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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불러준 인연

<조용히 걷는 생각들> (9)

by 이호준

정년을 맞으며 마음속으로 하나의 다짐을 했다. 함께 일하던 동료나 후배들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보고 싶고 술 한잔 나누고 싶은 순간이야 있겠지만 괜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정년은 단순히 직장을 떠나는 일이 아니라 인간관계의 방향을 새롭게 정비하는 시점이라 생각했다. 이제는 업무나 이해관계가 아닌 삶의 고민과 취미, 관심을 나누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아가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느꼈다.


중앙부처에서 근무하던 시절 나의 마지막 업무는 소프트웨어 산업정책을 담당하는 일이었다. 산하기관과 연구소, 여러 협회 사람들을 만나 의견을 수렴하고 관련 분야의 전문가들과도 교류했다. 그때 나는 직책이나 권위를 앞세우기보다 상대를 동등한 파트너로 존중하려 노력했다. 그래서인지 좋은 인연으로 남은 분들이 많고 지금 다시 만나더라도 편안히 웃으며 인사할 수 있을 것 같다.


정년 이후에도 그 시절의 인연들이 종종 떠올랐다. 퇴직 후 일자리에 대한 불안이 엄습할 때면 도움을 청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먼저 연락한 적은 없었다. 지난 좋은 관계 위에 부담을 얹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얼마전 뜻밖의 연락이 왔다. 예전에 함께 일했던 직원인데 이제는 본부장이 되어 나에게 정책연구반 참여를 제안한 것이다. 오랜만에 들은 그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따뜻한 신뢰가 묻어 있었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관련 업무를 떠난 지 오래되어 과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충분히 도움을 주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한마디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물론 제안을 수락했다. 정규직 업무는 아니고 가끔 회의에 참석하고 보고서를 검토하는 자문 역할이다. 과거의 경험이나 지위에 기대지 않고 지금의 나에게 있는 역량으로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렇게 다시 정책 현장에 목소리를 보태게 되었다. 신뢰로 이어진 또 다른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사진: 영주 부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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