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증법적 이론>
변증이란 무엇인가. 목표를 세우고 이를 위해 변화함에 따라 일어나는 상호 연계작용이라고 칭할 수 있겠다.
즉, ‘RESULT 1에 대해 GOAL 2 설정 -> ACTION 1 -> REACTION 1-> RESULT 2 -> GOA L2 -> ACTION 2 -> REACTION 2 ··· 라는 정리를 할 수 있다.
변증법에 있어서 ‘正+反=合’이라는 개념이 통설이지만, 절대적 진리와 인간 이성의 오류가 있는 한, 正을 사용하는 것은 부적절해 보인다. 오히려 定을 사용하는 것이 옳다. 변증법은 사회 속에서 일어나는 상호연계, 결단, 합의, 거래 과정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내가 사회과학 방법론 시험성적을 C+를 받았다고 가정하자. 나는 이에 대해 두 가지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첫 번째는 C+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왜 C+를 받았는지. 나의 문제가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는다. C+를 따로 떼어내 무게를 재보고, 불에 태워 어떤 원소가 있는지 확인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는, 상용기호라며 판도라 상자를 나에게 잊으려고 한다.
두 번째는 C+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보는 것이다. 왜 C+를 받았는지, 나의 문제가 무엇인지. 나의 공부법이 잘못 되지 않았는지. 하루에 나는 어떻게 시간을 효율적으로 보내고 있는지. 매 순간 임기응변의 연속인지 아는지 진지하게 고찰한다.
첫 번째는 C+라는 결과를 받아(result1) -> C+를 잊겠다는 목표를 세운다.(action1) -> 이를 위해 술을 먹어 쿨한 척 대수로이 여긴다.(reaction1) -> 다음 시험에도 C+ 혹은 그보다 낮은 D, F를 받는다.(result2) -> D, F를 잊겠다는 목표를 세운다(action2) -> 이를 위해 술을 먹는다.(reaction2) -> 무한반복이 이루어진다.
두 번째는 C+라는 결과를 받아(result1) -> 결과를 분석해 더 나은 결과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운다.(ACTION1) -> 이를 위해 공부방법, 시간의 효율 등에 대해 분석한다.(reaction1) -> 다음 시험에 C+보다 더 나은 결과인 B를 받는다.(result2) -> B보다 더 나은 결과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운다.(action2) -> 이를 위해 효율에 대해 분석한다.(reaction2)
두 가지 예를 제시한 것은 개개인에게 하나의 결과와 상황이 주어지면 어떻게 정진하냐에 따라서 다른 결과들이 생김을 보여주려 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작동되는 변증법은 역사성을 기반으로 한다. <<호모 사피엔스>>의 글을 빌리겠다.
“사피엔스가 발명한 가상의 실재의 엄청난 다양성 그리고 그것이 유발하는 행동 패턴의 다양성은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것의 주된 요소가 되었다. 일단 등장한 문화는 끊임없이 변화, 발전했으며, 그 멈출 수 없는 변화를 우리는 ‘역사’라고 부른다.”
우리의 삶은 과거라는 역사를 기반으로 쌓아 올리며 나아감을 의미한다. 과거라는 결과를 가지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이라는 근본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에 대답할 수 있게 하는 게 변증법이다. 현재를 연구해 미래지향적 연구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변증법을 구성하면서 조심해야 하는 점이 있다. ‘과거에도 그랬으니 그럴 수도 있다.’라는 추측과 가능성이 아니라, ‘과거에도 그랬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라는 단정과 결론을 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법칙주의는 왜 혹독한 비판을 받아야 하는가. 마르크스가 분석한 초기 자본사회에 대해 옳고 정당한 비판과 분석은 차치하고, 역사적 유물론적 사관으로 지배자-피지배자 즉, 부르주아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의 야기는 당연하다며 역사적 결과를 선 제시하기 때문이다. 추측과 단정은 분명히 다르다. 내가 과거 데이터를 보며 ‘당신은 내일 있을 시험에서 낙제할 가능성이 크다.’라 말하는 것과, ‘당신은 내일 있을 시험에서 분명하게 낙제한다.’라 말함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역사법칙주의는 인간의 역사는 매 순간 존재하는 자유의지에 의해, 지속적해서 덧칠되고 수선되는 사회에 살게 됨을 부정하게 된다.
변증법은 상호연계의 작용이다. 상호연계와 자유의지의 결합은 절대적 정답은 없다는 자세로 이어진다. 매 순간 상황과 답이 변하기 때문이다. 물론, 시대를 관통하는 주장들이 있지만 개괄적이기 때문에, 매 순간 상황에 맞게 답이 변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게 한다. 절대적 정답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로써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함을 뜻한다. 당신의 말이 진리일 수도, 진리가 아닐 수도, 부분 진리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동일하다. 그렇기에 나는 당신의 말을 경청하고 혹독한 비판할 권리가 있으며, 당신 또한 동일한 권리가 주어짐을 주장할 수 있다.
결국, 변증법은 정답은 없다는 자세로 우리의 사회를 견인하는 이론이다. 변증법을 통해 생기는 새로운 결과와 행동은 창조이며, 혼돈이다. 하지만 가류주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성의 보완이자 완벽을 찾아 나서는 여정으로 여길 수 있지 않을까.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주장한 악의 평범함은 왜 일어나는가. 무비판, 무사유(無思惟) 하기 때문이다.
변증법은 ‘왜 이런 ACTION을 했어 그리고 너는 왜 이런 REACTION을 했어.’라는 논쟁의 기회를 제공하고, 비판을 할 수 있게 하는 이론이다. 무비판, 무사유로부터의 탈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