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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호정 Oct 28. 2021

/ 첫 암벽화

***

선인봉은 겁나는 바위다.


어프로치도 힘든 데다, 날렵하고 웅장하게 솟구친 바위 형태가

그 아래서 보면 일단 쫄게 되있다. 더구나 바위 밑은 어찌나 좁은지,

인수봉처럼 너른 자락에 마음 편히 장비도 좀 펼쳐놓고, 함께 오를 사람들과 날씨 얘기도 좀 하고,

오늘은 어떤 루트에 얼마나 붙었나*, 어떤 길로 가게 될까, 미리미리 루트파인딩도 좀 하고,

(물론 이건 회장님이나 등반대장님쯤 되야 가능한 얘기다, 나는 옆에서 장비 차느라 정신 없다.)

뭐 그래야 가뜩이나 겁나 죽겠는 암벽에 오를 마음의 준비라도 할 텐데…,


선인봉은 얄짤 없다.



***

선인봉에는 "연대베첼러"라는 길이 있다.

1968년 연세대 산악부에 의해 완성된 길인데, 반질반질한 슬랩과 두어 손가락,

아니, 좋게 좋게 주먹 하나 겨우 들어갈만한 크랙이 압권이다.


오래 전 일인데다, 기록을 세세히 남겨 두지 않아 전체 루트가 기억나지는 않지만,

마음 놓고 붙잡을 데도, 설 데도 없는 그 짜디 짠 크랙에 암벽화를 구겨 넣으며

이렇게 가혹한 발 재밍*이라면 엄지발톱이 무사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

당시 우리 산악회는 S산악회와 함께 등반하는 일이 잦았다.

신생 산악회로서 입지를 다져가고 있던 우리 산악회에게 있어

등반 경험이 많은 클라이머들이 포진한 S산악회와의 등반은 여러 가지로 배울 점이 많았다.  

그러나 다수의 베테랑들이 속해 있는 산악회라도 신입회원은 있기 마련이어서

그 중 K는 등반을 하는 남자친구를 따라 클라이밍에 입문한 경우였다.


문제는 선인봉이 등반을 막 시작한 초보 클라이머가 그리 만만하게 따라 붙을 바위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등반에 입문하면 초보임에도 매우 어려운 길에 붙을 때가 온다. 팀원들이 그를 위해 고독길*로만

다닐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때 대부분의 초보 클라이머는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경험을 하게 되고,

그것이 동력이 되어 그를 성장시키기도 하고, 학을 떼며 산과 멀어지게도 한다.)


선인봉이라는 바위 자체가 고도감이 상당한데다, 베첼러의 그 짜디짠 크랙은

정말이지 발가락 두어 개조차 허락되지 않게 느껴질 만큼 좁디 좁은 크랙이었다.

서로 팀은 달랐으나, 로프에 매달린 채 한동안 움직일 기미가 없던 K는

그녀가 얼른 올라가기를 바라며 기다리고 있던 내 위에서 허공인지 모를 어딘가를 향해

온갖 욕을 퍼부어대고 있었다.


아아, 미쳐, 나 못 올라간다고!

어쩌라고, 아, 씨! 뭐야. 아, 진짜 뭐야, 이거!

아, 죽는다고~!


본의 아니게 K의 욕받이가 된 나도 이제 겨우 초짜 딱지 떼고 죽을 똥 살똥 오르는 중이라

남의 상황에 관심 가질 여유가 없었다. 더는 지체할 수가 없어서 K 옆으로 지나가면서

힘 내시라고 한 마디 던지고 가버린 나를 K도 이해해 주시리라 믿는다.



***

사실 나도 등산학교 암벽반을 수료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암벽반 선생님의 초청을 받은 나의 남편의 초대를 받아 설악산 장군봉 석이농장에 붙은 적이 있다.

1피치를 제외한 평균 난이도가 5.10이 넘는 절벽이었다.

힘들면 붙잡고 올라오라며 친절하신 선생님께서 달아놓고 가신 퀵드로우*는

손 뻗으면 닿을 곳에 그저 대롱대롱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올라서지도, 그렇다고 내려서지도 못하고 얼마의 시간이 지난 줄도 모른 채

그냥 거기서 죽을 것만 같았다. 아니, 헬기를 부른다면 어쩌면 살 수는 있을지도... 

이것은 도저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그 절대적인 무력감 앞에서 눈물만 주르르 흘리고 있을 때, 그 너머로 보이던 설악의 바위들은 참 소리도 없이 멋만 있었지.



선생님~!! 줄 좀 잡아 주세요! 당겨 주세요! 진짜 못 가요!



쉰 소리로 아무리 소리쳐도 거칠게 굽은 오버행 바위 너머로 빼기도 보이지도 않던 그들은 

내 말을 그냥 씹는 듯 했다. 그리고 차마 죽지도 못하고, 헬기를 부르지도 못해 올라선 바위 위에서



어?! 올라 왔네?! 하도 안 와서 내려간 줄 알았지!!!



하며 놀려대던 그들의 얼굴에 죽빵을 날리고 싶었던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ㅎㅎ)


여하튼 베첼러길에서 한참동안 욕을 퍼붓던 K도,

존경하는 선생님들께 차마 죽빵 같은 건 날리지도 못하고, 어물쩍 넘어가버린 나도,

결코 오를 수 없을 것 같던 그 바위를 무사히 올랐고, 또 무사히 내려왔다.



***

연대베첼러길 등반을 마치고 하강해서 보니, 나의 첫 암벽화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짜디 짠 크랙 위를 어설픈 발 재밍으로 비벼댄 탓에 애꿎은 암벽화에게 미안할 뿐이다.

더 이상 신을 수 없는, 그래서 더욱 버리지 못하는 낡은 암벽화를 보면서,

문득 단순한 열정으로 정신이 아득하던 그 날이 떠오른다. 



登山靴는 여태

다녀 온 그 山 냄새도 지워내지 못하면서

또 다른 먼 山을

눈을 감고 쳐다본다

나를 닮아가는 것일까.  


- 장호, "登山靴를 닦으며" 중에서

(산시집 "너에게 이르기 위하여" 78~79쪽)




첫 암벽화  /  사진 이호정





*바위에 붙다 = 바위를 타다 또는 오르다

*재밍jamming : 바위의 갈라진 틈새 속에 손이나 발, 다리 또는 몸을 집어넣고 비트는 힘에 의해 강한 지지력을 얻는 암벽등반 기술  [출처] 등산상식사전, 2010, 이용대, 한국등산연구소

*고독길 : 인수봉의 여러 루트 중 하나로, 주로 초보 클라이머들이 오른다.

*퀵드로우 : 퀵 드로우는 이름 그대로 확보물에 로프를 신속하게 연결하기 위해 만든 용구
 [출처] 등산상식사전, 2010, 이용대, 한국등산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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