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달빛 아래 아버지의 고인돌을 찾았어.
차디찬 고인돌 위로 기어오른 아이는
덮개돌 위에 작은 구멍들을 파냈어.
아이가 고인돌에 새긴 건 아버지가 가르쳐준 북두칠성이었지.
아버지가 남긴 돌은
세월을 넘어 그 자리에 서 있었어.
길고 긴 시간이 흘러도
수많은 고인돌은 이대로 서 있을 거야.
아버지를 그리며 아이가 새긴 별자리도
고인돌 위에 오래도록 남아 있겠지.
- 이미애, 홍기한, “고인돌: 아버지가 남긴 돌” 중에서, 웅진주니어, 2009
# 여행의 시간
여행에는 적절한 ‘시간’들이 있다. 그것은 ‘계절’이 되기도 하고, 방문하기 좋은 ‘때’를 의미하기도 하며, 여행하는 ‘과정’을 나타내기도 한다. 여행의 한 ‘순간’일수도 있다. 아무리 복잡하게 뒤엉킨 플롯의 영화도, 도무지 이해되지 않아 읽은 곳을 다시 찾아 읽던 소설도 그것이 결국은 시간의 순서라는 걸 우리는 안다. 우리의 삶이 시간의 순서이므로... 바꿀 수도, 되돌릴 수도 없는 흐름에 따라 우리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를 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세상의 수많은 존재들이 너무 먼 곳에서, 각자 다른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커다란 여행의 동기가 되기도 한다.
수년 전 나는 원주의 섬강을 따라 폐허가 된 폐사지 몇 곳을 들른 적이 있다. 그중 복원공사를 위해 파란장막이 덮여 있던 법천사지는 부서진 석축들과 돌무더기가 지는 햇살 속에서 처량하게 나뒹굴고 있었다. 그러나 온전한 모습으로 우뚝이 선, ‘지광국사현묘탑비’의 측면에 새겨진 승천하는 용의 모습을 보면서 어떤 여행의 시간과 마주하였다.
구백 몇 십 년 전에 세워졌다 했다. 이른 봄날의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기 전까지 석공은 팔이 저리는지도 모른 채 돋을새김을 하였을 것이다. 그 섬세하고 아름다운 무늬를 보고 있자니, 지금으로부터 구백 몇 십 년 후의 누군가도 여기 서서 이것을 바라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꼭 그러지 못할 것만 같았다. 과연 우리에게 구백 몇 십 년 후의 시간이 존재하기나 할까.
# 삼천년 전 고인돌을 바라보며
몇 해 전 아이들과 함께 전남 화순 일대를 여행하며 넓고 깊게 볕이 들던 화순의 고인돌 유적지에서 한참을 놀다 왔었다. 화순의 고인돌은 사람 키보다 큰 것에서 작은 바위만한 것까지 각양각색인데다, 받침돌 대부분이 안 보이거나 작아서 얼핏 보기엔 커다란 돌무더기가 야산 중턱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것 같았다. 고인돌 앞의 고유번호와 안내판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것이 고인돌인지 조차 몰랐을 것이다. 국사시간에 배운 고인돌의 모습은 ‘저걸 어떻게 올려놓았을까’라는 의문과 함께, 높은 받침돌 위에 거대하고 판판한 돌 하나가 얹힌 형상으로 내 기억에 남아 있었다.
잠실에서 강화까지 올림픽대로를 타고 직진한다. 내 보잘 것 없는 운전경력 중에 이렇게 오랫동안 직진한 적이 있었나 생각해 본다. 강화도가 섬이라는 사실조차 잊은 채 그렇게 직진하다보니 어느새 하점면 부근리. 강화역사박물관 옆으로 ‘강화 부근리 지석묘’가 있다. 내가 이것을 보기 위해 당일 여행(?)을 떠난 이유는 소위 ‘북방식 고인돌’이라 배웠던 그것을 너무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너른 잔디밭을 앞에 두고 완만하게 경사진 길을 올라가니 무게가 50톤이 넘는다는 거대한 고인돌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것이 청동기시대의 유물이니 어림잡아 삼천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다. 반듯이 각을 잡기 어려워서 그랬을까, 날아오를 듯 비스듬히 기운 고인돌의 비주얼이 압도적이다. 그러니 돌로 만든 가장 황홀한 오브제인 것이다. 저것은. 다만, 주변을 지나치게 말끔히 단장한 탓에, 모든 것이 너무도 정갈하기만 했다. 혹시 삼천년 동안 누군가 쉼 없이 쓸고 닦은 게 아니었을까 의심될 정도로.
발걸음을 돌려 막 모내기가 끝나 파릇파릇한 들녘을 지났다. 부근리 외에도 비교적 가까운 오상리와 고천리 등에도 많은 고인돌군이 산재해 있고, 이들은 고창, 화순의 고인돌군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오상리 고인돌군으로 가는 길에는 사람도, 차도 없다. 텅 빈 주차장에 내려 ‘세계문화유산’이라는 거창한 주제와는 사뭇 대조적인 몇몇 정겨운 푯말들을 보며 계단을 올랐다. ‘강화 부근리 지석묘’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작은, 마치 누군가의 앉을자리 마냥 고만고만한 고인돌들이 이제야 짙어지기 시작한 신록 사이로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모여 있다.
“고인돌의 형태가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얹은 집을 연상시키는 만큼 청동기인들이 집을 지을 줄 알았을 것이라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다”*고 한다. 사방이 막힌 굄돌 위로 평평한 지붕돌을 얹은 오상리 고인돌의 모습은 영락없는 돌집이다. 아까 전 부근리 지석묘도 정면에서 봐야 ‘기둥’이지, 측면에서 보면 ‘벽’이나 다름 없다. 망자의 쉴 곳은 모름지기 벽으로 둘러싸인 집이어야만 했던 걸까.
보고 싶어도 이제는 볼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지은 집이었을 것이다. 나는 마치 집들이 손님이라도 되는 양 돌아가며 구경을 했다. 가까이서 본 고인돌의 표면은 점점 더 바스라지고, 진딧물이 덕지덕지 붙었을 찔레꽃 향기가 더욱 짙게 베여갈 것이다. 낮은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양지 녘, 뒤돌아 본 고인돌은 얼마의 시간이 흐른 줄도 모른 채 그렇게 초여름의 풍화를 견뎌내고 있다.
# ‘시간’이라는 것
우리의 여행이 사전적인 의미의 ‘답사’와 다른 까닭은 우리가 그것을 통해 조사할 것도, 밝혀낼 것도 없어서이다. 단순히 ‘과거로의 여행’ 또는 ‘과거와의 만남’이라는 식상한 주제를 체험하고자 함도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오래된 유적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것일까. 여행은 공간을 이동하면서 비로소 시작되고, 우리가 여행을 할 수 있는 까닭도 무엇보다 지금, 여기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여행이 여기가 아닌 곳으로 이동하는 순간 성립되듯, 통제할 수 없는 ‘시간’을 뛰어넘으려는 불온한 시도는 과거로의 여행과 만남을 핑계로 무수히 있어왔던 레퍼토리였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그렇듯, 우리의 여행도 시간의 순서이기에 애초에 그것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오로지 우리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긴 시간을 묵묵히 감내하며 오랫동안 있어온 것들, 그 앞에서 비로소 경이로운 마음으로 이 순간에 밖에 존재할 수 없는 ‘어떤 시간’과 마주할 뿐이다.
길고 긴 시간이 흘러도
수많은 고인돌은 이대로 서 있을 거야.
나는 여전히 삼천년 전의 고인돌을 보면서, 삼천년 후의 누군가가 나처럼 눈부신 5월의 햇살 속에서 찔레꽃 향기가 베인 저 고인돌을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와 일전에 아이들에게 읽어주면서 울컥 했던 그림책 ‘고인돌; 아버지가 남긴 돌’을 다시 꺼내 읽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건 나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혹시 삼천년 전의 누군가도 굄돌 안의 흙을 맨손으로 퍼내며 나와 같은 생각을 했었던 것 아니었을까. 그들은 가고 고인돌은 남았듯이, 우리가 지나가고 고인돌만 남은 자리에서 지금으로부터 삼천년 후의 누군가도 여전히 더욱 짙어진 찔레꽃 향기에 취해 이 경건하고 아름다운 돌들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을 거라고.
// 마침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 7-경기남부와 남한강”, 282쪽, 돌베개,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