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걷는 생각들> (20)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날부터 새 보금자리에 들어오기까지 여덟 달이 걸렸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인데 돌아보면 꽤 멀리 돌아온 기분이다. 중간에 여러 번 마음이 흔들렸다. 잔금 걱정에 잠을 설친 날도 있었고 집수리 구상과 견적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한 변수들이 튀어나와 '그냥 계약을 파기할까' 하는 마음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그럴 때마다 가까운 지인들이 건네준 응원과 관심이 나를 붙잡았고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단독주택에 대한 기대가 등을 떠밀었다. 그렇게 망설이고 흔들리면서도 한 걸음씩 옮기다 보니 마침내 이 집에 들어오게 되었다.
무엇보다 흐뭇한 것은 전 주인인 어르신께서 누구보다 먼저 축하 전화를 주신 일이다. 좋은 집을 싸게 넘겨준 분이라 내가 고마운데 오히려 어르신은 그동안 자신이 더 고마웠다고 말씀하셨다. 계약부터 잔금 처리까지 자잘한 일을 챙기고 어르신이 이사 갈 새집 마련까지 신경 쓴 시간이 어르신 마음에 작은 신뢰로 남은 듯했다. 반세기 동안 살아온 집. 낡았지만 전망 하나만큼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이 집을 내가 정성을 들여 고쳐 놓은 것도 내심 마음에 드신 모양이다. 부디 행복하게 잘 살라며 덕담을 건네는 어르신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이 집은 단순한 부동산이 아니라 세월과 삶이 이어지는 자리를 내가 이어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상 입주를 하고 보니 할 일은 여전히 태산이다. 짐은 스스로 제자리를 찾아가 주지 않는다. 박스에 엉켜 있는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 어디에 둘지 생각하다 보면 시간은 훌쩍 지나가고 피로감이 밀려온다. 이삿짐이 제자리를 잡는 데 몇 달은 걸린다는 어른들 말씀이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야 알겠다. 서두를 생각은 없다. 우선 꼭 필요한 것부터 정리하고 나머지는 하루에 한 칸씩 비우고 채우듯 천천히 해나갈 참이다.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에 베를린에서 아들이 짧은 방학을 보내러 들어온다. 디자인을 전공하는 아들이 이 집을 어떻게 볼지 내심 궁금해진다. 사진에 매진하는 나와 디자인을 공부하는 아들이 함께 머무는 공간이니 우리 둘에게 어울리는 작업실이자 편안한 안식처가 되었으면 좋겠다. 입주하는 날 첫눈이 내렸다. 이런 눈을 상서로운 눈이라 부른다는 말이 떠올랐다. 새로운 시작을 축복하는 예고편 같은 눈발이 지붕과 마당 위에 가만히 내려앉았다. 첫눈과 함께 시작된 이 집과의 인연이 오래도록 좋은 기운으로 이어지기를 마음속으로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