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 > 1990
1980은 1990보다 작다. 하지만 우리나라 나이에서는 다르다. 1980이 더 큰 숫자로 여겨진다. 나는 존댓말 문화를 별로 좋지 않게 생각한다. 나이에 상관없이 서로 반말을 하든가, 서로 존댓말을 하든가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고 본다.
우스갯소리로 우리나라를 ‘선비의 나라’라 한다. 대나무처럼 굽히지 않고 절개를 지키며 신의가 있는 선비의 모습이 떠오른다. 하지만 타협을 모르는 고집불통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의 화폐만 봐도 그렇다. 온통 유교 사상이다. 이이, 이황, 신사임당이다. 우리는 중농억상이 기반인 유교 국가에서 자본을 거래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취업을 앞두고 나이에 예민한 이들을 본다. 실제 기업 인사 담당자들도 29~30세 정도가 채용하는 마지막 나이 때라고 한다. 일 잘하고, 능력 있으면 됐지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 싶다. 기업 내에서 어린 상급자가 나이 많은 하급자에게 지시를 내리기 힘들어서 그렇단다. 이해는 간다. 요즘 영어로 된 호칭을 정해 부르기도 하고, 직급도 팀장-팀원 체계로 바꾸고 있지만 갈 길은 멀다.
경로당에서 이루어지는 일도 신기하다. 내 눈에는 다 쇠잔해지신 어르신이다. 하지만 어르신 사이에서도 막내가 궃은 일을 하는 건 변함없다. 서로 몸이 불편하고 힘들지만 위계서열에 따라 움직인다.
사실 존댓말을 하다 보면 자기주장을 피력하기 쉽지 않을 때가 많다. 특히나 나이에 따라 한 번 나뉘고, 직급에 따라 또 한 번 나뉘게 되기 때문이다. 업무에서 정당한 주장을 해도, 나이가 걸리기 때문에 먹히지 않는다. 그러다 싸우기라도 하면은 하는 말이 ‘너 몇 살이야’이다. 자신이 상대방보다 나이 많으면, 어른을 공경하라고 말한다. 자신이 상대방 보다 나이가 적으면, 나이 값하라고 말한다. 애초에 질문이 아니라 명령이다.
옛날에는 나이를 먹으면 지식과 지혜도 있다고 여겨 현명한 판단을 구했다. 조언을 얻기도 했다. 지금은 다르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시대로 전환됨에 따라 지식의 범위는 다양해졌다. 지식의 전달과 보급도 쉬워졌다. 나이와 지혜는 정비례하지 않게 됐다. 그래서 나이만 믿고 자기 생각과 경험을 진리인 마냥 전파하는 이를 우리는 꼰대라 부른다.
국회 연수원에서 개최하는 프로그램에 참가했을 때다. 각 대학의 정치외교학과 교수들이 참가해 한마디씩 하는데 모두 꼰대라는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게 교수들의 일치된 견해였다. 물론 한참 어린 학생과 밀접하게 생활하기에 그럴 수 있다지만, 나 또한 꼰대로 여겨질 수 있다.
꼰대라 부를 수 있는 특권은 상대방 보다 어릴 때 가능하다. 나이에 의한 판단을 거부함과 동시에 나이에 의한 판단을 본인이 하는 역설적인 행동이다.
나는 사실 꼰대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고 본다. 가끔은 정말 진성 꼰대가 자신의 얘기만을 하느라 바쁘지만, 나는 그런 사람을 보면 ‘나는 저렇게 말하지 말아야지’라고 타산지석(他山之石) 삼을 뿐이다.
꼰대는 우리와 같이 유년, 청소년, 청년기를 살아온 이들이다. 시대와 상황은 바뀌었지만 고민하고 생각했던 점은 비슷하다. 마치 철학과 고전 명작이 시대를 뛰어넘어 읽히고 공감을 얻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그들에게 들을 수 있는 경험은 정말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나보다 먼저 나선 이의 경험을 들으며 내 방향을 정하고 예측할 수 있다. 우리가 직업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는 방법이 현직자의 얘기를 듣는 방법과 같다. 그들이 행하는 매너, 예의를 보려고 한다면 사회생활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꼰대 판정을 너무 예민하게 하지 않았으면 한다. 자신과 생각이 달라서, 듣기 싫은데 얘기한다고 해서,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꼰대 낙인을 찍지 않았으면 한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면 대화를 하면 된다. 대화가 통하지 않고 일방적 주장만 할 뿐이라면, 속으로 혀를 차고 자리를 일찍 뜨면 된다. 듣기 싫은데 얘기한다면 본인의 감정과 기분을 얘기해 추후를 기약하면 된다. 그들이 진심 어린 조언을 해줄 수도 있다. 내가 듣기 싫다고 해서 꼭 그 상황이 나에게 옳은 것만은 아니다. 나이가 많다고 기득권이고 부패하지는 않았다.
과거의 지식과 지혜, 관습, 전통이 모두 꼰대로 낙인 찍혀 없애야 할 대상으로 여겨질까 봐 걱정된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말처럼, 옛것을 기반으로 새로운 것을 익혔으면 한다.
우리는 알지 못하거나 알더라도 비약적으로 아는 사회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간다. 그 사회는 선조의 지혜와 전통으로 이루어져 있다. 실용주의란 감정 속에서 이성을 보고, 거품은 걷어 내고 배울 것은 취함을 말한다. 우리에게는 실용주의 관점으로 신중한 태도와 꼰대에게 너그러움을 보여주는 마음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