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사의 자장을 벗어나 개인에게 돌아간 진짜 아픔의 자리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천재의 삶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다. 나는 천재가 아니니까 가늠할 수 없었다.
손가락을 펴고 접으며 수 개념을 잡지 않아도 유치원 때 미적분이 풀린 유근이, 머릿속에서 들리는 대로 덜 여문 손가락을 건반 위로 움직여 작곡한 모차르트, 그냥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고 했을 뿐인데 왜 홍시 맛이 나냐는 질문에 당황한 장금이, 타고난 자기가 이끄는 대로 행해도 되는 사람들은 사는 게 어떨까? 하고 싶은 대로 했다가 부딪히고 깨져 ‘나는 대체 왜 이런 인간일까...?’를 수 없이 묻고 따지고 자괴할 필요가 없다는 건 어떤 걸까?
데이비드(제시 아이젠버그)와 벤지(키에란 컬킨)는 할머니는 같고 아버지는 다른 동갑 사촌 사이다. 형제처럼 가까웠지만, 진짜 형제들도 그렇듯, 작았던 삶의 각도의 틈이 세월이 지날수록 넓어져 지금은 사이가 꽤 멀어진 그들은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며칠 어린 시절로 돌아갈 기회를 만든다. 유산으로 물려받은 경비로 홀로코스트를 피해 미국으로 왔던 할머니의 옛 흔적을 따르는 역사 투어에 참가한 것이다.
데이비드와 벤지는 다르다. 많이 다르다. 엄청 다르다. 직살라게 다르다. 사회성이 부족하고 소심하여 단체 생활을 어색해하는 소위 너드 과인 데이비드와 달리 벤지는 입장하는 순간 폭죽을 던져 놓은 듯 집단에 불꽃이 튀게 하는 부류이다. 뇌의 필터를 거치지 않고 떠오르는 순간 입을 떼고 행동하는 벤지로 인해 공기의 채도와 명도는 바뀌고 사람들은 좀 더 생생해진다. 무례함을 경계를 넘을락 말락 하는 위험성이 벤지의 매력의 마지막 엣지를 더욱 살린다.
데이비드는 여행 내내 벤지를 응시한다. 초조하고 불안해하며 경탄하고 부러워하는 등 여러 감정이 섞인 듯 보인다. 자기에겐 너무나 괴상한 수프를 맛있다고 신나게 먹는 사촌을 보며 당황하는 그는 자기도 그를 따라 이런 맛을 즐겨보려 끊임없이 때를 떠올렸을 것이고, 지금은 그 노력을 내려놓은 자신도 발견했을 것이고, 그럼에도 그와 함께 있으면 따라할 용기를 내어 뿌듯하기도 했을 것이다.
범재들은 일상에서 매번 미묘하게 합이 맞지 않아 삐걱대는 경첩들을 마주한다. 들여다보고 기름칠을 하며 조금씩 아귀를 맞춰가는 것이 그들의 삶이다. 데이비드는 어릴 때부터 조금씩 이 작업을 하면서 그때의 그이기도 하지만, 그때의 그와 조금 다른 지금의 그가 되었을 것이다. 단체에 속했을 때는 여전히 어색하지만 부인과 딸은 익숙하게 안아줄 수 있고, 초조함을 넘어서서 자기 역할을 하며 밥벌이를 하고 있다. 그때의 그가 아닌 건 아니지만 그때의 그만은 아니다.
범재들은 자신의 입장만 확신할 수 없으므로 남(특히 그가 소중한 사람이라면 더더욱)들의 시선을 참고하여 세상을 본다. 사랑하는 사촌이 발을 칭찬하자 데이비드가 자기 발을 조금 더 길게 보고 새롭게 볼 수 있었던 것처럼.
범재들은 삐걱거림이 너무 커지면 종종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대면하게 된다. 데이비드는 경외하면서 미워하는 사촌이 자살 시도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갑자기 고백한다.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었을지언정 그는 깊은 자기와 만났고 자기의 한 조각을 이해했고 그를 바탕으로 남을 아주 조금 더 보듬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반면 경첩이 삐걱대지 않아 손 볼 필요가 없는 벤지는 여전히 어린 시절의 그다. 날 것의 감정을 그대로 내보이는 아이의 방식 말고 자신을 표현할 길이 없다. 자기의 자살 시도에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절절히 고백하는 사촌을 앞에 두고도 막연한 슬픔에 눈물만 흘릴 뿐 이를 언어로 전환할 수 없다. 그는 솔직한 마음과 대면한 적이 없어 그것을 모르니 그것을 내어놓을 수 없다.
리얼 페인, 진짜 아픔은 무엇인가.
한때 진짜 아픔은 인류사의 자장 안에서만 가능했다.
나치가 유대인들을 잡아들여 600만명을 가스실에서 죽이고 태우는데, 개인이 너드인지 분위기 메이커인지가 뭐가 중요하겠는가! (전두환이 한 도시를 말살하려 총질을 해대는데 아이가 ADHD라서 글자를 못 읽는 게 뭐가 대수인가!)
벤지는 거대한 인간의 비극에 가장 인간적으로 흘러들어 공감하고 아파하지만, 검지 손가락이 자기의 심장을 가리킬 때는 무능하다. 홀로코스트 희생자의 무덤 위에 돌을 얹어 애도하는 그는 자신의 아픔 위에는 결코 돌을 얹을 수 없다.
반면 데이비드는 할머니의 옛 집터 앞에 올려두지 못한 돌을 자신의 집 앞에 놓을 수 있다. 그는 자기 고유의 아픔에 표시를 하고 이를 디디어낼 수 있다.
이제 진짜 아픔은 개인의 것이 되었다.
그들을 만들어낸 공통분모는 홀로코스트 생존자 할머니다. 그녀는 데이비드의 섬세함과 벤지의 매력을 동시에 지닌 인물이었을 것이다. 인류사의 비극을 온몸으로 견뎌낸 그녀는 지옥에서 살아남아 생을 기어이 아름답게 만들어냈다. 엄마 아빠를 제치고 손주들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된 인물이 아닌가!
할머니는 그나마 벤지에게 경첩의 삐걱거림을 강제라도 들려주었던 인물이다. 약에 취해 해롱대는 그의 뺨을 갈겼고, 그가 정신을 차릴 수 있게 했다. 이제 할머니는 세상에 없고, 벤지는 없는 사람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지 혼란해하다 자살까지 시도했다.
헤어지기 전 데이비드는 벤지의 뺨을 때린다. 그가 사촌을 얼마나 염려하는지 절절하게 알리는 몸짓이었다. 벤지도 이 사랑을 어렴풋이 알아듣지만 데이비드는 할머니가 아니라 그를 깨울 수 없을 것이다. 둘은 유쾌하게 웃고 깊게 포옹한다.
데이비드가 긴장에 굳었던 몸을 녹이러 가족에게 돌아갔을 때 벤지는 공항에 남아 낯선 이들에게 둘러싸였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짧게 그를 사랑하게 만들 수 이들에게. 그의 크고 둥근 눈은 불안해 보인다. 어딘가를 보지만 딱히 바라보는 곳은 없다.
나는 그가 언젠가 자신의 진짜 아픔을 직시하길, 그리고 자신의 뺨을 스스로 칠 수 있기를, 범재로서 천재를 염려하며, 기원했다.
영화 포스터만 봤을 때 나는 해리포터가 나오는 줄 알았다.
근데 나홀로 집에 없던 캐빈의 동생이었다니.
짜식, 언제 이렇게 컸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