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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에 대한 고찰

- 공감은 그 자체로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다

 나에게 정말 좋은 영향을 주는 친구와 창경궁을 함께 걷다가, 그 친구가 그런 얘기를 했다. 공감은 폭력적이라고. 채식주의자이자 동물 해방론자인 그 친구는 인간이 동물에게, 물고기에게, 그밖에 수많은 생명체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벌어지는 학살을 근거로 공감의 폭력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에 백 퍼센트 동의할 수는 없었다. 공감 그 자체가 폭력적이라기보다는, 공감의 특성이 폭력적으로 발휘되기도 하는 것이 아니냐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공감은 근거이자 수단이 될 수는 있어도, 그 자체로 결과를 동반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동물 해방론적인 측면뿐 아니라,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도 공감이 불합리한 결론을 낳는 근거로 쓰이는 경우가 종종 있음에는 적극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공감이 곧 이유고, 공감이 곧 논리가 되는 세상에서 살아간다. 현대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 대대로 공감이란 중요했을 테지만, 청년 세대에게 ‘공감’이 차지하는 자리는 유독 큰 듯하다. <K-를 생각한다>를 쓴 임명묵 작가는 그 책에서 90년 대생들의 특징을 두고, 그들이 ‘공적 가치뿐 아니라 사적인 가치도 덜 추구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들이 대신 몰두한 것은 스마트폰만 켜면 쏟아지는 무수한 대리만족 수단, 즉 감각의 홍수였다. (p.69)’ 01년생인 나는 90년대생은 아니지만 나를 포함한 많은 또래들이 90년 대생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낀다. 물론 그렇게 된 원인이나 계기 면에서는 차이가 명백히 존재하겠지만, 임명묵 작가가 명명한 ‘감각의 홍수’에 빠져 있는 현실에는 Z세대도 속해 있다. 어떠한 이념과 가치를 추구, 혹은 판단하기보다는 본인이 느끼는 감정이나 감각에 골몰하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 감정을 본인 안에 가둬두지 않는다. 인간은 함께 살아가는 존재인 까닭에, 주변인에게 공유하고, 확인받는다. 그 과정에서 ‘공감’의 존재감은 점점 부풀어진다. 공감하거나 공감받을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한 것처럼.


 그러나 앞서 말했던 것처럼 공감이 늘 좋은 쪽으로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가장 쉬운 예시는 뒷담화에 있지 않을까, 싶다. 뒷담화가 옳지 않다는 것은 사회 전반적으로 수용되는 이야기다. 적어도 내 주변에서 뒷담화를 장려하는 사람들을 보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뒷담화를 하는 사람들은, 뒷담화라는 부도덕을 저질러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기에 뒷담화를 하는 것일까? 솔직히 나도 뒷담화를 해본 경험이 있는 입장에서 나의 경험담을 이야기하자면, 나는 내가 뒷담화를 하면서도 내가 부도덕하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뒷담화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실제로 이런 얘기를 들을 만큼 잘못했다는 명백한 동기가 있으며, 무엇보다 뒷담화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얘기를 들어주는 소수의 사람들은 어느 정도 나의 감정에 공감하는 사람들이다. 설령 공감하지 않더라도, 대놓고 너는 잘못됐어, 하고 지적하는 일은 드물다. 소수일지라도 확실히 존재하는 청중은 주동자에게 ‘공감’함으로써 그들이 저지르는 대화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물론 나는 뒷담화가 절대적으로 옳지 않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지만, 그 소수의 담소회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이 봤을 때는 부당할 수 있는 뒷담화는 이런 식으로 합리화되곤 한다는 것이다.


 공감의 선택적 특성이 여기서 드러난다. 청중들은, 고의적으로 뒷담화의 주동자에게만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고의성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나는 이미 그 대화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충분히 자발적이라고 생각한다. 청중은 뒷담화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 느꼈을, 혹은 느끼게 될(그들이 자신에 대해 뒷담화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느낄) 감정에 대해서는 공감하지 않는다. 적어도 이 대화의 목적에는 부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공감받기를 요청하는 사람에게만 철저히 공감한다. 공감되지 않더라도, 공감하려고 애쓴다. 그 애씀의 기저에는 본인의 기억 속의 그 엇비슷한 경험들이 전제되어 있다. 만약 본인과는 영 동떨어진 이야기, 즉 본인은 그 근접하게라도 경험해본 적 없는 이야기라면 공감의 가능성은 현저히 떨어진다.


 여기서 공감의 또 다른 특성, ‘경험적’ 특성이 발견된다. 공감이란 사실 상대방과 나의 공통분모를 찾는 작업이기도 하다. 만약 그 공통분모가 상당히 크다면 그 둘은 훨씬 수월한 공감을 바탕으로 한 의사소통이 가능할 것이다. 반면 그 공통분모가 인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작다면 공감이 힘들 뿐만 아니라 갈등으로까지 치달을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남녀 갈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남자는 여자로 살아본 적 없다. 여자는 남자로 살아본 적 없다. 그래서 그들이 젠더적으로 서로를 완전히 공감하기가 어렵다. 여자가 어두운 골목길에서 혼자 귀가할 때의 공포를 남자는 같이 느낄 수 없지 않은가. 그 반대로, 남자가 군대에 가야 하는 부담감에 대해서도 여자는 백 퍼센트 공감하기 어렵다. 실제 상황에 닥쳤을 때 느끼는 감각과 막연히 상상할 때 느끼는 감각은 동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각자가 경험할 수 없는 일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한다면, 불쾌감은 필연적으로 동반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공감은 우리가 흔히 인식하듯 긍정적으로도 많이 활용된다.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그 해결을 위해 함께 연대하기도 하고, 어떤 글을 읽을 때 ‘공감’함으로써 위안받기도 한다. 같은 추억을 가진 사람들끼리 그 추억이 재현된 모습을 보며 ‘공감’과 함께 향수를 느끼기도 하고, 생판 모르던 사이가 어떤 공통분모를 발견함으로써 친해질 계기를 마련하기도 한다. 온라인이 의사소통의 방식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공감의 기회가 늘어난 덕분에, 요즘은 얼굴도 모르는 타자끼리 공감이라는 유대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렇게 공감이 현대 사회를 대표하는 키워드 중 하나가 되었고, 많은 긍정적인 효과가 발생했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현 사회에서 ‘공감’이 차지하는 존재감은 지나치게 크다. 가령 사회적 문제를 논할 때도, 근거로써 공감이라는 카드를 빼드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상당히 주관적이고 한정적인 인간의 공감 능력은 누군가에겐 무기가 되지만 누군가에겐 방패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여성의 안전 귀갓길 제도를 보완하자고 누군가 제안했을 때, 그 문제의식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거기에 쓸 세금을 더 필요한 곳에 쓰는 게 옳다고 반박할 수 있지 않겠는가.


 나는 한때 이런 논쟁거리들을 두고,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을 문제시했다. 그러나 냉정하게 얘기하자면 누구나 상대방에게 백 퍼센트 공감하기란 불가능하다. 게다가 공감 대상을 선정하는 과정 또한 썩 공정하지 못하다. 따라서 어떤 문제의 해결 필요성을 주장할 때, 공감이 근거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공감은 문제 해결에 필요조건일 수는 있어도 충분조건일 수는 없는 것이다. 마주한 문제의 해결이 필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 문제의식에 공감하기 때문이기보다는, 그것이 그 자체로 불합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 인권이 모든 사람을 포용하게 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흑인도, 여성도 백인 남성과 마찬가지로 ‘인간’이라는 공통분모를 발견한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인간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명백한 근거를 성립해낸 덕이 아니던가.


 사람들은 일상에서 공감과 이해를 원한다. SNS는 사람의 그러한 심리를 공략한 시스템이다. 그러다 보니 많은 공감 수가 곧 정당성이 되고, 타당성이 되고, ‘옳음’의 가치로 치환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조금 결이 다르긴 하지만, 청와대 청원 시스템도 비슷하다. 20만이 넘는 청원보다 단 몇천 명밖에 안 되는 청원이 더 합리적일 수 있는데도 그 청원 건의 문제의식에 공감한 사람들 수가 곧 타당성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공감이 정서적 위안과 연대는 될 수 있어도, 이성적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공감이라는 단어를 좋아하고, 인간이 유대하는 가장 보편적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스스로 착각하지 말자고 다짐하곤 한다. 공감이 곧 이성의 산물이 되지는 못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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