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 푸블리카 28
나는 글로벌이라는 말을 싫어한다. “글로벌” 이라는 글자가 붙은 곳은 대개 외국물 먹은 부잣집 자식들에게 유리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좀 과장 섞어 말해 “글로벌”이라는 단어는 “너거 아버지 뭐하시노?”를 돌려 말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사실 글로벌이 정말 표면적인 의미대로 “글로벌 시대에 걸맞는 성숙한 세계시민으로서의 자질”을 의미한다면 나는 그러한 종류의 “글로벌”은 바람직할 뿐만 아니라 지금의 시대에 꼭 들어맞는 가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
“세계시민으로서의 자질”이라는 것은 평가하기가 간단치 않다. 그것은 글로벌한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의미하기도 하며, 타문화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 보편적인 가치와 지역적인 가치에 대한 균형감각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가치들은 분명 존재하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것을 정말로 가지고 있는지를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다보니 현실사회에서 “글로벌”이란 대개 외국어를 얼마나 잘 구사하며, 과거 외국에 얼마나 체류했는지를 기준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그 2가지는 거의 같은 말이기는 하다.) 하지만 국경이 모두 바다와 적성국가로 가로막혀 배나 비행기를 타지 않으면 외국으로 나갈 수 없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그러한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면 결국에는 부잣집 자식들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다.
우선 외국어를 잘 하는 것 자체가 기본적으로는 부모의 재력과 관련이 있다. 외국어는 다른 과목과는 달리 외국어에 얼마나 오랫동안 노출되는지가 사실상 승부를 결정짓는다. 물론 외국어에 아주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 기간은 단축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거나 외국어에 오래 노출되면 거의 자동으로 외국어는 잘하게 된다. 영어와 일본어 공부가 취미인 입장에서 볼 때, 외국어를 못하는 경우는 대개 스킬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외국어에 노출된 환경을 만드는데 실패한 경우가 더 많다. 반대로 언어 구사능력에서 다소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외국어 환경에 충분히 노출되면 그 나라 말을 잘 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이것은 의식적인 노력이 동반되지 않으면 향상되지 않는 수학이나 과학과 같은 과목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본인이 노력하지 않으면 이런 과목들은 잘 하게 될 수 없지만, 외국어는 그냥 외국에서 살기만 해도 (그곳의 코리아타운에만 머물며 현지의 한국계 이민자들과만 어울리지 않는 이상에야) 알아서 늘게 되어있는 것이다.
결국 외국어를 얼마나 부모가 자녀가 외국어에 최대한 오랫동안 노출되게끔 얼마나 투자를 하는지가 결정짓는 것이다. 물론 본인의 노력과 재능으로 그것을 뛰어넘는 경우도 있다. 나도 외국에 거의 나간 경험이 없음에도 영어와 일본어를 평균 이상으로 구사하는데, 그것은 내가 외국어에 관심이 많고 또 거기에 재능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뒤집어 말해 나와 같은 특수한 경우를 모든 사람에게 적용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서 나는 일본어의 한자를 읽는 여러가지 방법을 하나씩 뜯어보는 취미를 갖고 있는데 모두가 나처럼 그렇게 복잡한 일본어 독음에 재미를 느끼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외국 경험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외국에 한걸음이라도 나가기 위해서는 그것이 모두 돈이기 때문이다. 외국으로 이동하는데 드는 교통비, 체제하는 데 드는 비용, 그리고 그곳에서 법적인 지위를 얻기 위해 갖추어야 할 자격들은 국내와는 비교할 수 없는 거액의 돈을 요구한다. 같은 학교를 다닌다고 칠 때, 외국의 서민학교를 다니기 위해서도 한국에서 가장 비싼 학교에 다니는 정도의 비용이 필요하다.
그나마 돈을 쳐발라서 다니는 외국 학교의 경우에는 양반이다. 정규직 일자리나 결혼과 같은 법률상의 지위를 얻기 위해서는 단순히 돈 이상의 네트워크와 권력, 심지어는 운이 필요하기도 하다. 쉥겐조약이 발효되어 연맹국끼리는 자유롭게 이동이 가능한 EU국가가 아닌 이상 외국에 나가는 것은 그 자체로 기득권이고 권력인 것이다.
결국 “외국어”와 “외국 경험”을 기준으로 누군가를 판단하게 되면 외국어에 대한 노출 및 외국 체재 경험을 돈으로 사줄 수 있는 부모를 가진 사람이 유리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아닌데? 나는 돈 없이도 외국에 나가서 성공했는데?” 이런 식으로 반박하는 사람이 꼭 있다. 물론 그런 케이스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한때 자기계발서나 성공 스토리에서 흔히 언급되던 레파토리인 “1000달러만 가지고 외국에서 접시닦이로 살아남았다.” 운운하는 그런 경험담들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부모의 도움은 없었을지언정 “운”이라는 다른 형태의 불평등에 대한 보상인 경우가 많다. 한국인들이 진출하고자 하는 선진국일수록 각종 장학제도와 사회복지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어 운 좋게 큰 돈을 들이지 않고도 현지에 정착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성공 스토리들이 은폐하는 것은 “운”의 작용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이민의 가장 대표적인 루트인 결혼 이민을 생각해보자. 운 좋게 정말로 내가 정착하고 싶은 나라의 사람과 결혼하게 되어 영주권과 시민권을 취득하는데 성공하는 경우가 있다. (이곳 브런치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런데 모두가 인정하겠지만 결혼은 인연의 문제다. 누구와 만나는지는 내가 얼마나 정성을 기울이고 노력하는 지와 무관한, 본인의 팔자소관에 가까운 영역이다. 예를 들어서 내가 일본에 이민을 가고 싶다고 해서 일본 사람과 결혼할 수 있다는 보장이 있는가? 없다. 노력은 할 수 있겠지만 인연이 따르지 않으면 어렵다.
유학이나 취직도 마찬가지다. 내가 가려는 전공이나 직장에 나에게 완전히 딱 맞는 포지션이 내가 딱 졸업하거나 이직하는 시점에 열려있지 않으면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실패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결국 “외국어 능력”과 “외국 경험”으로 “글로벌 시민”의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대개 현재 존재하는 사회적 불평등을 확대재생산하는 데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얼마나 부자 부모를 만났는지, 얼마나 운좋게 외국인 배우자를 만났는지 등등… 이것이 정말 우리가 바라는 사회의 모습인가? 그런 사람들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지 않다. 정의로운 사회라면 그런 곳에 박수를 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