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가장 심각한 문제

레스 푸블리카 [16]

by 이그나티우스

나는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가장 심각한 문제를 꼽으라면 단연코 “물질적 빈곤”을 들고 싶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의아해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최근에는 다소 잠잠해지기는 했지만 종교적, 철학적으로 우리 시대의 문제는 지나친 물질적 풍요에 있다는 논리가 많이 회자되어왔기 때문이다.


언뜻 생각해보면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북반구 주요 선진국에 사는 중간 이상의 생활수준을 가진 사람들 기준으로 인류는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역사상의 황금시대라는 오현제 시대의 로마인들은 에어컨이나 냉장고와 같은 지극히 기본적인 가전제품도 갖고 있지 못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물질적 빈곤을 논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시대의 가장 심각한 마음의 질병인 “미래에 대한 기대의 상실”이라는 문제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기대의 상실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우리가 삶에 대해 갖는 기대란 대개는 그렇게 거창하지 않다. 그 기대란 대체 무엇인가? 열심히 공부하면 좋은 학교에 입학하고, 좋은 학교를 다니면 원하는 직장을 얻고, 원하는 직장을 얻으면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고,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면 좋은 배우자를 만날 수 있고, 이런 식으로 인생을 제대로 살면 노후를 평온하게 보낼 수 있다는 기대이다.


이것은 정복자가 되거나 세계 최대의 부호가 되겠다는 야망이라기보다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기 위한 최소한의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조건에 관한 기대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대마저도 충족되지 못한다면 인간의 삶은 비참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최근 1세대 동안 이러한 삶에 대한 지극히 정상적인 기대가 점차 이뤄질 수 없는 꿈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열심히 공부해도 좋은 학교에 입학할 수 없고, 좋은 학교를 졸업한다고 해서 원하는 직장을 구한다는 보장이 없고, 설령 원하는 직장을 얻어도 언제 일자리를 잃을지 모르며, 착하고 정직하게 살아도 그것은 인간관계를 풍요롭게 해주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인구구조의 변화로 인해 누구도 나의 노후를 돌보아 주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이 팽배해 있다.


이런 불안은 우리의 마음을 좀먹고 있다.


사실 생각해보면 현재진행중인 정치적 논쟁의 근원에는 이러한 인간다운 삶에 대한 기대가 좌절된 데 대한 불안이 자리잡고 있다. 예를 들어서 지금 주요 선진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이민자에 대한 반감의 밑바탕에는 이민자들이 현지인들의 일자리를 약탈한다는 믿음이 있는데, 뒤집어서 말하면 만약 현지인들이 현재의 고용상태에 만족하고 있다면 반발이 이렇게까지 크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나의 직업에 충실하다면, 누가 어디서 일자리를 얻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실제로 상류층, 엘리트가 이민자들에 대해 상대적으로 ‘너그러운’ 이유도 이런 부분이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예를 생각해보자. 주요 선진국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문화전쟁의 가장 큰 축은 젠더갈등인데 이 역시도 청년층의 경제적 여력의 악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청년실업이 각국에서 심각한 문제가 되면서(비록 실업률 자체는 치솟지 않았더라도 양질의 고용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는다는 광범위한 불만이 존재한다.), 남녀간이 서로간의 일자리를 두고 싸우는 경쟁자가 되었다. 또한 연애와 결혼에서 매칭이 불균형하게 이뤄지면서(남녀 모두 원하는 짝을 얻지 못하는 문제) 남녀간의 서로에 대한 불만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이는 뒤집어서 말하면 청년층이 남녀가 모두 만족할 정도로 충분히 일자리를 구할 수 있고, 데이트와 결혼에 있어서 기회가 충분히 주어진다면 싸우더라도 지금보다 덜 싸울 것이라는 얘기다.


이러한 기대의 좌절의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물질적인 빈곤 때문이다.


각급학교는 원하는 학생들에게 충분히 문호를 개방하지 못해서 불필요한 입시경쟁을 야기하고 있다. 만약 학생들이 가고자 하는 학교들이 충분한 입학정원을 보장한다면 지금과 같은 입시경쟁은 훨씬 완화될 것이다. 일자리 역시 마찬가지여서 경제가 성장하고 기업이 충분한 이익을 거두고 있다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조건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고용할 것이다. 또한 경제가 성장하여 복지재정이 충분하다면 노년의 빈곤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데이트와 결혼의 매칭의 문제는 순수히 물질적인 문제라고는 보기 어렵지만 이 역시도 “매칭의 기회의 부족”과 “외로움”이라는 일종의 결핍현상이 중요한 원인이다.)


즉, 물질적인 빈곤으로 인하여 기득권자들이 자원의 분배를 타이트하게 조이고 있고 이 여파가 중산층 이하의 서민들을 엄습하여 지극히 정상적인 기대마저도 갖지 못하게 하는 상황을 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대의 붕괴는 불안감을 낳아 정치적인 불안을 더욱 부추긴다.


물론 모든 사회문제의 근원을 물질적인 빈곤에 따른 미래에 대한 불안의 확대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그 자체로서 독자적인 원인을 가진 문제들도 많다. 하지만 많은 사회적 갈등의 근원을 추적해 보면 결국에는 이러한 물질적 빈곤에 따른 불안감의 확대가 그 원인이라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개별 문제에 대해 열을 올리기 이전에 우선 그 환경이 되는 물질적 기반이 충분한지에 대해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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