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류에서 상류로
1. ‘일본 반도체의 몰락’
한국의 경영경제 및 산업 리포트에 자주 등장하는 문구가 ‘일본 반도체의 몰락’이다. 엘피다의 처참한 실패를 끝으로 한국의 일본 반도체 산업에 대한 분석은 흐지부지 끝맺는 경우가 많다. 마치 큰 죄를 지은 악당이 정의의 심판을 받고 저주를 받아 사라지는 것으로 끝나는 이야기처럼. 사실 이러한 전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선호하는 것이기도 해서인지 수없이 많은 컨텐츠와 자료에서 반복적으로 관찰할 수 있다.
하지만 정말 일본 반도체는 끝났는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후술하듯 일본에는 아직도 세계적인 플래쉬메모리 제조업체인 키옥시아가 남아있고, 또한 전기자동차 시장의 성장으로 각광받고 있는 레거시 반도체(파워반도체) 제조회사인 르네사스, 롬(ROHM)과 같은 업체들을 갖고 있다. 레거시라고 해도 EV 탑재용으로 갈수록 수요가 늘어나고 있어서 딱히 사양산업인 것도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본 기업들은 반도체의 직접 제조에 해당하는 파운드리 분야에서는 상당부분 퇴장했지만 그 파운드리의 생산공정을 뒷받침하는 이른바 ‘소부장(소재, 부품, 장비)’ 분야에는 여전히 글로벌 시장을 지배하는 강력한 기업들이 많이 존재한다. 과장 좀 보태 말한다면 어느날 갑자기 일본이 지도에서 지워진다면 당장 HBM과 같은 같은 첨단 반도체를 만들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본 소프트뱅크 그룹이 영국의 반도체 설계회사(팹리스)인 ARM을 인수하면서 일본 반도체업계는 다시 한번 글로벌 경쟁의 중심으로 들어온 상태이다. ‘몰락’이 단순히 월드 클래스 파운드리를 보유했는지의 여부를 뜻한다면 일본 반도체 산업은 과거에 비해 몰락한 것이 맞다. 하지만 반도체 산업 생태계 전체의 관점에서 본다면 일본의 기업들은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단순히 ‘일뽕’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나는 우리가 이건희 전 삼성전자 회장이 경고한 ‘샌드위치론’에 대해 다시한번 고민해 볼 필요가 있고, 일본 반도체산업의 진화(정말 말 그대로 생물학적인 진화이다.)는 그러한 고민의 답을 찾는데 정답은 아닐지라도 생각의 실마리는 된다고 생각한다.
2019년의 일본과의 화이트리스트 관련 통상분쟁을 거치면서 우리나라는 의외로 포토레지스트와 같은 일본의 소재가 한국의 반도체산업에도 아킬레스건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일시적으로 일본 ‘소부장’ 산업에 대한 관심이 일기도 했지만, 당시에도 일본의 반도체 산업 생태계와 밸류체인 전반을 다룬 자료는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이 나의 관찰이다.
사실 나는 전자공학의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는, 말 그대로 문과 출신의 일반인이다. 당연히 반도체의 복잡한 원리나 공학적 설명을 할 수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그보다는 ‘경영’과 ‘산업’의 관점에서 일본의 반도체 산업 생태계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말 그대로 조감(bird-eye view)해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2. 반도체 제조 공정 곳곳에 위치한 일본 기업들
처음에는 유력한 일본의 메이커들을 소개하면 어떨까? 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별로 효율적이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다른 챕터와는 달리 반도체 제조공정을 따라가면서 각 공정에 어떤 일본 메이커들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는지를 체크하는 식으로 글을 전개하고자 한다. (단, 유의할 것은 내가 구분한 공정의 단계가 공학적인 정확성이 아니라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임의적인 구분이라는 점을 일러둔다. 실제 기술적으로는 반도체의 8대공정이 존재하나, 이러한 8대공정을 실제로 설명하는 것은 독자들의 피로를 유발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정확성을 다소 희생하더라도 설명의 용의성을 취하고자 한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반도체란 무엇인가? 전류의 흐름이 어떻고, 하는 반직관적인 공학적 설명을 제쳐놓고 본다면 기본적으로 반도체는 계산기(비메모리)이자 책(메모리)이다. 즉, 전자기기 안에 반도체가 들어가 계산을 수행하고 정보를 저장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사실상 반도체가 ‘본체’인 셈이다.
이러한 기본 컨셉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해보자. 우선 반도체의 몸체는 웨이퍼이다. 우리가 어릴적에 아동용 과학책에서 보았던, 모래가 실리콘이 되어 다시 반도체가 된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 웨이퍼를 가리키는 것이다. 웨이퍼는 반도체의 몸체 역할을 하며 앞으로 나올 공정에서 이 웨이퍼를 깎고, 다듬고, 잘라내서 반도체를 만들게 된다.
웨이퍼 세계 시장의 점유율 1위는 일본의 신에츠화학공업이다. 예전에 집에 물이 새는 일이 생겨서 실리콘을 주문했더니 바로 이 신에츠에서 만든 상품을 구입하게 된 적이 있었다. 신에츠는 원래 수지와 실리콘 등을 만드는 화학회사인데 자신들의 제작기술을 살려 웨이퍼도 제작하게 되었고 이것이 디지털 시대를 맞으면서 세계를 제패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SK실트론이 이 분야에서 선전하고 있다.)
다음 단계는 리소그래피(노광) 공정이다. 리소그래피, 노광 모두 어려운 말인데 쉽게 비유하자면 미술시간에 판화를 만들 때 판화 틀을 깎아내는 과정에서 정확하게 깎아내기 위해 미리 판 위에 선으로 윤곽을 그려놓고, 나머지 부분만 깎던지(양각), 아니면 선 안쪽만 깎던지(음각) 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바로 깎는 부분과 남길 부분을 가르는 윤곽을 그리는 과정이 바로 이 공정이다.
얼핏 보면 별 것 아닌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반도체 공정 전체적으로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일본 업체들도 다른 공정에서는 세계 탑급 업체들이 있지만 적어도 이 공정 만큼은 네덜란드의 ASML이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 ASML은 웨이퍼 위에 빛을 쬐어서 반도체 회로 모양을 새기는 노광장비를 생산하는 전세계의 거의 유일한 업체이다. 이 노광장비는 대단히 만들기 어렵고, 사실상 노광장비의 보유 여부가 반도체 생산 능력을 결정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은 이러한 노광장비가 차세대 반도체 패권에 핵심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ASML의 장비가 중국으로 팔려나가는 것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 노광장비는 사실상 ‘국가권력급’ 장비인 셈이다.
그렇다면 일본은 리소그래피 공정에서는 완전히 나가리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우선 ASML과의 경쟁에서 패배한 캐논(우리가 아는 그 Canon 맞다.)은 차세대 리소그래피 장비를 선점하기 위해 기술개발에 열심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외에도 이 리소그래피 공정에는 포토레지스트라는 감광재가 필수적인데 이 재료의 생산시장을 일본 회사들이 꽉 잡고 있는 상태이다. (2019년 화이트리스트 분쟁에서도 이 포토레지스트의 반출통제가 주요한 이슈가 되었다.) JSR, 도쿄응화공업(TOK)와 같은 회사들이 이러한 포토레지스트 제조 분야의 세계 챔피언들이다.
(설명을 위해 덧붙이자면 포토레지스트를 회로 모양으로 발라 그 부분만 노광장비의 빛에 덜 노출시켜서 나중에 그 부분을 남기고 자르는 식으로 반도체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리소그래피를 통해 반도체 회로를 웨이퍼 위에 그렸다면, 그 부분만 남기고 나머지 부분을 깎아서 양각을 해야 할 것이다. 이 과정에 에칭 공정이다. 실제로도 이것은 유사한 판화 기법인 에칭 기법과 같은 이름을 갖고 있다. 이 에칭 장비를 생산하는 세계적인 메이커가 일본의 도쿄 일렉트론(TEL)이다.
사실 도쿄 일렉트론은 에칭 장비 이외에도 반도체 공정 각 파트에 사용되는 다양한 장비를 생산하는 반도체 생산장비 업계의 세계적인 강자이다. 흔히들 세계 4대 반도체 장비 메이커로 ASML,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 램 리서치, 그리고 도쿄 일렉트론을 꼽는다.
다음 공정으로 넘어가기 전에 이 도쿄 일렉트론은 자세히 언급하고 넘어갈 가치가 있다. 그만큼 경영학적으로도 중요한 회사이기 때문이다.
도쿄 일렉트론은 왠지 이름만 들어보면 전자공학의 천재가 창업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이 회사를 창업한 것은 의외로 상사맨들이었다. 흔히들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문과 양복쟁이들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제조업 분야의 경영에 함부로 개입해서 일을 다 망쳐놓는다.”고 탄식하는 사람들이 많다. 마치 제조업은 ‘순수한’ 엔지니어들이 담당해야 최선의 결과를 얻는다고 믿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세계 최고의 첨단 반도체 장비를 창업하고 키워낸 것은 문과 출신의 상사맨들이었다. 사실 이 2명의 상사맨이 시작했던 것은 반도체 장비의 무역업이었다. 해외의 반도체 장비를 일본에 공급하는 일을 하다가 점차 ‘이걸 직접 만들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들은 그렇게 도쿄 일렉트론을 반도체 장비 회사로 키워낸 것이었다.
이러한 기원 덕분에 도쿄 일렉트론은 다른 메이커들과는 달리 말뿐이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의 고객 제일주의를 실현하고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기술자들의 자기만족을 위해 만든 상품을 억지로 밀어내듯 파는 것이 아니라, 고객이 원하는 것은 뭐든 만들어주는 방향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고객이 이러저러한 사양의 제품이 필요하다고 하면 어떻게든 그에 맞춰 주는 것이 도쿄 일렉트론의 특징이라고 한다.
사실 경영과 설계, 제조는 분명 다른 분야이고 그렇기 때문에 만드는걸 잘한다고 해서 그 만드는 회사를 잘 운영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문과(특히 재무회계) 출신들이 기술적 전문성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기업 경영을 망치는 경우도 분명 많다. 하지만 역으로 기술자들이 갖추지 못한 경영 마인드를 첨단 산업에 도입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불어넣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도쿄 일렉트론은 그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웨이퍼를 회로 모양대로 깎아낸 뒤에는 당연히 남겨진 찌꺼기를 세정해서 깨끗한 기판으로 만드는 세정 공정이 필요하다. 이 세정장비를 만드는 주요한 메이커 중 하나가 일본의 SCREEN 홀딩스이다.
그리고 이 세정 공정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초순수이다. 학교 미술시간에 만드는 판화 정도야 깎아낸 다음에 툭툭 털고 입으로 훅훅 불어서 완성하겠지만, 반도체는 아주 작은 먼지만 들어가도 불량품이 되어 수율을 낮추는 결과를 초래한다. 따라서 에칭을 한 후에 남은 찌꺼기를 씻어내는 물도 일반 수돗물을 쓸 수 없다. 여기에는 모든 불순물이 제거되어 순수히 수소와 산소만 남아있는 ‘초순수’라는 특수한 용액에 가까운 물을 써야 한다. 그리고 이 초순수를 만드는 정수장비의 세계적인 메이커 역시 일본의 쿠리타공업이라는 회사이다. 쿠리타공업 회사는 여러 단계에서 걸쳐 물의 불순물을 철저히 제거하고, 그리고 세정이 끝나 찌꺼기가 섞인 폐수를 다시 깨끗하게 정화하여 배출하는 전체 시스템을 공급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리고 반도체 제조 공정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것이 제조 환경을 진공상태로 유지하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 반도체는 표면에 어떠한 작은 먼지나 불순물도 앉으면 안되는 극도의 정밀 제품이며 그렇기 때문에 외부에서 아무것도 유입되지 않도록 철저히 통제하는 진공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이러한 진공장비 제작 역시 일본의 아르박(ULVAC)이라는 회사가 높은 점유율을 갖고 있다. 이 회사는 말 그대로 진공 한우물을 파는 회사이다.
여기까지 공정이 끝났다면 중요한 것이 지금까지 열심히 만든 반도체를 완제품 형태로 만드는 패키징 공정이다. 이 패키징의 초기단계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 회로가 새겨진 웨이퍼를 일정한 크기대로 잘라 완제품 반도체로 완성하는 절삭 공정이다. 이 공정에 필요한 정밀 절삭장비를 만드는 회사가 일본의 디스코(DISCO)이다. 이 회사는 자신들의 캐치프레이즈대로 ‘자르고, 깎고, 다듬는’ 장비를 만드는 데에 특화된 회사이다.
그리고 완성되어 패키징이 완료된 반도체가 제대로 작동하는지를 테스트하는 마지막 공정에는 일본의 반도체 검사장비 전문 제조업체 어드밴테스트가 세계적인 점유율을 갖고 있다.
앞서도 말했듯 나는 반도체의 8대 공정을 순전히 이해를 위해 굉장히 직관적으로 단순화해서 설명했고,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복잡한 과정을 거쳐 반도체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내가 소개한 회사들도 정말 해당 공정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회사들만을 소개한 것이고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일본 기업들이 (그리고 세계 기업들이) 반도체 제작 공정에 참여하고 있다.
3. 팹리스의 팹리스 ARM과 그 모회사 소프트뱅크
우리나라에는 언제부턴가 유럽을 몰락하는 대륙으로 보는 시선이 팽배하다. GDP나 노벨상 수상과 같은 모든 면에서 우리를 훌쩍 앞서는 유럽의 경제대국들 마저도 “걔네들 이제 관뚜껑에 못박힐 일만 남은거 아님?”이라고 치부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선도형 제조국가로 도약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중인 우리나라와 달리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와 같은 유럽의 선진 공업국가들은 AI, 전기자동차, 친환경에너지, 바이오 헬스케어와 같은 첨단 분야를 선도하는 기업들을 다수 갖고 있다. 당장 비만약 치료제로 선풍적 인기를 끄는 ‘위고비’는 덴마크의 제약사 노보 노디스크가 개발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챗 지피티, 제미나이, 딥시크, 클로드 등과 더불어 강력한 성능을 가진 생성형 AI ‘미스트랄’은 프랑스 회사가 개발한 것이다.
갑자기 왜 이런 유럽 이야기를 하느냐고 하면, AI를 만들기 위해서는 AI 가속기와 같은 강력한 반도체가 필요한데 이 반도체를 만드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회사인 ARM을 소개하기 위해서이다.
최근 반도체는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고, 따라서 반도체를 설계하는 ‘팹리스’와 실제 반도체를 만드는 ‘파운드리’가 분리되는 경향이 있다. 이 팹리스의 가장 대표적인 회사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주식 투자자들에게 익숙한 엔비디아이고, 파운드리의 가장 대표적인 회사가 삼성전자의 라이벌 TSMC이다.
하지만 팹리스들 역시 혼자서만 반도체를 설계하는 것이 아니다. 엔비디아와 같은 팹리스가 반도체를 설계하는데 필요한 원천기술과 특허들이 있는데, 이것을 가진 것이 바로 영국의 ARM이다. 우리는 영국이 이미 몰락한 제국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영국은 전자 및 AI 분야에서 아주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국가이며, 이세돌과 대결해 화제를 낳았던 ‘알파고’ 역시 영국의 딥마인드 사가 제작한 AI였다. ARM은 이 영국이 낳은 대표적인 반도체 설계 회사로, 정확히는 설계회사의 상류에서 더 근본적인 설계를 하는 설계의 설계, 팹리스의 팹리스 역할을 하는 회사이다.
그리고 이 ARM을 가지고 있는 것이 손 마사요시가 경영하는 일본의 소프트뱅크이다. 손 마사요시는 오래전부터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자하는 비전펀드를 설립해 세계 각지의 첨단기업들을 사고팔았는데, 알리바바, 우버, 그리고 우리나라의 쿠팡과 같은 기업들이 전부 그의 투자를 통해 성장한 기업들이다. 그리고 손 마사요시의 소프트뱅크의 포트폴리오 중 하나가 바로 이 ARM이다.
사실 이것은 일본의 반도체 생태계에 있어 아주 역사적인 일인데, 도시바, NEC와 같은 20세기의 일본 반도체 메이커들이 시장에서 속속 철수하면서 반도체 생태계 내에서의 일본의 지위는 반도체 제조공정의 소재, 부품, 장비업체와 그리고 첨단 반도체 경쟁에서는 한 발 떨어진 키옥시아와 같은 메모리반도체, 르네사스와 같은 레거시반도체들로 한정되었다.
하지만 소프트뱅크가 ARM을 인수하게 되면서 상황이 변했다. 물론 ARM은 아직도 영국 기업이고, 소프트뱅크가 경영에 적극적으로 관여한다는 정황은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미국이 거의 독차지하고 있던 반도체 설계 분야에 영국-일본계 기업이 뛰어들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변화이다. 일본이 영국 업체를 통해 다시한번 반도체 산업의 가장 치열한 전쟁터로 뛰어든 것이다.
4. 가장 미래지향적 산업: 레거시 반도체
최근 디지털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우리는 ‘레거시’ 라는 단어를 즐겨 쓴다. 디지털 이전의 아날로그 시절의 유산들을 ‘레거시’라는 단어를 붙여 ‘한 물 갔다’는 말을 정중하게 표현하곤 한다.
하지만 레거시 반도체는 다른 ‘레거시’들과는 다르다. 오히려 이 레거시 반도체야말로 AI가속기와 같은 첨단 반도체만큼이나 미래지향적인 분야이다.
최근 우리나라 신문에는 3나노, 5나노 이야기가 나온다. 이러한 극미세공정이 들어가는 반도체는 AI가속기와 같은 첨단 로직 반도체나 메모리 반도체에 사용되는 것들이다. AV기기나 전자 디바이스 매니아들이라면 잘 알겠지만 제품이 복잡하고 섬세해질수록 아주 작은 충격에도 고장이 잘 난다.
하지만 반도체는 기본적으로 계산기이고 온도와 습도가 철저히 유지되는 데이터센터의 컴퓨터에만 쓰이는 것이 아니다. 진흙 뻘밭을 굴러다니는 자동차나 충격, 소음에 24시간 노출된 공장의 자동화 기기에도 쓰인다. 이런 혹독한 환경에 놓인 기계에 살짝만 틀어져도 고장이 나는 3나노, 5나노짜리 첨단 반도체를 많이 사용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런 상업용, 산업용 기계에 내장되는 반도체가 필요한데 그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레거시 반도체이다. 이 반도체들은 이미 예전에 개발된 반도체들로 계산 성능에 있어서는 첨단 반도체에 비해 뒤지지만, 내구도와 신뢰성 면에서는 대단히 뛰어나다. 따라서 자동차, 공장 생산설비와 같은 상대적으로 거친 환경에서 사용되는 기계에 들어간다.
특히 우리는 자동차에 사용되는 반도체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자동차가 기름으로만 굴러간다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전기자동차가 등장하기 전부터도 자동차는 반쯤 전자장비였다. (그런 면에서 현대자동차의 ‘드라이빙 디바이스’라는 표현은 절묘하다.) 홈 엔터테인먼트 디스플레이 이외에도 온도를 측정하고, 알람을 넣고, 차선과 후방의 장애물을 인식하는 등 다양한 전자장비들이 들어간다. 그리고 이런 전자장비들이 돌아가려면 반도체, 레거시 반도체가 꼭 필요하다.
게다가 전기자동차가 점차 보편화되면서 이러한 레거시 반도체의 역할은 더욱 증대되었다. 그나마 가솔린 자동차는 추진기관이라도 화석연료에 기반한 ‘기계장비’였지만, 이제 전기자동차가 되면서 사실상 자동차는 거대한 전자 디바이스가 되었다. 전기자동차는 차내의 거의 모든 기능을 마치 컴퓨터처럼 전자적으로 제어하도록 되어있다. 당연히 반도체의 사용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폭증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레거시 반도체가 레거시가 이제 아니게 된 상황이 되었다. 오히려 레거시 반도체는 전기자동차 시프트의 아주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는 부품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일본 기업들은 여전히 이 레거시 반도체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르네사스, 롬(ROHM)과 같은 회사들이 바로 그런 회사들이다.
5. 일본 반도체는 정말로 몰락했는가?
어떤 의미에서만 보면 일본 반도체 산업은 몰락했다. 이제는 일본에는 엔비디아나 TSMC, 삼성전자, 하이닉스와 같이 세계를 주름잡는 업체들은 없다. 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는 여전히 일본 기업들은 반도체 산업 생태계의 밸류체인 각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첨단 반도체를 설계하는 기업을 보유하고 있기도 하고, 반도체 공정에 사용되는 첨단장비나 소재를 생산하기도 하며, 전기자동차 등에 사용되는 레거시 반도체를 생산하기도 한다.
일본의 기업들은 반도체 산업에서 한국과 대만, 중국이라는 반도체 후발주자들의 추격, 그리고 미국이라는 반도체 선발주자 사이에 끼여 많은 고초를 겪었다. 하지만 밸류체인의 상류로, 그리고 레거시 분야로, 그리고 인수합병을 통해 다양한 전략을 구사하며 살아남았으며, 중요하게는 다시 주전장으로 돌아오고 있다.
반도체에서는 한국 기업들이 인류역사에 길이 남은 족적을 남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반도체산업의 교훈이 반드시 반도체산업에만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이건희 전 회장이 남긴 메시지-샌드위치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까지는 아니더라도 생각의 실마리를 주는 것이 일본 반도체 산업의 진화라고 생각해서 굳이 이 챕터를 더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