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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즈'는 왜 아이들을 죽여야만 했을까?

- <달콤한 노래> 속 지극히 표면적인 질문

 <달콤한 노래>는 ‘아기가 죽었다’는 충격적인 문장으로 시작한다. 알베르 카뮈 <이방인>의 ‘오늘 엄마가 죽었다.’라는 첫 문장과 유사하다. 이러한 유사성은 이 소설이 취하는 전반적인 구조로 이어진다. 루이즈가 아이들을 죽이기 이전에 살았던 삶을 보여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루이즈가 아이들을 죽이게 된 이유를 추리하게 만드는 것이다. 다만 <이방인>에서는 주인공이 자신의 입장을 직접적으로 설명하지만 <달콤한 노래>는 그렇지 않다. 소설은 굉장히 간접적으로 루이즈를 설명할 뿐, ‘루이즈는 이래서 아이들을 죽였다.’라는 식으로 이유를 제시하지 않는다. 마치가 우리가 실제로 타인을 파악할 때 매개를 통하듯이, 독자가 루이즈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소설 속 은유들에 주목하는 것뿐이다. 


 루이즈는 ‘폴’과 ‘미리암’ 부부에게 고용된 이민자 출신 보모다. 그는 아주 작은 체구에 여리여리한 외모를 가진 여성이지만 보모 일만큼은 완벽하게 해내어 고용주들이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처음에는 오로지 필요하다는 이유로 채용된 보모였으나 루이즈는 점차 그 가정에 스며들어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되어간다. 그랬던 루이즈는 왜 아이들을 죽였을까. 무엇이 그 필연적인 비극으로 이끌었을까. 


 주목해야 할 부분은 루이즈와 가족 간의 관계다. 어느새 가정의 일원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루이즈는 폴과 미리암의 초대로 가족 여름휴가에 동행한다. ‘시프노스’라는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휴가를 즐기는 가족들 사이에서, 루이즈는 아이의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모래성’을 쌓는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모래성’이 그들의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생각했다. 필요로 시작된 관계는 가족으로 둔갑하지만 실상은 ‘모래성’처럼 너무나도 유약한 허울일 뿐이다. 폴과 미리암은 권위의식 없는 고용주처럼 굴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행동들이 위선이었음을 드러내어 갑을관계를 상기시킨다. 루이즈의 선택은 루이즈의 자유의지에만 영향을 받지 않는다. 예를 들자면 루이즈는 보모 일을 관두고 ‘시프노스’에서 자연과 동화되어 살아가기로 마음먹는다. 여기까지는 루이즈의 의지다. 그러나 루이즈는 자신이 결심한 바를 실현하기 위해 부부가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하기를 간절히 꿈꾼다. 그래야만 루이즈의 필요성이 존속되어 다음 여름 휴가에도 함께할 기회를 얻을 수 있기에. 루이즈의 희망과 꿈, 이상은 부부의 선택에 달린 것이다. 


 되짚어보면 루이즈는 여러모로 상반되는 특징들을 동시에 가진 사람이었다. 어린아이 같은 놀이 취향을 가진 어린아이 체구의 여자이지만 일에 있어서는 거의 완벽한 어른이라는 점, 이민자 출신의 가난한 여성이지만 행동거지는 상류층 여자나 진배없다는 점, 아이들에게 엄마나 다름없는 행동을 하지만 실제로는 엄마가 아니라는 점, 가족처럼 생활하지만 늘 퇴근 시간이 되면 본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점 등이 그 예시다. 루이즈의 겉과 속 중 ‘겉’은 이상적인 반면 ‘속’은 유약하고 불안정하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루이즈 본인은 ‘겉’에 좀 더 집중하는 삶을 살았다. 이렇게 표면적으로는 완벽한 루이즈가 자신의 실제 상황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 불안과 강박이 심해진다. 그 순간들이 쌓이면서, 폴과 미리암도 루이즈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강하게 느끼고, 갈수록 그들의 관계는 휘청거린다.


 문제는 하필 폴과 미리암이 루이즈를 해고하기로 마음먹은 무렵, 루이즈는 본인이 실제로 살고 있는 집에서도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는 점이었다. 즉, 결정적인 한 방이 가해졌다. 루이즈는 공포에 질린다. 거리에 똥을 누는 이민자들을 보며 자신도 곧 저리 될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집을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루이즈는 타인의 의지가 아니면 본인의 꿈을 실현할 능력도 없다. 루이즈의 실상은 그야말로 어린아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시프노스’에서 헤엄칠 방법도 몰라 곧 가라앉는 상상을 하는 루이즈와 달리 그 집 아들인 아당은 물에 여유롭게 떠 있다. 같은 어린아이라고 가정하고 봤을 때, 이는 참 대조적인 모습이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그렇게 위태로웠던 루이즈가 왜 아이들을 죽였을까?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이 질문의 방점은 ‘왜’가 아니라 ‘위태로웠던 루이즈’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굳이 ‘왜’라는 질문의 답을 찾자면, 궁지에 내몰린 루이즈에게 폴과 미리암이 새로운 아기를 잉태하도록 해야겠다는 비이성적인 결심이 섰을 것이라는 추리가 가장 유력하다. 그러나 지금껏 애타게 죽인 이유를 추적한 노력이 무색하게도, 그러한 표면적 이유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극의 발단인 살인사건은 그 장면조차 자세히 묘사되지 않았고, 살인 이유를 추적하면 추적할수록 알게 되는 것은 루이즈의 비극적인 처지와 모습일 뿐이다. 그리고 이토록 주목되는 루이즈는, 이 소설에서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지극히 보편적인 인물이다. 이민자인 보모 여성, 그중에서도 갈 곳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루이즈를 제외하고도 수없이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 소설은 루이즈를 통해 이 궁지에 몰린 사회적 약자의 모습을 처절히 그리고 있다. 그리고 나아가, 한 가정의 붕괴를 통해 한 사회가 맞이하게 될지 모를 가장 비극적인 결말을 경고하고 있기도 하다. 언뜻 완벽해 보이는 표면에 가려진 어느 누군가의 고독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루이즈처럼 표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우리는 ‘왜 죽였을까’와 같은 표면적인 질문을 던질 것이 아니라 ‘위태로운 누군가’의 존재를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표면적인 질문에 가려진 진짜 중요한 본질이자 소설의 핵심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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