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장애인가족 행복페스티벌 최우수 작품상
1. ‘전국장애학생체육대회’에 출전하다.
2024년 5월 19일...
전라남도 해남군에 위치한 우슬경기장.
‘전국장애학생체육대회’ ‘보치아’ 개인전 결승이 있는 날입니다.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지만 날씨는 매우 화창합니다. 오후에 비가 내린다는 기상청의 안내가 있습니다.
장시간의 여정과 며칠간 숙소에서의 잠자리로 인한 피로감이 있었지만 사랑하는 아들과 저는 대회 참가를
위해서 이른 아침식사를 마치고 대회장으로 향합니다.
보치아 대회가 이곳에서 결선을 펼친 지 4일째.
이제 오늘부터는 본격적인 결승이 있는 날입니다.
우리는 오후 두 번째 시합에 배정되어 오전에 다른 선수들을 응원하고 간간이 연습과 몸풀기를 합니다.
경기장의 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랐습니다.
우리 가족은 아들 덕분에 몇 달 전 보치아라는 경기를 알게 되었고 그동안은 전혀 모르던 경기라 생소했지만 지금은 이 경기가 매우 정적이면서도 심리싸움이 치열하고 멘탈이 강한 사람에게 유리한 스포츠라는 것을 알게 되고 큰 흥미를 갖고 관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잘하는 선수가 많다는 것 또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체장애인들에게는 특히 휠체어를 이용하는 지체장애인에게는 더없이 좋은 운동경기라고 뼛속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뼛속 깊이 느낀다는 것은 아마도 제 아들이 선수이기 때문이겠지요.
아들은 아직 선수라고 하기는 조금은 부끄럽습니다.
대회 3개월 전인 지난 2월 중순쯤 학교의 체육 선생님으로부 터 제안을 받았습니다.
아들이 활달하고 스포츠를 좋아하며 에너 지가 있으니 운동을 시켜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사실 저와 아내 는 아들이 흥미 있어 하고 재밌어 한다면 그것을 잘하든 못하든 경험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장애인인 저의 아들은 비장애인만큼 다양한 경험을 하기는 어려운 조건이니까요.
그래서 저희 부부는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선생님 말씀하시길 보치아라는 운동이라고 했는데 저희 부부에게는 너무나 생소한 이름이었고 아내와 저는 유튜브와 구글링을 통해서 보치아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어찌 보면 컬링과 많이 흡사한 경기이고 찾아보다 보니 이전에 패럴림픽 때 잠깐 시청한 기억이 있었습니다. 물론 저희 아들이 이 스포츠의 선수가 되리라는 것은 꿈에서 조차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하게 된 보치아는 경기장도 조건도 녹록지 않았습니다.
모든 스포츠가 마찬가지이겠지만 장애인을 위한 배려는 비장애인에 비해 그렇지 못한 현실이니까요.
게다가 몇 번 훈련에 참여하지도 못하고 다리 및 고관절을 수술하게 되면서 훈련할 수 있는 여건은 더더욱 어려워졌습니다. 그렇게 세브란스 병원에서 다리와 고관절을 수술하고 열흘만에 퇴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라남도 해남에서 열리는 '전국장애학생체육대회'는 2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퇴원 후 2주일이라. 아직 수술 부위가 아물지도 못했고 뼈도 붙으려면 몇 달이 소요될 텐데 무리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부부는 아들에게 본인의 의사를 물었습니다.
아들은 꼭 나가고 싶고 가서 잘할 수 있다고 합니다.
평소처럼 에너지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는 아들에게 감사했지만 사실 보치아 선수로 등록만 했지 연습은
커녕 몇 번 던져 보지도 못한 상황에서 시합에 나간다는 것은의미가 없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아들이 간절히 원하고 있고 저희 부부도 아들에게 좋은 경험이 되도록 해주자는 평소의 신념대로 아들과 함께 해남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 큰 수술을 하고 2주 만에...
2. 미숙아로, 뇌병변 장애로 세상을 만나다.
아들은 뇌병변장애 1급, 지금으로 말하자면 심한 장애입니다.
2 란 성 쌍둥이인 저희 아들은 만 7개월 만에 조산으로태어났습니다.
체중 1kg의 몸무게로.
2분 늦게 태어난 작은아들은 왠지 비슷한 몸무게인 형보다 훨씬 더 작은 느낌이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인큐베이터로 들어가게 된 나의 아들을, 수많은 검사 장치와, 주삿바늘, 호흡기가 부착된, 마주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꿈에서도 단 한 번도 생각지도 못했던 이런 일이 왜 우리 가족에게...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것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 았습니다.
아들이 태어난 시간은 오전 10시였습니다. 의학의 발 전이 놀랍도록 성장하였으니 큰 문제는 없을 거라는 주변 사람들과가족들의 이야기가 조금은 안심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두 자신만의 절대자에게 기도를 했습니다.
아들에게 아무 일이 없게 해달라고. 늦은 밤 아내 옆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 있 는데 저를 부릅니다.
도착하는 담당 교수가 어려가지 사진을 보고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작은 아이에게 뇌출혈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습니다.
수술하면 되겠지, 치료하면 되겠지 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득 뒤를 돌아보니 아내가 서 있었습니다. 제왕절개로 수술한 지 얼마 안 된 아내가 링거가 서너 개 매달린 막대기를 끌고 거기까지 기다시피 해서 온 것입니다.
본능적으로 자신의 아이가 아프다는 것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 아이의 첫날을 그렇게 보내게 되었습니다.
3. 본격적인 보치아 경기 여정의 시작
경기장은 열기가 넘쳤습니다.
보통 장애인 체육대회의 특성상 부모님이나 가족이 동반을 해야 하기 때문에 더욱더 흥미진진했으며 본인의 자녀가 아니어도 같이 기뻐하고 같이 응원하는 분위기여서 항상 열기가 넘쳤습니다.
오전 경기는 초등학생, 고등부의 결승이 있었습니다.
중학생인 저희 아들과 비교해서 초등학생들의 기량이 훨씬 더 뛰어나 보였으며 고등학생들은 정말 선수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부모님과 선수 당사자의 그동안의 고생을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우리는 점심을 부지런히 먹고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 부모님은 잘 아시는 것처럼 소화를 시켜주기 위해 산책을 하고 화장실을 다녀온 뒤 시합 전 연습장소로 향했습니다.
연습장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도착해서 연습을 하고 있었고 선수들의 연습경기를 보며 여기까지 온 것 만도 우리는 행운이다. 여기서 만족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희는 짧게 연습을 마쳤습니다.
아이가 수술을 한지도 얼마 되지 않아 체력도 많이 떨어져 있고 실력도 많이 모자라기 때문에 긴 연습은 사실상 무의미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본 경기가 시작되기를 긴장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4.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아들의 아픔 그리고 결단
그날 밤 우리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듣고 앞으로 있을 일들에 대해 상상할 수도 없는 그런 밤을
보냈습니다.
우선은 현 상태를 알아봐야 겠다고 생각해서 의사와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밤사이 뇌출혈이 심하게 있었고 뇌의 백질 화가 2/3 정도 진행되었으며 생존확률도 많이 떨어지고 앞으로
3개월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을 것으로 보인다.
만약 살 수 있다고 해도 아픔도 모를 것이며 누워서 거의 식물인간처럼 살아야 할 것이다.
라는 어젯밤보다도 더 하늘이 무너지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습니다.
거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수술은 가능한가?
아이를 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왜 잘난 의사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없는가?
이런 투정 섞인 말들뿐이었습니다. 의사는 우리의 끈질긴 구애 끝에 ‘오마야’라는 수술을 권했습니 다.
정말 끈질긴 구애와 협박 끝에 이루어낸 성과였습니다.
눈물이 흘렀습니다. 계속 부풀어 오른 아이의 머리가 우리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습니다.
노벨문학상 작가인 오에 갠자부로의 ‘개인적인 체험’에 나오는 장면처럼 제게도 아이는 너무나도 낯선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마야 수술 후에는 머릿속의 물을 빼줄 수가 있어 부풀어 오른 머리가 조금은 줄어들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행히도 오마야 수술은 잘 되었고 아이의 머리도 점차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모유도 분유도 입에 대기만 하면 토하고 힘들어했습니다.
점점 아이는 작아졌고 점점 더 힘들어했습니다. 하루하루가 불안했고 의사의 이야기처럼 될까 봐 너무나 무서웠습니다. 결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지금 있는 병원에 아이를 맡기느냐 다른 병원으로 옮겨서 치료는 받게 하느냐. 지금의 병원에서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럼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뿐. 그 당시 재활의학과 레지던트로 있던 고교 동창을 찾아갔습니다. 삼성서울병원이었습니다. 아이를 여기서 치료하고 싶다.
간곡한 부탁에 교수를 만나고 온 친구는 미숙아 치료실에는 자리가 없다는 얘기를 전해왔습니다.
전 물러설 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 레지던트인 친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숙아 전문 교수를 만나게 해 줘라, 무릎을 꿇고 울면서 사정을 했습니다.
우연히 방을 지나치던 타과 교수님께서 제 사정을 들으시고는 미숙아 전문 교수님과의 미팅이 성사되었습니다. 그리고 입원 승낙을 받았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잘 될 것 같은 희망이 보였습니다.
나의 아들이 이제는 아프지 않겠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것 밖에는, 그 희망을 품지 않고서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할 것만 같았습니다.
아내와 아들에게 돌아온 나는 당장 이송 결정을 하고 병원에 요청을 했습니다.
병원에서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큰 기대를 하지는 않는 눈치였고 별의미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다음날 인큐베이터 안에서 아들은 처음 바깥세상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큰아들은 대체로 잘 커주고 있었습니다. 항상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이송을 하게 된 그날 아침 큰아들은 그렇게 많이 울 수가 없었습니다.
동생과 헤어지기 싫다는 듯이 아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계속 울었습니다.
큰아이 때문에 지금의 병원에 남아있어야 하는 엄마와 아이, 저와 작은 아들은 응급차에 몸을 싣고 이동하였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두 아들의 치료를 위해 헤어짐을 택했습니다.
몸을 싣고 이동하였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두 아들의 치료를 위해 헤어짐을 택했습니다.
5. 두근두근 보치아 BC2 부문 개인전 결승을 준비하다..
오후 경기 두 번째 시합. BC2 등급 남자 개인전 결승전.
연습경기를 잠깐 동안하고 준비를 마친 아들은 무덤덤해 보였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우리는 아들이 즐기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드디어 시합을 위해서 콜론으로 입장합니다. 여기서 부터는 밖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혹시 화장실이 급하다고 하면 어쩌지, 불안해하면 어쩌지. 하지만 저의 걱정은 모두 기우였고 아들은 침착하게 경기장으로 입장합니다. BC2 등급의 경기는 선수 외에 부모나 코치가 전혀 도움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오롯이 선수가 판단해서 경기를 치러야 합니다. 4 엔드 경기. 아들 이 첫 목적 구인 흰색 공을 던집니다.
아들은 그 조용한 시합장 에서 하나, 둘, 셋 기합을 크게 넣고 공을 던집니다. 매번 공을 던질 때마다 같은
루틴입니다. 장내는 웃음과 함께 모든 시선이 우리 아들에게 쏠립니다.
전 그런 아들이 대견하고 너무나 사랑스럽습니다.
6. 어렵게 얻은 기회와 새로운 희망
삼성서울병원에 도착한 나는 우선 아들을 신생아중환자실(NICU) 에 입원시키고 잠시 담당 교수님과 지금까지 했던 치료와 시술 그리고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MRI를 자세하게 보시고는 제게 말을 아끼는 눈치입니다. 저 또한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며칠 지켜보자는 말을 듣고는 면회시간이 다 되어 아이에게 인사를 하고 아빠가 지켜줄게 라는 말을 남기고 아이와 헤어집니다. 엄마와 큰아이는 다른 병원 있어야 하는 관계로 제가 이곳 병원에서 항상 대기를 해야 했습니다. 아이 엄마는 어떻게든 아이에게 먹이기 위해 모자란 모유를 짜내어 다른 가족을 통해서 보내옵니다. 하루에도 12번씩 전화를 하고 아이의 상태를 확인합니다. 같은 말을 들을 수 밖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엄마는 그렇게 합니다. 일주일간은 검사와 아이의 몸무게 늘리기 등의 이유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전히 인큐베이터 안에 갇힌 채 울고 있는 아이를 두고 신생아 중환자실을 나오는 때에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더 지난 어느 날 교수님이 회진 시간도 아닌데 면담을 하자고 하십니다.
좋은 일은 아니겠다는 느낌이 왔습니다.
불안감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교수님은 이곳 병원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뇌의 백질 화가 너무 심해서 생명의 위협이 심하다. 앞으로 2~3개월 정도가 될 거 같다.
어쩜 그렇게 또박또박 가정 없이 그런 말을 전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의사인가라고 생각하지만 저와 저의 가족들이 받는 실망감과 고통, 슬픔은 너무나 컸습니 다. 받는 실망감과 고통, 슬픔은 너무나 컸습니다.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막막하고 두려웠습니다.
7. 기적을 던지다.
목적구를 던지면서 시작된 1 엔드입니다. 아들은 파란색 공을 목적 구 가까이 붙입니다. 장내에서 박수소리가 울립니다. 다음은 상대편 선수, 이 선수는 매년 메달권에 있는 실력이 매우 뛰어난 선수입니다. 역시나 안정되게 빨간색 공을 던져 아들보다 가까이 붙입니다. 조금 더 멀리 떨어진 아들이 파란색 공을 던집니다.
아쉽게도 살짝 빗나갑니다. 다시 파란색 공을 던지게 됩니다. 다시 파란색 공을 던지게 됩니다.
이게 어쩐 일입니까. 아까
빗나갔던 공을 같이 쳐서 빨간 공에 가까이 붙입니다.
상대 선수가 웃음을 띠지만 약간 긴장한듯합니다. 상대 선수의 빨간 공이 연달아 빗나가면 아들이 4 대 0으로 앞서 나갑니다. 보치아 경기에서 4점은 매우 큰 점수입니다. 장내 관객들에게 이게 무슨 일 인가하고 관심이 쏠립니다. 이번에는 상대 선수의 목적구로 2 엔드를 시작합니다. 역시나 멀리 던져 저희 아들의 약점을
공략합니다. 아들은 있는 힘껏 방어를 하고 최선을 다했지만 3 점을 내주고 맙니다.
2엔드까지 4:3. 우리로서는 대단한 경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짧은 연습 기간, 수술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몸으로 결승까지 올라온 것도 대단한데 결승에서 대등하게 경기를 한다니 이것이야 말로 미라클입니다.
8. 꺾여버린 희망 그리나 다시 시작하다.
우리 가족은 다시 어려운 결정을 내립니다. 저는 다시 이전 병원에서 오마야 수술을 해주신 교수를 찾아가서 간절히 부탁합니다. 수술하다가 좋지 않은 결과가 나와도 좋으니 제발 부탁드린다고 수술이라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병원까지 바꿔가며 아이를 옮겼던 저를 좋게 볼 리가 없습니다.
저는 사력을 다해서 부모의 정에 며칠간 호소하였습니다. 자존심이나 창피함은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노력이 가상했던지 다시 아이를 받아주기로 합니다. 다시 작은 아들을 인큐베이터에 넣은 채 응급차를 타고 원래의 병원으로 돌아옵니다. 우선은 오 마야를 시술할 때 끼웠던 기구를 빼고 ‘션트 수술’을 하자고 합니다. 그러면 아이가 조금 더 안정적일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큰 위험이 따를 수 있다고 합니다. 거기에 미숙아이기 때문에 더욱더 위험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망설일 시간이 없었습니다. 여유도 이유도 없습니다. 바로 수술 날짜를 잡고 대기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첫 번째 수술은 실패합니다. 뇌의 물이 제대로 빠지지 않았습니다.
2주 후 바로 두 번째 수술을 하게 되어 다행히 뇌 주변에서 물이 잘 빠져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제 우리 아들이 살 수 있겠다는 저만의 희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가장 큰 고비는 넘기게 된 것입니다. 하늘이 우리 아들을 버리지 않았구나.
그 이후부터 병원에서도 우리 가족에게서도 작은 아들은 미라클 베이비라는 인생에서 처음 별명을 갖게
됩니다.
9. 관중과 함께되어 희망을 던지다.
4 대 3으로 한 점 앞선 상황에서 3 엔드를 시작합니다. 흰색
목적구를 던집니다. 아주 가까운 쪽에 짧게 던집니다. 하마터면 파울이 될 뻔한 짧은 거립니다.
바로 수술 날짜를 잡고 대기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첫 번째 수술은 실패합니다.
뇌의 물이 제대로 빠지지 않았습니다. 2주 후 바로 두 번째 수술을 하게 되어 다행히 뇌 주변에서 물이 잘
빠져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제 우리 아들이 살 수 있겠다는 저만의 희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가장 큰 고비는 넘기게 된 것입니다. 하늘이 우리 아들을 버리지 않았구나. 그 이후부터 병원에서도 우리 가족에게서도 작은 아들은 미라클 베이비라는 인생에서 처음 별명을 갖게 됩니다.
파란색 공을 목적구에 닿을 만큼 바짝 붙입니다.
장내에서 박수가 쏟아집니다. 여전히 던질 때마다 하나, 둘, 셋 기합을 큰소리로 넣는 루틴은 변함이 없으며 목적구에 공을 가까이 붙일 때마다 아빠~~~!!! 나 잘했지?라고 큰소리로 저를 찾습니다. 장내는
웃음이 끊임없습니다. 저는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고 우리 아들 잘하고 있어 최고야~~! 하면 아들은 한껏 밝은 웃음을 지으며 파이팅을 외칩니다. 3 엔드 운 좋게 상대방의 실수가 있어 7 대 3 으로 앞서나갑니다. 기적적인 순간입니다. 이제 마지막 엔드 4 엔드만을 남겨 두었습니다.
10. 가족의 다짐과 아들의 성장
앞으로 션트 수술이 잘 되고 난 후로는 아들의 뇌와 얼굴은 이제 평범한 아이로 돌아왔습니다.
그즈음 인큐베이터에서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거의 3개월 만에 손자를 안아보게 된 할머니들은 아들과 며느리, 사위와 딸의 눈치 때문인지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십니다.
그렇게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 돌아온 지 2주 후에 아내와 식당에서 식사를 할 시간을 냈습니다.
거의 6개월 만에 식사다운 식사 한번 하자고 마련한 자리였습니다.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아내는 내게 미안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픈 아기 낳아줘서 정말 미안하다고 합니다.
아내 앞이라 눈물을 꾹 참아봤지만 감정이 복받치고 그동안 보내왔던 시간들 그리고 아내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주문한 음식의 국물이 줄지 않습니 다. 눈물이 계속 흘렀습니다.
아이는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조금씩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일 주, 혹은 2주에 한 번씩 하는 경기 때문에 응급실을 오가기 바빴고 순간순간 위태로운 시간을 많이도 보내게 되었습니다. 매주 2번 2시간 거리의 한의원에서 꽂을대도 없는 몸에 수십 개의 바늘을 꽂은 채 참고 견뎌내야 했으며 보바스 치료, 기치료, 지금도 온몸에 선명한 뜸자국, 그 뜨거운 뜸도 견디어 냈습니다.
지켜보는 부모는 그냥 지켜볼 뿐이었습니다. 아들이 이겨낸 것들에 비하면 부모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습니다. 해줄 수 있는 것만 있다면 무엇이든 다 해주고 싶었습니다.
오래전 관람한 송강호 주연의 ‘효자동 이발사’라는 영화를 볼 때는 웃으며 슬퍼하며 눈시울 적시며 재밌게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 화면 속의 이야기가 저의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는 꿈에서조차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단 한 번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맞벌이를 해야 했기에 항상 돌봄이 필요했고 활동지원사가 필요했습니다. 좋은 분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아이를 두고 돈을 흥정을 하거나 아픈 아이는 볼 수 없다며 꼬랑지를 빼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삶의 의욕은 떨어지고 하늘은 무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저런 시절을 보냈던 그 아이가 홀트학교에 1년이 늦었지만 입학하게 되고 그동안 몇 번의 큰 수술과 두 번의 다리 수술을 견디고 홀트 중학교 3학년이 되었으며 경기도 대표 보치아 선수로 이번 전국대회에 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기적적인 일이 아닐 수 있을까요? 이런 기적적인 일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가족들은 많은 상처를 받아온 것 같습니다.
장애인이 있는 가정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 중에 형제자매의 정신건강에 대한 것이 있습니다.
저희 집도 물론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큰 아이가 중학교 들어가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상담을 받아야 했고 자살이라는 것까지 생각할 만큼 위험한 순간이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거기에 더해 희귀성 난치병인 모야모야병이 큰 아이에게 찾아왔습니다.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습니다. 원망했습니다 . 다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이게 뭐냐고 묻고 싶었습니다.
11. 드디어 포디움의 제일 높은 자리에 오르다.
마지막 4 엔드 상대 선수의 목적 국가 손에서 벗어납니다. 역시나 멀리 던졌고 첫 공 또한 목적 구애 안정적으로 붙였습니다.
아들의 선택은 점수 차를 벌리기보다는 안정적으로 수비를 하여 점수를 덜 주는 것이었습니다.
컬링과 비슷한 보치아 경기는 목적고 앞에 공을 던져 수비를 하는 전략이 있습니다.
아들은 그 선택을 한듯합니다. 그렇게 공방전을 벌이기를 몇 차례. 이대로 끝나면 동점 연장전입니다.
연장전은 아들에게 매우 불리합니다. 체력적으로든 실력으로든. 아들이 마지막 공을 던집니다.
손을 떠난 공은 운 좋게 상대 공을 파고들어 멈춥니다. 최종 결과 7 대 6 저희 아들의 승리입니다.
기적과도 같은 일이 벌어졌으며 저를 포함한 많은 관객과 관계자분들이 이 이변에 대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제18회 전국 장애인 학생 체육대회 보치아 BC2 중학생 부문 개인전 금메달, 최종 결과입니다.
사는 맛이 이거구나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동안의 수많은 일들이 머릿속을 스칩니다.
12. 우리의 희망과 아직 끝나지 않은 기적
다행히 큰아이의 모야모야 수술은 1회 수술만으로 안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본인이 하고 싶어 하던 글쓰기를 위해서 예고 문예 창작과에 입학하였습니다.
작은 아이는 이전보다 훨씬 더 체력적으로 좋아져 얼마 전 참가했던 대회 이후 재활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다리 수술 후 대회 참여하느라 소진된 체력도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누군가 행복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저는 항상 같은 대답을 하고는 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라고. 나의 아이들과 아내와 함께 숨 쉬고 이야기하고 먹고 웃을 수 있는 이 순간이라고. 그리고 지금도 저와 저녁마다 꼭 안고 자는 작은아들의 온기가 저의 가장 큰 행복이라고.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작은 것에 행복을 느끼고 그 행복을 위해서 살 수 있게 해 준 나의 작은 아들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
사랑해 아들, 그리고 고마워.
이 글은 이란성 쌍둥이 아이(장애인)를 키우며 살아가는 기록의 일부입니다.
연재중입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If Only I Were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