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돌아온 전자제국 소니
소니는 한국인들에게 당황스러움을 불러일으키는 회사다. 소니는 한국인들에게 3단계의 이미지 변신을 겪었다. 1단계, 소니가 세계시장을 제패하는 전자 메이커였을 때에는 두려움과 질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일본 전자 메이커들이 삼성, LG, 애플과 같은 후발주자들에게 역전당하면서 소니의 이미지는 급전직하했다. 소니의 아이콘 워크맨은 더 이상 기술혁신의 상징이 아닌 시대의 변화에 뒤쳐져 사라져간 실패의 사례로 사람들에게 인식되었다.
하지만 최근 ‘소니의 부활’이라는 말을 여기저기서 들을 수 있다. 워크맨과 바이오가 시대의 저편으로 사라지면서 망한 줄 알았던 회사가 아직도 건재하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궁금증과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주제이기도 하다. 실제로도 구글이나 유튜브에 “소니의 부활”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하면 상당히 많은 검색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만큼 망한 줄 알았던 소니의 귀환은 일본 산업계에 극도로 부정적인 많은 한국인들에게도 놀라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셈이다.
물론 한국에서 많이 다뤄진 주제이다 보니 내가 구태여 다시 동일한 주제로 글을 쓰는 데 대한 주저함이 없을 수 없었다. 일본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자들이나 산업 전문가들이 유사한 주제로 많은 양질의 자료를 이미 발표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변화된 소니의 사업 포트폴리오를 전체적으로 조감하고, 다시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개별 브랜드들의 차원에서 미시적으로 분석함으로서 보다 입체적인 그림을 그려보고자 한다.
2. 소니의 새로운 사업 포트폴리오: 전자, 미디어, 그리고 금융
많은 사람들이 소니가 부활했다는 것은 알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으로 부활했는지에 대해서는 잘 와닿지 않을 것이다. 아마추어 사진작가, 1인 크리에이터, 서브컬쳐 오타쿠와 같은 특수한 집단이 아니라면 대체 소니가 어디서 무엇으로 부활했는지 알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전, 현재의 소니는 대체 뭘로 먹고 사는 회사인지 간단하게 조감하고자 한다.
현재의 소니를 이루는 3대 축은 전자(주로 센서), 미디어(게임, 영화, 음악, 애니메이션), 그리고 금융(은행, 보험)이다. 한국에 비해서는 수평적 계열화의 정도가 낮은 일본의 대기업 치고는 굉장히 특이하고 광범위한 포트폴리오이다. (참고로, 미쓰비시, 미쓰이, 스미토모라는 이름이 붙는 회사들은 하나의 지주사나 순환출자를 통해 연결된 회사들이 아니다.)
하지만 소니의 사업 포트폴리오는 얼핏 산만하게 분산된 것 같아 보여도 생각보다 선택과 집중이 분명하게 이뤄져 있다.
1) 전자: ‘찍는 것’을 중심으로 구성된 정교한 포트폴리오
우선 전자분야의 경우 워크맨이나 바이오와 같은 완제품 생산을 사실상 포기하고 시각적 정보를 읽어들이는 센서를 중심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재편했다. 그래서 현재 소니는 미러리스 카메라, 이미지센서, 엑스페리아 스마트폰 등을 중심으로 카메라 및 센서기능과 관련된 대단히 압축된 제품 라인업을 가지고 있다. (사실 최신 스마트폰의 가장 핵심적인 기능 중 하나가 카메라임을 생각하면 엑스페리아 스마트폰도 다른 상품군과 상당히 연계성이 높은 셈이다.)
우선 소니는 여전히 미러리스 카메라를 만드는 주요한 카메라 메이커이다. 사실 이제 일반인들은 디지털카메라를 사용할 일이 거의 없지만, 전문적인 사진가나 1인 크리에이터들은 오히려 영상촬영까지 가능한 미러리스 카메라에 대한 수요가 있을 수밖에 없다. 소니는 이러한 하이엔드 카메라 라인업에서 알파 시리즈를 중심으로 상당히 선방하고 있다.
다음으로 이미지센서 분야. 사실 소니 전자산업의 핵심은 이 이미지센서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지센서란 쉽게 말해 카메라가 촬영한 이미지를 전자형태로 바꾸어주는 장치이다. 그래야 카메라가 촬영한 이미지가 파일이 되어 우리가 디지털 기기에서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 센서는 스마트 기기와 스마트 팩토리의 시대가 되면서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는데, 사진기가 사라진 자리를 스마트폰이 점령했고 그 스마트폰 카메라의 가장 핵심 부품이 바로 이 이미지센서이다. 뿐만 아니라 스마트팩토리에서는 생산공정의 상태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역시 이미지센서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가령 공장의 불량품 검출장치는 불량품을 인식하는 센서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데, 이미지센서는 바로 이런 장치에 들어가는 것이다. 즉 ‘스마트’의 시대에는 기계가 무언가를 시각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 핵심을 소니가 쥐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니의 아픈 손가락이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스마트폰 브랜드 엑스페리아 역시 이미지 인식 중심의 전자 포트폴리오를 형성중인 소니의 대전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또한 소니는 한때 내시경 시장의 강자 올림푸스를 소유하고 있었고, 매각한 이후인 지금도 내시경 분야에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상의 전자 포트폴리오를 보면 소니는 과거처럼 단순히 이런저런 전자제품을 생산하는 것이 아닌 이미지를 ‘찍는’ 센서(광학장치)를 중심으로 제법 일관성이 있는 포트폴리오를 형성하고 있다. 앞서도 말했듯 기계의 시각적 인식이 중요해지는 스마트 기기의 시대에 이러한 소니의 중요성은 더욱 높아질 예정이다.
2) 미디어: 단순한 오락이 아닌 세계관을 파는 회사
다음으로 미디어의 경우 성인용 서브컬쳐를 중심으로 굉장히 단단한 볼륨을 구축하고 있다. 모두를 위한 게임을 지향하는 닌텐도와는 달리 소니는 어느 정도 서브컬쳐의 문법에 익숙한 젊은 남성을 중심으로 한 타겟을 상대로 미디어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우선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과 게임 비즈니스는 이미 한국의 2-30대 남성들 사이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 신기종과 소니가 제작한 AAA급 게임이 출시될 때마다 한국의 온라인 커뮤니티가 들썩거린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음악의 경우 소니뮤직엔터테인먼트는 명실상부한 세계 3대 음반사로 불리는 메이저 음반회사이다. 음악 전문가가 아닌 내가 굳이 설명하는 것이 더 무의미할 정도로 소니뮤직의 위상은 세계적인 수준이다.
하지만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오히려 소니뮤직과 더불어 소니의 음악사업의 양대 축을 이루고 있는 소니뮤직엔터테인먼트 재팬(이하 ‘소니뮤직 재팬’)이다. 소니뮤직 재팬은 단순히 유명 아티스트와 계약을 하는 수준을 넘어 트렌디한 아티스트를 기획하는 능력도 가지고 있는데, 한국에서도 ‘아이돌’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YOASOBI가 이러한 소니뮤직 재팬의 수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아티스트이다. 물론 소속 아티스트 Ayase와 이쿠타 리라는 이전부터 상당한 인지도를 가진 아티스트들이었지만, ‘소설을 음악으로 만든다’는 컨셉 아래 이들을 하나의 아티스트로 조합하고 키워낸 것은 소니 기획라인의 힘이었다.
소니 미디어 비즈니스의 또 다른 한 축을 담당하는 것이 애니메이션 사업이다. 소니가 애니메이션을 만든다고? 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소니는 애니플렉스, A-1 스튜디오, 클로버웍스라는 자회사들을 통해 일본 성인용 애니메이션 분야의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에서는 어릴 적부터 서브컬쳐에 익숙한 20-30대 성인들(빠르면 10대 중후반)을 타겟으로 한 심야 1시쯤에 방송되는 성인용 애니메이션이 새로운 주류로 떠올랐다. 이전에는 애니메이션은 아동들이 보다가 나이가 들면서 졸업하는 것으로 여겨졌다면 이제는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소재를 과감히 채택한 성인용 소재를 선보임으로써 어른 오타쿠들도 보편적으로 애니메이션을 즐기는 시대가 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과거에는 성인용 애니메이션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시티헌터 시리즈나 에반게리온과 같이 어른들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작품들은 이전에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씹덕물’이라고 부르는 어느 정도 철이 든 연령대를 대상으로 하는 서브컬쳐 문화는 2000년대 이후 황금기를 맞았다.)
이러한 성인용 애니메이션 문화의 선봉에 서 있는 것이 애니메이션 기획사 애니플렉스와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A-1 스튜디오, 클로버웍스이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제작에 있어서는 그림을 그리는 제작사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시리즈 전체의 전략과 방향성을 기획하는 기획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애니플렉스는 이 기획이라는 차원에서 일본에서 가장 잘 나가는 기획사 중 하나이다. 애니플렉스가 어떤 회사인지는 설명보다는 이들이 기획한 작품을 살펴보는게 더 빠를 것이다.(단, 아래의 목록에는 원작 IP가 다른 회사에 속하고, 애니메이션 기획만 애니플렉스가 담당한 작품도 다수 있다.)
강철의 연금술사, 귀멸의 칼날, 나혼자만 레벨업,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 봇치 더 록, 소드 아트 온라인, 모노가타리 시리즈…
사실상 2000년대 이후 한 시대를 애니메이션계를 풍미한 작품들의 상당수가 이 기획사의 프로듀스를 통해 탄생하였다. 물론 이러한 작품들의 상당수는 원작이 있기 때문에 원작자와 원작 IP 보유사의 공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지만, 유명한 IP가 부실한 애니메이션화에 의해 질타를 받는 경우가 상당히 있음을 생각해보면 소니 애니메이션 라인의 저력은 상당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A-1 프로덕션과 클로버웍스는 2010년대 이후 수려한 고품질의 작화를 자랑하는 다수의 작품을 담당함으로써 ‘일본 애니메이션의 스타일이란 이런 것’을 대표하는 회사이다. 물론 우리가 잘 아는 지브리, 귀멸의 칼날을 제작한 유포터블, 체인소맨을 제작한 MAPPA, 단다단!을 제작한 사이언스 사루,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와 케이온을 제작한 교토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 신극장판을 제작한 카라 등 일본에는 스타일리쉬한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많지만, 단연코 A-1과 클로버웍스만큼 우리가 흔히 ‘씹덕애니’라고 생각하는 스타일을 가장 잘 구현하는 제작사를 찾기란 쉽지 않다. 우리가 생각하는 소위 ‘요즘 일본 애니’ 스타일을 가장 잘 구현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상의 소니 미디어 엔터테인먼트의 면면을 살펴보면 개별 작품, 개별 콘텐츠를 판매하는 회사라기보다는 그 속에 자리잡은 깊숙한 세계관이 강조되는 굵직굵직한 시리즈와 세계관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아닌 것들도 많지만) 이것은 미디어를 개별 작품이 아닌 생태계로 보고 접근하는 소니의 강력한 미디어 기획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3) 금융: 금융의 특색있는 강자 소니
한국사회에 흔히 퍼진 일본에 대한 고정관념 중 하나가 일본은 금융시스템이 후진적이라는 이미지이다. 이것은 극히 최근까지도 현금결제가 많이 통용되었고, 핀테크 보급이 상대적으로 느렸던 일본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일정 부분 진실을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소니 금융 부문의 사례를 보면 일본이 반드시 디지털 금융의 후진국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소니의 금융부문은 크게 은행업과 보험업으로 나뉘어져 있다. 우선 소니은행은 인터넷 은행이다. 한국에서는 불과 몇 년 전에야 카카오뱅크와 케이뱅크가 등장하면서 자리잡은 인터넷 은행이지만, 일본의 소니은행은 2001년에 설립된 회사로 굉장히 이른 시점부터 오프라인 영업점 없이 인터넷으로만 영업하는 비대면 은행업을 추구하는 회사였다. 현재도 소니은행은 스미신SBI넷은행, 라쿠텐은행 등과 더불어서 인터넷 은행업계의 주요한 플레이어로 활약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소니은행의 입지는 비대면 결제에 익숙한 젊은세대가 사회의 주류가 되면서 더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맞춤형 보험설계 서비스를 제공하는 라이프플래너 제도로 유명한 소니생명은 일본생명, 다이이치생명 등 거대 생명보험사들에 비해서는 규모가 작지만 그래도 일본 내에서는 뚜렷한 특색을 가진 우량한 생명보험사로 소니그룹 전체의 중요한 캐쉬카우로 기능하고 있다.
3. 문어발 경영도 잘하면 돈이 된다
IMF 이후 한국 재벌의 문어발 경영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전자, 미디어, 금융이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3분야에서 동시에 각개약진중인 소니그룹의 행보도 어떻게 보면 일종의 문어발 경영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각 부문의 사업에 있어 명확한 컨셉을 설정하고 선택과 집중을 통해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분야에서 강력한 우위를 확보하고 있다. 특히 소니가 손대는 사업들은 하나같이 미래산업이 발달하고 사회구조가 변화할수록 점점 더 수혜를 보게 될 산업군이다.
문어발 경영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잘 구성된 수평적 포트폴리오, 그리고 자회사들의 우수한 경영능력은 자칫 관련성이 없어 보이는 수평적 계열화마저도 성공사례로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에는 기술혁신, 경영능력, 기업가정신이 기업의 성패를 가르는 것이다. 소니는 워크맨과 바이오의 실패로부터 부활하면서 이러한 핵심역량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