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70이 넘으신 작은아버지와 다시 만나게 된 것은 10년 전 쯤이다.
전쟁도 아닌 상황에서 약 15년 간의 단절이 있은 후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는 거의 보지 못했으니까.
이전 시간에도 왕래가 많았던 것은 아니다.
집안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가족 간의 단절이 생기는 것이 다반사이고
우리도 여러 가지 이유로 그랬다.
그때까지는 내 인생에서 다시 뵙게 될 줄은 몰랐으며 그러리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장례식장에서 조차도.
친가 식구들은 작은아버지 뿐만이 아니라 고모 두 분과 작은아버지가 한 분 더 계시지만
그들은 지금도 단절된 상태이다.
개선의 여지도 많지 않으며 이제는 그렇게 지낸 시간이 너무오래되다 보니 그다지 아쉬움도 그리움도 없다. 그냥 그렇게 아주 가끔 생각이 나면 그대로 그만인 것이다.
작은아버지가 다시 오시게 된 것은 결혼 직후이다.
아내의 권유가 있었고 그 이유가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난 아내의 요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아이들에게 할아버지와 가족을 만들어 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내게 그리움이나 아쉬움이 있어서 아내의 요청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다시 오시기 시작한 지 한참이나 되어서야
어색하고 냉랭한 분위기가 개선되었고 대화를 나눴을 정도이니.
서로에 대한 감정이 그렇게 메말라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 이유로는 작은아버지의 아들, 나의 사촌동생의 태도였다.
사실 단절된 기간에도 동생은 아주 가끔씩 만나고 있었다.
윗어른들이 쌓아온 감정을 우리까지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단절되었던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인 문제, 각 가정마다 없이
살아서 라는 얘기를 했지만 동생과 나도 서로에 대한 감정이
그렇게 메말라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 이유로는 작은아버지의 아들, 나의 사촌동생의 태도였다.
사실 단절된 기간에도 동생은 아주 가끔씩 만나고 있었다.
웃어른들이 쌓아온 감정을 우리까지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단절되었던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인 문제, 각 가정마다 없이 살아서 라는 얘기를 했지만
동생과 나도 넉넉하게 사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래서 경제적인 이유는 핑계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 다.
지금도 그것에 대해서는 변함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
다시 왕래가 있기 시작한 지 한 5년쯤 되었을까.
집 근처 색소폰 교습소로 작은 아버지는 나를 불렀다.
그때만 해도 별로 내키지 않는 발걸음이었다.
나에게 색소폰에 대해서 얘기하고 한번 불어보라고 하고 본인의 연주 실력을 뽐내기도 했다.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원래도 그렇게 뽐내기를 좋아했던 사람이니까.
그렇게 처음 색소폰을 접하게 되었다.
배워두면 좋겠다, 악기 하나쯤은 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저런 상황이 맞지 않아서 배우질 못했다.
언제나 그렇지만. 아들이 작 년에 소개해준‘김오키’ 연주자의 연주를 들으며 색소폰의 매력에
다시금 빠지게 되었고 배워보고 싶다는 마음이 또다시 꿈틀거리 기 시작했다.
첫 스타트를 끊은 것은 아들이었다.
두 달 전쯤 색소 폰 교습소에 다닌다고 하고는 중고 색소폰가지 구입해서
열심히 배우고 보기에도 즐거워 보였다. 당장이라도 같이 다니자고 하고
싶었지만 직장이 어떻게 될지 또 금액적인 부분도 부담이 되었다.
그러다가 직장의 위치가 정해지고 시간적인 여유가 생겼다.
금액적인 부분은 여전히 부담이었지만 그 정도는 감수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어제 첫 수업을 받았다. 선생님은 친절하고 진실된 분이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악기를 배운다는 것에 대해서
긴장도 흥분도 있었다. 무엇보다 좋았다. 행복했다.
왜 그 순간에 작은 아버지의 모습을,
더 훌륭한 연주자도 많고 인지도 높은 사람도 많은데, 떠올리게 되었을까...
아들과 서로 선의의 경쟁을 하며 재있게 배워보고 싶다.
그리고 '볕처럼 빛나는'을 연주하고 싶다.
멋지게.
이 글은 이란성 쌍둥이 아이(장애인)를 키우며 살아가는 기록의 일부입니다.
연재중입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If Only I Were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