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있다

레스 푸블리카 29

by 이그나티우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 중 하나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중간과정을 많이 생략하고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과거 우리나라를 침략한 적이 있는 국가에 대한 분노를 가져야 한다는 말 아닌가? 여기서 말하는 “역사”란 특정 국가가 과거에 우리나라를 침략한 역사를 말하고, “잊지 말자”는 것은 과거에 대한 분노를 현재로 접목시켜 특정 국가에 대해 증오심을 가져야 한다는 얘기다. (물론 이것을 “교훈”으로 점잖게 표현하지만.)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러한 주장은 “역사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엄청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전문 역사학자는 아니고, 단지 학부에서 역사를 전공한 정도의 지식밖에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4년간 배운 역사학이라는 학문은


“사료를 이렇게도 보고 저렇게도 보는 것”


이었다. 주어진 사료와 역사적 사실을 두고 다각적, 비판적으로 분석하여 기존의 이론과 해석에 잘못된 것은 없는지를 검토하고 나름대로 비교와 분석을 통해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결론을 내는 것이 내가 4년동안 배운 진정한 의미에서의 역사학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과 취업 준비에서 배우는 역사는 너무나도 답이 뚜렷하고 엄격학 “과목”이었지만, 대학에서 배운 역사학에서는 교과서와 정 반대 주장을 하더라도 적절한 근거가 있다면 교수님들이 진지하게 반응하는 그런 창의적이고 비판적인 학문이었다.


이렇게 말로만 설명하면 다소 추상적일 수 있으니, 전국의 모든 사학과 1학년 학생들이 “역사학개론” 수업에서 배우는 가장 유명한 사례 하나를 통해서 역사학이 무엇인지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중세 고대-중세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사료로 “콘스탄티누스의 기진장”이라는 문서가 있다. 이 문서의 내용은 로마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교황 실베스테르 1세에게 제국 서방의 영토를 바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중세 가톨릭 교회의 교황은 대대로 이 문서를 근거로 자신이 세속의 군주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주장해왔다.


그런데 15세기 로렌초 발라라는 학자가 이 문서에 쓰인 라틴어는 고대 로마시대의 라틴어가 아니라 중세시대에 사용되던 라틴어였다는 사실을 밝혀내며, 이 문서가 중세시대의 누군가가 위조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만약 이 문서가 콘스탄티누스가 직접 작성했던 것이라면 그 문서가 작성된 시대인 고대 로마시대에 쓰인 라틴어 문장이 쓰여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역사학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는지를 알려주는 가장 단적인 사례이다. 주어진 사료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이 사료 자체가 위조된 것은 아닌지, 진짜 사료인 경우라도 그 적힌 내용에 신빙성은 없는지, 그리고 다른 문서 및 학문과의 비교연구를 통해 우리는 당시의 시대에 대해 어떤 사실을 알아낼 수 있는지에 대해 다각적이고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역사학이다. 역사학에는 정답이 없고, “이런 식으로 볼 수도, 저런 식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조금 충격적일 수도 있겠지만, 합당한 근거만 제시할 수 있다면 교과서와 정 반대의 내용을 리포트에서 주장한다고 해도 사학과 교수님들은 전공과목에서 F를 주지 않을 것이다.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폭력적인 문장은 이러한 역사학의 본령에서 벗어나도 너무나도 벗어난 말이다. 정말로 진지하게 역사학을 배우는 사람이라면 과거란 무엇인가?, 민족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과거의 사실과 미래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결되는가? 라는 비판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 먼저이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아니 그 말은 과거를 반복하지 말자는 교훈을 얻으라는 말이잖아요!”라고 반박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역사학에서 교훈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 교훈이라는 것도 앞서 설명한 “이렇게도, 저렇게도 보는” 다각적이고 비판적이며 창의적인 각도에서 벗어나서는 더 이상 역사학이라고 부르기 어렵다. 역사학은 애초에 하나의 답을 도출하는 학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짜 제대로 된 역사학이라면 과거 어떤 국가가 우리나라를 침략한 역사에 대해서, 당대의 여러 사료들을 비교, 검토하여 그 원인에 대해서 분석하고 동서양의 비슷한 사례와 비교분석을 통해 그 침략의 사건이 어떤 보편성과 특수성을 갖는지, 그리고 고고학이나 국제정치학과 같은 인접 학문의 지식을 활용하여 다각적으로 사료를 분석하는 것을 통해 그러한 전쟁의 역사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신중하고 비판적으로 교훈을 도출해야 할 것이다. 또 우리가 참고하고 있는 사료들이 어떠한 편견에 의해 쓰이지는 않았는지, 그 내용 자체를 신뢰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검토도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글 뒤에 으레 따르는 “X국가가 과거 우리나라를 침략했으니 우리는 X국가를 경계해야 한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수준의 조잡한 인식은 그것이 정치적 발언이 될 수는 있어도 역사학의 범주라고 보기는 어렵다.


만약에 역사가 그런 것이라면, 차라리 역사를 배우는 대신에 자연과학과 공학을 열심히 공부하여 국방력을 발전시켜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인 “애국애족”의 길일 것이다. 역사학의 진정한 가치는 우리에게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를 기르도록 도와주는 것이지, 거친 정치적 분노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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