속에는 성장이라는 보상이 담겨 있다는 것을. 내 앞에 놓인 과제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18년도에 있었던 힘든 일과 무게는 달라도 근본은 다르지 않았다.


 그걸 깨달은 이후, 나에게는 새로운 고민거리가 하나 생겼다. 내가 간직해야 할 낙관적인 사고방식이 실은 굉장히 손실되기 쉽고 환기되기도 어렵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내가 극복해야 할 힘겨운 상황을 만났을 때, 이에 긍정적 사고를 환기할 만한 방책이 필요했다. 단순히 ‘어떻게든 되겠지!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만으로는 부족했다. 느낌표만으로 긍정적 사고가 그렇게 쉽게 환기되는 것이었다면, 세상에 얼마나 많은 긍정적 사람들이 있었을까 생각하니 작게 실소가 나오기도 했다. 그래서 긍정적인 감정을 방해하는 것들에 집중하여, 이들을 퇴치해 보기로 했다. 앞서 언급했던 단편적인 ‘싫음’의 감정들, 불쾌감, 오기, 자기 의심. 부정은 긍정보다 세력이 강하다고 했던가. 한 번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히면, 그로부터 빠져나올 노력조차 하기 힘들게 된다.


 그렇게 가만 고민을 하던 중, 어느 날 문득 감정 또한 그 자체로 본질이 아니라 항아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감정 또한 그 중심엔 감정을 만들어낸 핵심 원인이 존재한다. 또다시 비유를 통해 설명하자면, 감정의 이유가 바로 빈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러자 예전 브런치(전미경 - 솔직하게,  상처주지 않게)에서 읽었던 말이 떠올랐다. “불안한 느낌, 분노의 느낌, 유쾌한 느낌, 행복한 느낌으로서 감정이 우선 드러나지요. 그 뒤에 그 감정의 이유를 찾기 위해 이성이 등장합니다. 무엇인가가 불확실하구나, 나의 생각이 거부당했구나, 내가 존중받고 있구나,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구나…. 이런 이유를 생각하게 됩니다.”(1화. 마음, 생각, 행동이 일치된 삶을 위해) 여기서 주목해야 할 건, 감정은 결국 설명의 ‘대상’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결국 감정이 길을 잃게 두어서는 안 됐다. 그 감정의 이유를 이성으로 설명해야 했다. 그것이 바로 부정적인 감정으로부터 탈출하여 긍정적 사고를 환기하기 위해 해야 할 가장 첫 번째 일이었다.


 단순한 싫음의 감정조차 단순하다고 지나칠 게 아니라 ‘왜 힘들어?’하고 물어봐야 한다. 그럼 답변이 이어진다. ‘더 잘하고 싶으니까.’ 그러면 더 이상 답변을 생각할 필요도 없이 나는 나 자신을 고무할 수 있다. 잘하고 싶은 욕구는, 나를 더 잘하게 만들 것이고, 이 힘겨움은 좋은 결과물로 이어질 것임을 자신하기 때문이다. 지적을 당했던 일도 마찬가지다. ‘왜 불쾌한데 오기가 생겨?’ ‘다음에는 더 잘해서 지적당하고 싶지 않아.’ ‘그럼 됐네. 그럼 더 잘하게 될 거야.’ ‘정말 그렇게 될까?’ ‘비록 낯선 일이지만, 어떻게든 하면 실력이 는다는 걸 경험해봐서 알잖아.’ 이렇게 어떻게든 설명하고, 자신을 설득하다 보면 결국 과거에 낙관을 택했던 자신을 만나게 된다. 과거의 경험을 기반으로 현재의 감정을 설명하고, 보이지 않는 미래를 그린다. 그곳에는 달라질 나 자신, 본질이 있다.


 일상은 늘 즐겁고 행복하지만은 않다. 그렇지만 잠깐의 고난과 고통은 이후에 있을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니 언뜻 보기에 불행한 시간과 행복한 시간으로 구성된 인생은, 사실상 행복을 만끽하는 시간과 행복을 ‘예비’하는 시간으로 구성돼있다고 생각한다. 인생을 전자로 바라보느냐, 후자로 바라보느냐는 그 느낌이 사뭇 다르다. 불행하다고 느꼈을 때, 자신은 불행하다며 그 감정에 밑도 끝도 없이 파고들 수도 있지만, 이 모든 게 드라마 속 주인공이 겪는 몇 회의 고난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러니 차후에 이어질 회차에서는 일명 ‘사이다’가 반드시 나올 거라 믿는다면 고난을 조금은 가볍게 여기는 것이 가능하다. 이는 내가 생각하는 고난과 고통을 옳은 방식으로 겪는 방법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할 시, 모든 게 끝난 순간조차 그 행복을 제대로 맛보기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힘겨웠던 2018년을 시간이 지난 후에도 놓지 못했던 나 자신처럼. 물론 성장의 실재를 실감함으로써 진전할 수 있었던 나처럼, 각자가 그 가치를 인정할 만한 경험을 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한편 그 관점을 고수하는 것 또한 하나의 과제이기에, 그 과제에 대처하는 중요한 방책이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앞서 열심히 설명했듯, ‘감정의 출구’를 찾는 것이다. 고난을 지나는 과정에서 느끼는 부정적 감정들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 감정들의 이유를 생각하며, 스스로 설득하여 긍정적 감정으로 승화하는 것. 독은 방출되지 않으면, 길을 잃은 채 자꾸만 혈관을 돌고 돌아 우리를 병들게 한다. 감정의 이유를 찾는 행위는 길을 잃은 감정에 출구를 찾아주는 길인 것이다. 즉, 우리는 항아리, 즉 감정 그 자체에 갇혀 계속해서 괴로워하기보다, 본질인 감정의 ‘이유’에 집중해야 한다. 혹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껍데기에 연연해가며 골머리를 앓지는 않는지 자문하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본질은 눈에 보이지 않은 까닭에 그만큼 놓치기도 쉬우므로.


 마지막으로, 앞서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라는 말을 했었지만, 긍정의 힘을 빌려 그 말을 재해석해보도록 하겠다. 인생은 물론 고난의 연속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고난을 극복하는 순간의 연속이기도 하다. 스스로 고난에 대처할 방책을 찾은 나 자신이 자랑스럽지만, 여전히 스스로 대처할 능력을 갖출 수 있음에도 고난에 매몰되어 ‘지나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정의 내리기 어려운 감정을 스스로 들여다보며, 그 사람이 언젠가 조금이나마 고난을 수월히 극복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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