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대 여성들의 남성혐오가 이해되지 않는 이유

레스 푸블리카 [25]

by 이그나티우스

한국의 2-30대 여성들이 가장 주류적인 정서 중 하나가 같은 세대의 남성들에 대한 강렬한 르쌍티망의 혐오 감정이다. 그것은 대략 이런 내용이다-자기들이 동년배 남성들에 인성이나 능력 면에서 더 “나은” 데도 불구하고 “여성혐오적” 사회구조로 인하여 불평등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더 “낫다”고 단언하는 건지는 솔직히 잘 이해가 가지 않지만, 그런 우열에 대한 이야기는 이 글의 주제가 아니다.


물론 동년배 남성들에 대한 증오감에 대해 이해를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루종일 학교나 직장에서 섞여 살면서 자기들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은 나이 많은 기득권 “개저씨”가 아니라, 동년배 남성들인 경우가 더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감정을 느낀다고 해서 그 감정이 맞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사실 나는 그런 르쌍티망이 일종의 모순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왜 하필이면 남성 전체가 아니라 동년배 남성들만 콕 집어서 미워하는 건지 모르겠다. 젊은 여성들이 말하는 “남성 특권”이 존재한다 치자. 그러면 그 특권이라는 것이 누려도 기성세대가 더 많이 누리지 않겠는가? 학생이거나 기껏해야 사회 초년생인 젊은 남성들이 뭘 그렇게 대단한 특권을 누린다는 것인지 솔직히 잘 이해가 가질 않는다.


이런 인식의 왜곡이 발생하는 이유는 2-30대 여성들의 메인스트림 페미니즘 정서가 젊은 “여성”에 대한 차별과 “젊은” 사람에 대한 차별을 잘 구별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젊은, 여성들이 겪는 차별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에 대해서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것이 젊은 사람이라서 겪는 차별인지, 아니면 여성이라서 겪는 차별인지, 아니면 젊은-여성이라서 겪는 차별인지는 각각이 서로 다른 문제이다. 이것을 구별하지 않으면, 칼 슈미트 식으로 “적과 동지”라고 부를 수 있는 적대와 연대의 대상을 구별할 수 없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기실 젊은 여성들이 말하는 “차별”이란 젊은 세대로서 겪는 차별, 여성으로서 겪는 차별, 그리고 젊은 여성이라서 겪는 차별이 모두 혼재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을 명확히 구별하지 않고 뭉뚱그려 “젊은 여성”으로서 겪는 차별로 라벨링한다면 엉뚱한 대상과 싸우거나, 반대로 엉뚱한 대상과 손을 잡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페미니즘적 르쌍티망의 주된 소비자인 도시 지역의 고학력 청년 여성들이 겪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 중 하나는 경제적 기회의 부족이다. 나름대로 오랫동안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직장을 얻지 못하고 실업상태나 불완전고용 상태에 머물거나, 일자리를 구한다고 해도 원하는 수준의 대우를 해주지 못하는 일자리에 머물러야 하는 문제 말이다. 기실 여성들이 호소하는 “여성 문제”의 많은 측면들은 이러한 경제적 문제가 겉포장을 바꿔 나타나는 현상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문제는 기본적으로 지금의 젊은 세대가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문제로서의 측면이 강하다. 왜냐하면 2-30대 남성들 역시 경제적 기회의 부족이라는 문제를 동일하게 겪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상대적으로만 따진다면 남성들의 상황이 약간 나은 부분은 있다. 일자리가 많이 공급되는 이공계 분야에는 남성들이 많이 진출하고 그들이 남성 전체의 평균적인 소득수준과 경제적 기회를 끌어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대간 비교로 따진다면 2008 금융위기 이후 사회에 진출한 2-30대가 이전의 세대에 비해 평균적으로는 경제적 기회 면에서 열악한 상황이다. 저성장과 고용 없는 성장의 구조가 고착되면서 수준 높은 교육을 받고서도 이전에 비슷한 수준의 교육을 받았던 선배들만큼의 경제적 기회를 부여받지 못하는 것은 여성만이 아니라 젊은 남성에게도 나타나는 문제이다.


물론 그 중에서도 2-30대 여성들에게만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부분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2-30대 여성들이 느끼는 경제적인 압박감은 세대 전체의 기회 불균등으로서의 맥락도 고려해야지 그러한 부분을 도외시한 채 여성들만이 느끼는 특수한 현상으로만 환원해서 볼 경우에는 전체 그림을 놓치게 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즉, 어디까지가 젊은 세대로서 겪는 보편적인 문제이고 어디부터가 젊은 여성들만이 겪는 특수한 문제인지를 분리해서 명확히 인식하고 대책을 요구해야지, 마치 젊은 남성들은 경제적 기회를 충분히 제공받는 것처럼 생각해버린다면 그것은 세대간 불평등이라는 보다 일반적인 차원의 문제를 도외시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의 왜곡은 정치적 실패로 이어진다.


현대 민주주의는 좀 냉소적으로 말해 로비 민주주의라고 볼 수 있다. 이익을 공유하는 집단의 머릿수가 많을수록, 동원할 수 있는 자금이 많을수록 우선적으로 권리를 보호받는다. 한마디로 목소리가 큰 사람 순서대로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다. 그게 옳은지 그른지와는 별개의 문제로 현실정치의 측면에서 본다면 이런 상황에서는 내 편은 늘리고 적은 분열시키는 것이 이득이다.


하지만 지금 2-30대 여성들이 하는 것은 정확히 정 반대의 행동을 하고 있다. 동년배의 남성을 포함한 젊은 세대 전체와 연대하여 투쟁하면 얻을 수 있는 권리도 “청년 여성”으로 다운사이징해서 투쟁할 경우 얻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분명히 생긴다. 왜냐하면 머릿수가 줄어들기 때문에 정치적 교섭력 면에서 밀리기 때문이다.


앞서서 언급한 경제적 기회의 불균등이라는 면에서 말한다면, 2-30대 남녀가 전체가 하나가 되어 고용기회의 확대와 처우의 개선을 한목소리로 요구한다면 기성세대의 고용주들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2-30대 여성들만 전선에서 쏙 이탈해서 동년배 남성들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특별대우를 요구한다면 그게 옳고 그름을 떠나 교섭력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고용주 입장에서는 구직자 전원이 합심하여 머리띠를 두르고 같은 의제로 투쟁하는 것과 남녀가 갈라져 별개의 의제를 떠드는 것 중 당연히 후자 쪽이 상대하기 훨씬 편리한 것이다.


물론 앞서도 말했듯 젊은 세대가 아닌 젊은 여성으로서 느끼는 특유의 불이익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해결을 요구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젊은 여성들이 “젊은 여성만의 젠더문제”라고 주장하는 것의 상당부분은 그런 세대간 문제와 성별간 문제를 구별하지 않은 채 하나로 섞어서 제기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식의 일종의 분파주의와 부족주의는 젊은 여성 세대 자체의 정치적 교섭능력을 떨어뜨리는 역설적인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이 젊은 여성 세대의 정치적 르쌍티망이 가진 한계인 것이다.

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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