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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하다 Oct 22. 2021

하얀 종이

N가지의 시


하얀 종이가 좋다. 아무 생각없이 끼적이다가 보면 생각이 그림을 그려 놓고 가고 고민이 심술부려 여기저기 날카롭고 삐죽거리게 써 놓은 글로 흔적들을 남기고 간다.



하얀 종이가 좋다. 백지를 더이상 접히지 않을 정도로 반을 접고 또 반을 접는다. 손 바닥의 3분의 1크기로 줄어든 종이가 구겨진 몸체가 버거워 구해달라고 새로 생긴 네모 반듯 벌려진 종이 입을 벌려되면, 한 번 더 꾸욱 눌렀다가 본래 크기로 서서히 되돌려 놓는다.



펼쳐진 하얀 종이, A4용지 위로 투명하고 단정한 바둑 모양의 선들이 생겼다. 칸칸마다 글자를 채울까. 그림을 채울까. 아니면 선과 선이 교차하는 점 위로 하얀 바둑돌을 그릴까 검은 바둑돌을 그려 넣을까. 이러나 저러나 모두 내 마음 가는대로, 생각대로이다.



투명한 바둑판 모양으로 성형된 하얀 종이에 오늘은 못난 감정들을 채웠다. 한 손에 온갖 무지개색 색연필을 가득 쥐고 위아래 좌우 할것없이 있는 힘껏 그어 본다.  어두운 감정 단어들 위로 사방으로 아름다운 색이 입히고 어두웠던 기억과 감정 위로 새로이 밝은 것들로 덮어 버렸다.



때때로 못난 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을 때는 양손으로 하얀 종이 양 모서리를 움켜쥐고 넓이를 줄여 높이를 내려 둥근 공을 만들어 본다. 튀어 오르지 못하는 종이 공은 던져짐을 당한 채로, 매일 못난 것들을 먹어대는 쓰레기통 안으로 힘껏 내리 꽂힌다.



때때로 못난 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을 때는 허공에서 던져 사라질 눈이 될 수 있게 본래의 종이를 이루는 입자 크기로 까지 줄어들게, 찢고 자르고 베어 버린다.



하얀 종이의 쓰임은 셀 수 없다. 본래 나무에서 온 거라 그런가 싶은데, 매번 아낌없이 주는 나무에서 탄생한 종이라 그런한가 싶은데. 하얀 종이는 물어도 대답없다. 당연하게도 이런 글도 써 보라도 스스로를 내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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