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주의의 허상

레스 푸블리카 27

by 이그나티우스

먼저 말해두겠지만 나는 능력주의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능력주의는 사람을 뽑아서 쓰는 데 있어서 지금까지 인간이 발견해 낸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 일을 함에 있어서 가장 우수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선택한다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을 생각할 수 있을까?


하지만 문제는 그 “능력”을 어떻게 판단하느냐 하는 부분이다.


능력이란 추상적인 실체이다. 게임처럼 “체력 100 지력 95 무력 89 매력 90”과 같은 식으로 “상태창”을 열면 표시되는 것이 아니다. 실제 살아있는 인간의 능력이란 존재하지만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관찰되기는 어려운 대상이다.


따라서 이런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은 능력을 표시하는 간접적인 지표를 프록시(대체물)로 사용한다. 그리고 그 프록시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결과”이다. 즉, 결과물을 낸 사람이라면 그만한 능력이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즉, 현실 세계에서 능력주의란 많은 경우 결과주의가 될 수밖에 없다. 물론 한 고조 유방처럼 사람을 보는 탁월한 눈이 있어서 결과에 구애받지 않고 “허심(虛心)”의 경지에서 인간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없진 않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가 못하다. 결국 그 사람이 능력이 있는지를 판단하기 위해 “그 사람 예전에 어떤 실적을 냈지?”라는 것을 물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아주 틀린 사고방식은 아닌데, 아무튼 능력이 있다면 좋은 결과를 낼 가능성이 그만큼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능력과 결과는 같은 것이 아니다. 능력이 있는데도 다른 이유로 결과를 내지는 못했을 수도, 아니면 반대로 별로 능력은 없지만 운좋게 막타를 쳐서 숟가락을 올려 결과를 낸 경우도 있다.


운좋게 막타를 쳐서 레벨업을 한 경우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이 케이스야말로 현대 능력주의의 허상을 가장 잘 폭로해주기 때문이다.


가령 이런 경우를 가정해 보자. 인수합병(M&A)처럼 애초에 그 일을 하는데 필요한 능력을 쌓을 수 있는 기회 자체가 희귀한 분야들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이전에 그 사람이 낸 결과물 만으로 능력을 평가할 경우에는 그 사람이 실제로 능력이 있는지 보다는 그 사람이 그런 결과물을 낼 수 있는 기회를 부여 받았는 지의 여부가 그 사람의 능력으로 포장되는 경우가 발생할 확률이 높다.


가령 어떤 증권사에서 인수합병 분야의 전문가를 채용한다고 해보자. 그러면 대개의 경우는 채용공고에 “XX 인수합병 분야의 딜메이킹에 경험이 있는 자”와 같은 경력사항에 관한 요건을 명시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람이 이전에 인수합병 업무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정말 능력이 있다고 단정지을 수 있는가? 애초에 인수합병이라는 업무 자체를 하는 기회 자체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좀 최악의 경우에는 이런 경우를 상상해볼 수 있는데, 별로 능력이 없는 회계사가 아버지의 빽으로 거대 기업의 인수합병 업무에 참여해서 “경력”을 쌓고 그것을 바탕으로 더 큰 프로젝트에 참가할 수 있다.


물론 그 사람이 거기까지 갔다는 것 자체가 최소한의 능력은 증명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주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면 중간에 들통이 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실제로 인수합병에 관련된 업무를 시켜보면 더 잘 할 수 있는 유능한 사람이지만 애초에 처음부터 인수합병 분야의 업무에 참여할 기회 자체를 봉쇄당해 그것과는 전혀 무관한 웰스 매니지먼트나 백오피스 업무를 맡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식의 케이스에 대해 “결과로 말하는 능력주의”를 옹호하는 측에서는 “그럴 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모든 경우의 수를 다 고려할 수는 없고 현실적으로 구할 수 있는 최선을 찾는 법이다. 그 많은 사람이 능력이 있는지를 어떻게 일일이 다 고려한단 말인가?”라는 반론을 할 것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논리가 여기까지 온 이상 이미 그것은 능력주의라고는 부르기 어렵다. 결국 능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채용상의 편의가 중요하다는 것 아닌가? 결국 실제로 더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있더라도 채용상의 편의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논리를 대고 싶다면, 우리는 그것을 능력주의가 아니라 “채용상의 비용절감 원칙”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능력주의를 논하고 싶다면 어떻게든 유능한 사람을 모시기 위해서 삼고초려의 정성을 다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성립하는 것이지, 이것저것 다른 조건을 다 따지는 상황에서 무슨 능력주의가 성립하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삼고초려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만약 유비가 결과물로 편의주의적으로 사람을 채용하는 현대 기업 식의 “채용상의 효율성”을 고려했다면 결코 제갈량과 같은 인물을 모시기 위해 그런 정성을 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사다망한 유비라는 장군이 경력사항도 모호한 예비 문관 1명을 초빙하기 위해 먼 곳으로 3번이나 발걸음을 옮겼다는 것 자체가 훌륭한 인물을 뽑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투자와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옛 사람들이 알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더 최악인 부분은 “결과”로 능력을 판단하는 능력주의는 현존하는 불평등을 확대재생산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뭔가를 실제로 경험해야만 한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어떤 경험이란 결국 돈의 문제이다. 어떤 프로젝트에 참가하고, 어딘가를 방문하고, 누군가와 교류하는 등등 모든 것들이 사실은 다 돈이다. 요즘 국제업무를 맡는 포지션에서 사람을 채용할 때 보면 “영어 능통자”, “해외 대학 출신자”와 같은 요건이 쓰인 경우가 많은데, 이 2가지 모두 돈 많은 집 아이들에게 유리한 것들이다. 백번 양보해서 영어야 국내에서 어떻게든 배우지만, 외국에 유학을 하거나 해외에 체류한 경험을 쌓는 것이 돈이 좀 많이 드는 일인가?


결국 현실에서의 능력주의는 불평등하게 주어지는 경험의 결과물을 가지고 그 사람의 능력을 “추론”하는 것에 불과하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돈 많은 집 자식들이 부모의 도움으로 쌓은 값비싼 경험의 결과물에 가산점을 부여하는 것이 능력주의로 포장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극단적인 추첨제도나 사회주의식 결과의 평등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왜곡된 능력주의는 능력주의의 본의로부터 너무나도 멀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덮어놓고 능력주의를 지지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진정으로 능력주의를 주창하고 싶다면 제갈량과 1번 만나기 위해 3번이나 발걸음을 옮긴 유비처럼 그만한 비용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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