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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요한 Jul 30. 2021

데드맨 워킹

데드맨 워킹          


 사형수가 사형당하러 가는 길을 걸을 때, 이를 보고 데드맨 워킹(Dead mean walking)이라 한다. 내가 사는 곳에는 대형병원이 있기에, 매일 발인을 위한 운구 차량이 지나간다. 그래서 학교 셔틀버스를 타기 위해 서 있으면 발인을 위한 차량이 내 앞을 지나간다. 아침 일찍부터 누군가의 죽음을 본다는 게 께림칙 했지만 그들의 죽음은 나에게 배움을 준다.


 어린 시절에는 죽음이 두려웠다. 아직 하지 못한 게 많은데, 이루지 못한 게 많은데 죽는다면 미칠 것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죽음이 우리 주위에 도사리고 있었다. 집 밖에 나가기가 무서웠다. 어머니께 효도해야 하는데 이대로 죽으면 황망할 것 같아 더욱 그랬다.


 사춘기 때는 달랐다. 사춘기란 마치 짐승의 부모가 자식을 때어 놓는 행위와 같다 생각한다. 독립의 시기인 셈이다. 나는 사춘기가 되자 부모로부터의 독립이 아닌, 현실로부터의 해방을 생각했다. 모든 게 억울했고, 분노 속에 살았기에 이 세상은 부조리했다. 그래서 모든 걸 속세의 연을 끊고 싶었다. 나를 키워준 것에 대한 감사함과 죄송함은 보험금으로 처리하면 된다는 나름의 계획도 있었다.


 가정 속에서 일어나는 불화와 사춘기의 도래는 나를 스스로 나락까지 끌고 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번 집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을 때마다 집 밖에 뛰어나가 무작정 뛰었다. 몇십 분이고 뛰었다. 눈물을 흘리며 뛰었으니 주위 사람들이 보기에는 걱정되면서도 무서웠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다 내 감정이 식을 때쯤이면 발걸음을 돌려 터벅터벅 집에 걸어 왔다. 모르는 길이었기에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돌아왔다. 나중에는 동네 근처 맛집을 다 알게 된 비법이라 할 수 있겠다.


 어느 날은 육교에 도달했다. 육교에 서서 몇 시간이고 서 있었다. ‘뛰어내리면 모든 게 끝나겠지. 내가 죽으면 나로 인해 다시 가정의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을까.’라 생각했다. 근데 못 뛰어내리겠더라. 첫 번째로는 무서웠다. 두 번째로는 아플 것 같아서 하기 싫었다. 세 번째로는 나로 인해 피해를 볼 운전자에 대한 죄책감과 죄송함이 나를 덮쳤다. 이날의 기억은 정말 지금도 잊히지 않는 생생한 순간이다. 


 나에게 죽음이란 ‘온전히 주위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행위’라 각인됐다.

 그래서 매일 아침 보았던 데드맨 워킹은 나에게 삶에 대해서 고뇌하게 한다. 내가 죽으면 나의 어머니를 포함해, 친구, 선·후배가 슬퍼할 것이다. 최소한 호상이라며 말하지는 않기를 바란다. 죽음은 슬픔이기 때문이다. 같이 슬퍼하며 슬픔을 나누긴 하지만 여전히 슬픈 건 같다. 나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되돌아보았으면 하는 바이다. 죽음의 반대편에 삶이 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죽거나 살거나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저 죽음을 향해 가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인정하지 않아서 그렇지, 유에서 무로 향하는 장대한 여정을 하고 있다.


 디오니소스를 기리는 축제처럼 나의 사망이 죽음, 고통, 슬픔을 자신의 것처럼 여겨지는 자리였으면 좋겠다. 자신을 되돌아보고, 타인을 공감할 수 있는 자리이길 희망한다. 


 우리의 삶은 부정적인 면으로 가득 차 있지만, 이를 마주함으로써 긍정적인 면을 보았으면 한다. 행복, 안전, 계획만이 존재하는 세상 속에서는 이들의 감사함을 보기가 쉽지 않다. 내가 매일 아침 푹신한 이불에서 일어나기 싫어서 뒤척이는 달콤함. 빨래가 잘 된 옷을 입고 하루를 시작하는 상쾌함. 주말에 어머니께서 해주신 음식 냄새에 잠에서 깨 먹는 아침밥. 친한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 밤늦게까지 대화를 하며 느끼는 형제애. 샤워 후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쐬는 선풍기 바람. 이 모든 아름다움은 일순간의 고통과 슬픔에 휩쓸려 잊기 마련이다. 때로는 원하는 성적이 나오지 않아서. 직장 상사가 별것도 아닌데 심하게 나무랄 때. 배는 고픈데 싫어하는 반찬이 나올 때. 날씨가 습하고 더워서. 우리는 타인에게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짜증을 낸다.


 우리의 숨결이 코에서 뿜어져 나오기를 멈출 때, 이 모든 행복을 느낄 수 없다는 걸 깨달았으면 한다. 매 순간 불행, 고통, 슬픔에 대해 담대해지고 관대하게 대했으면 한다. 행복을 좇기만 해도 부족한 우리 인생이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을 표현하며 의미 있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부정적 감정에 대해 관대해질 필요가 있다.


 죽음을 앞둔 암환자의 후회를 담은 영상이나 책을 보곤 한다. 그분들과 우리는 다른 건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과 같이 우리 모두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고 본다. 다만 의사가 의학적 판단을 했느냐 안 했느냐의 관점이라 생각한다. 내가 모든 건 정해져 있다는 운명론을 믿지는 않지만, 죽음은 필히 우리에게 도달한다는 점에서 말하고 싶었다.


 한 번은 죽음을 앞둔 누군가가 끝까지 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남는 미련이 있다고 했다. 끝이 어디일까. 그 끝은 내가 정하는 게 아닐까. 인생은 천착(穿鑿)의 연속이어서 바위를 깨뜨리지는 못하고, 구멍이나 금가게 하는 데에 그친다. 다만 나 다음에 누군가 이어서 또다시 천착할 뿐이다. 정도(正道)도 없고, 정도(程度)도 없다.


 인생은 끝이 없는 심연 탐험의 연속이다. 그 과정에는 죽음을 포함한 희로애락이 있다. 그러니 죽음을 보며 호기롭게 말하자. 데드맨 워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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