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탁하다.
예서부터가 옳게 금강이다.
향은 서서남으로, 빗밋이 충청·전라 양도의 접경을 골타고 흐른다.
이로부터서 물은 조수까지 섭쓸려 더욱 흐리나 그득하니 벅차고,
강 너비가 훨씬 퍼진 게 제법 양양하다.
이름 난 강경 벌은 이 물로 해서 아무 때고 갈증을 잊고 촉촉하다.
낙동강이니 한강이니 하는 다른 강들처럼
해마다 무서운 물난리를 휘몰아 때리지 않아서 좋다.
하기야 가끔 홍수가 나기도 하지만.
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 온 물이 마침내 황해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져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 하나가 올라앉았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 채만식, 『탁류』, 8쪽, 일신서적출판사, 1995
# 여행의 준비
여행에는 준비가 필요하다. 무작정 떠나는 여행이라든가, 미지의 여행, 더욱이 오지여행 따위는 그저 별스럽거나 인생을 너무 심각하게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이미 세상은 너무 많은 탐험가들 덕분에 더 이상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곳을 제외하고는 미지의 땅조차 남아있지 않은 듯 보인다. 그 때문일까. 우리 동네 도서관의 여행서가에는 놀랄만큼 세분화된 온갖 종류의 여행서적이 넘쳐난다. 지역별, 탈 것별, 목적별, 연령별, 방식별, 성별, 그리고 꼭 가야 되거나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여행까지...
흥미롭게 읽은 책 「여행정신」의 책날개에는 두 명의 저자 중 누구의 얘기인지 명시되지 않았지만, ‘떠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 매 순간이 최악의 기억이었다'고 말한다. 연휴라도 되면 해외여행을 떠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TV로 보며 어쩐지 인생에 성공하지 못한 듯한 기분이 드는 떠날 것 권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정작 떠나기 위해서가 아닌, 떠나지 않아도 괜찮기 위해 여행서가를 서성인다. 마치 영국의 유명한 요리사 제이미 올리버의 요리프로를 넋이 나간 채 보면서도 직접 만들어 먹을 생각은 못하는 내게 누군가 손사래를 치며 말하는 것 같다. “진짜 해먹으려고 요리프로 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대리만족인 거죠!” 확실히 여행을 떠나기 위해 도서관 여행서가를 서성이는 것은 진짜 여행에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쨌든 나는 떠나보기로 하였다. 이런저런 몇 군데 후보지를 결정하는 데 정작 여행지에 대한 환상이나 기대 따위는 뒷전이었다. 적당한 이동거리와 숙소, 맛집, 날씨 등의 현실적인 문제들로 고민한 끝에 '군산'을 선택했다. 이유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는 것 외에 결정적인 건 없었다. 그렇게 군산을 여행하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만한, 그들이 권하는 몇 가지 정보 - 이를테면 군산의 유명한 빵집 ‘이성당’에서 야채빵 나오는 시간 - 가 적힌 메모지를 가방 한쪽에 구겨 넣고서.
어쩌면 여행의 준비는 여행지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하며, 무엇을 느낄지 상상에 빠지고, 미지의 세계와 만날 기대감으로 마음을 채우기 보다, 그곳에서 해야 할 가장 합리적인 리스트를 만드는 것으로 시작되는 지도 모른다.
# 군산 거리에서
AI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누구도 깨어진 꿈과 함께 탁류째 좌르르 쏟아져버리는 금강으로부터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려고 하지 않는 듯 했다. 서해안고속도로에서 군산IC로 빠지기 전, 대교 너머로 보이던, 흐르고 있다는 것조차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넓디넓은 것이 금강이었다. 그 강의 하구에 ‘군산이라는 항구’가 있다. 깨어진 꿈 대신, 오늘날 7개쯤의 리스트를 지닌 근대역사여행의 출발지로서 말이다.
군산에서 확인할 리스트는 순서와 관계없이 일제강점기에 건축된 일련의 근대건축물과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진포해양테마공원, 도보이동이 가능한 히로쓰가옥과 동국사, 초원사진관, 3대 짬뽕이라 불리는 복성루, 가장 오래된 빵집 이성당의 야채빵 또는 팥빵, 그리고 무한도전에 나와서 더 유명해졌다는 중동호떡, 마지막 경암동 철길마을이었다. 숙소는 일본식 다다미방을 경험해 볼 수 있는 ‘고우당’으로 가까스로 잡을 수 있었다. (빈 방이 있던 날이 우리의 여행 날이었다.) 7개의 리스트를 모두 수행해낸다면 나는 블로그 속의 여행객들처럼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군산을 떠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구도심의 정체된 분위기와는 달리, 군산근대건축관으로 쓰이는 옛 조선은행 건물이나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의 시설은 최첨단을 달리고 있었다. 그 일대를 거닐던 사람들은 대부분 여행객이었을 것이다. ‘복성루’ 대신 ‘빈해원’이라는 오래된 중국요리집에서 점심을 먹고, 군산내항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거스르며 박물관을 향해 걸었다. 군산이라는 도시를 조금이나마 이해했다면 아마 이 박물관들 덕분이었을 것이다. 모두들 찬사를 쏟아내던 ‘이성당’ 야채빵은 늘어선 줄 때문에 포기했지만, 그 뒤로 이성당 마크가 선명히 새겨진 종이백을 의기양양 들고 다니는 여행객들을 마주칠 때마다 ‘그냥 줄 설 걸~!’ 하는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다. 경암동 철길마을엔 이제 열차가 다니지 않지만, 철길은 여전히 선명했다. 몇몇 집들은 빼고는 대부분 공가였지만, 철길마을에 가서야 여행객들이 왜 이곳을 오는지 알 것 같았다. 사진이 기가 막히게 찍혔다. 간혹 살고계신 주민들을 마주쳐 조심스러울 때가 있었지만, 그들은 여행객들의 그런 소란에 익숙한지 덤덤할 뿐이다.
이번 군산여행에서 무엇보다 좋았던 건 고우당을 나와 구도심의 거리를 도보로 여행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앞으로 많은 여행을 하겠지만, 전작의 경우를 볼 때 하릴없이 구도심의 한가운데를 걸어볼 일은 그리 많지 않을 듯 했다. 그 리스트 또한 유익했던지 동국사에서 만난 사람들을 히로쓰가옥에서도 보고, 이성당 빵집 앞에서 본 사람을 근대역사박물관 안에서 만나기도 했다. 비록 완벽하게 수행해내지 못했지만, 대체로 충실하게 보낸 여행이었다. 복원되기 전 유흥주점으로 사용되던 옛 조선은행의 모형을 본 어느 아주머니가 “그래! 우리 어릴 땐 여기가 이랬다니까!” 하면서 반가워하던(?) 모습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오래된 기억을 잊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여행 첫날, 고우당으로 돌아와 늘 하던대로 아이들과 TV도 보고, 책도 읽고, 그림도 그리다가 이만 재우려는데 딸아이가 묻는다.
“엄마, 우리 여기로 이사 온 거야?”
모험이 결여된 여행이 가끔 이런 오해를 낳기도 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 여행은 그렇게 시작된다
군산의 거리를 걷는다는 것은, 어떤 경험에 가까웠다. 다른 누군가의 경험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해보는 경험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이 우리의 여행이니까. 비록 유명한 여행 블로거의 정보가 거짓부렁이 아닌지 확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여행의 경험이라는 게 야채빵 하나를 사기 위해 삼십분을 줄서서 기다리던 기억 또는 나처럼 그러지 못했던 경험뿐 일지라도, 블로그 속에서 본 누군가의 군산과 내가 본 군산이, 그가 했던 경험과 내가 했던 경험이 결코 같을 수는 없을 테니까.
여행에는 준비가 필요하다. 리스트 따위야 가방 한쪽에 밀쳐두고서 합리적인 목록과 목록 사이에서 나도, 그 누구도 몰랐던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마음의 준비. 비록 거기서 얻은 것이 별 것 아니라 해도, 그것이 우리의 여행을 더욱 즐겁게 해주리란 것은 분명하다. “무엇인가 발견하려는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찾으려는 여행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을 가지려는 여행”*이므로.
우리의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어야 한다. // 마침
*장 피에르 나디르 외, 「여행정신」, 25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