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4년동안 나는 "나의, 오래된 길, 이야기(이하, 나.오.이)"를 쓰고, 그리고, 고치고 하면서 4살의 나이를 더 먹어버렸다. 아니지, 아이들을 데리고 답사를 가고 코끝이 시커멓게 된 채로 집으로 돌아오는 일까지 더해서 지난 시간들은 "나.오.이"에게 발목이 잡힌 채 지나온 질곡의 시간(ㅋㅋ)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아이들 아빠 역시 본인만의 블리스(단, 블리스인지 아닌지 확인 요망)를 찾아 생고생을 해왔기에 뭐랄까, 피차일반이랄까,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은 늦은 밤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그의 생사를 확인하는 것으로 대충 퉁치고 정말이지 각자의 숲 속을 그렇게 헤매왔다는 말이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아, 더 정확히는 '아직도 헤매고 있다'는 말이 맞겠다. (아직 둘 다 숲을 못 빠져 나옴 ㅜㅜ)
아직 길은 보이지 않고, 목 디스크는 점점 심해지는데, 그놈의 블리스가 뭔지, 그거 하나 찾아보겠다고 시작한 일이 이렇게 만4년째 접어들고 있으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긴 하다. 벚꽃 흔들리는 그늘에 앉아 읽고 싶은 책이나 맘 편히 보고 싶은데, 일은 손에 잡히지 않고 매일 도돌이표를 찍는 기분이다.
암튼 지난 겨울내내 붙들고 있던 나.오.이 1부의 1차 퇴고를 일단 마치고, 그림 좀 고치려고 수통에 물을 채우고 팔레트를 펴는데 문득 마음이 짠해지면서 잡다구레하게 뭔가가 쓰고 싶어졌다. (아, 얼마 만인가. 후딱 써 지는 이 기분...!)
지난 시간동안 나와 함께 해 온 화구들.
연필, 미술용 지우개, 종이, 0.05mm펜 몇 자루, 그리고 화홍붓 2세트와 신한물감 32색.
혹시 붓을 바꿔보면 그림이 더 잘 그려질까 싶어 큰 맘 먹고 3만원짜리 프랑스 붓을 한 자루 샀었지.
그분은 한 차례 물을 머금으시고 붓질을 당하신 후 그냥 잘 계신다네.
오로지 나의 화홍붓 2세트만이 만4년간 나의 손가락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모진 고생을 하셨지.
수채물감에도 기름 성분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여름 내 글 작업 하느라 쓰지 않았던 팔레트를 오랜만에 열어보니 물감의 안료와 기름성분이 분리되어 투명한 기름 같은 게 줄줄 새어나고 있었다. 나는 물을 부어 대충 섞어서 그냥 쓰고 있다.
혹시 물감을 바꿔보면 그림이 더 잘 그려질까 싶어 외제 물감도 한 세트 샀었지. 독일제였던가.
그분은 한 차례 붓에 묻혀진 후 종이를 훑고 가시더니 그냥 잘 계신다네.
오로지 나의 신한물감 32색만이 만4년간 내가 건네주는 물을 부끄럽게 잡수시며
곱디고운 색을 내어 주셨지. 신토불이라네.
나처럼 42세(혹은 조금 이후일 수도 있다.)에 다시 그림을 그리게 된 다마무라 도요오. 아니, 내가 그처럼 42세에 그림을 그린 건가? 아무튼 그는 큰 병을 앓고 나서 다시 붓을 잡고 그림을 그리며 경제대국 일본의 중산층답게 온갖 화구들을 사들이며 즐거워했고, 병을 극복했고, 자신만의 라이프아트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이런 것을 도락道樂이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도락이라고 한들 뭐가 나쁘겠는가.
쓰지 않는 그림 재료 컬렉션은 어른이 아니고서는 가질 수 없는 것이다.
- 출처 : 다마무라 도요오, "그림 그리는 남자", 79쪽
그러나 나의 프랑스제 붓 한 자루와 24색 독일 물감 한 세트는 오늘도 여전히 그냥 계시기만 할 뿐, 만4년을 동거동락해 온 나의 화홍붓과 나의 신한 물감만이 오늘도 열 일을 준비 중이다. 그들에게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나의 온 마음을 담아 드려본다. 오늘도 잘 부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