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 에세이 (11) / SW중심사회 2002.06
나는 B컷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분명 최고의 A컷은 존재하겠지만, 대부분은 B컷과 종이 한 장 차이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 약간의 차이로 인해 세상 빛을 보지 못하는 사진이 많다. 디지털 사진은 무수한 컷을 남긴다. 때로는 고르기조차 힘들다. 과잉소비요, 뒷감당이 안 되는 감정 놀음일 때가 많다. 정리시간조차 허락되지 않는 상태에서 새로운 사진이 쌓인다. 그런 과정에서 빛을 발해야 할 사진이 외장하드 구석에 처박히는 경우가 생긴다. B컷, 그들에게 생명이 있다면 슬픈 일이다.
사진 산책을 다녀오면, 그날 바로 파일을 정리하는 게 습관이 됐다. 그렇지 않으면 어릴 적 일일학습지가 쌓이듯 정리에 대한 부담감이 생길 것 같아서다. 먼저 당일 촬영한 사진 중 마음에 드는 컷을 골라 PC에 디렉터리를 만들어 모아둔다. 그 디렉터리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진은 일단 제쳐놓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날엔가 그렇게 방치된 사진 중에 보석 같은 사진이 꽤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는 가끔 외장하드를 다시 열어보곤 한다. 그리고 숨겨둔 듯한 사진을 만나, 한 생명을 다시 살려내는 뿌듯함에 빠진다. B컷 찾기는 기억을 더듬는 추억 놀이고 보물찾기 같다. 그렇게 부활한 사진은 날개를 달고 나의 마음 깊숙이 들어온다.
# 촬영장소: 구례 화엄사 / 국립현대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