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16일
봄의 공기가 막 새 학기 교문 사이로 스며들던 날이었다. 파릇한 새싹이 운동장 돌담 밑 끝자락에서부터 조심스레 피어나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복도를 가득 채우던 그 무렵, 회사에 있는 나에게 둘째 딸이 전화를 걸어왔다.
“아빠, 나 회장이 됐어.”
잠시 멍해졌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들뜬 듯하면서도 어딘가 차분했다. 믿기 어려웠다. 전날 밤, 나는 딸에게 전화로 조용히 조언을 했었다.
“혹시 친구들이 추천하면, 마지못해 하는 척 해. 너무 앞서면 오히려 부담스러울 수도 있으니까.”
그때 딸은 “응” 하고 짧게 대답했을 뿐이었다. 말이 적고, 낯을 가리며, 언제나 뒤에서 묵묵히 친구들을 챙기던 아이였다. 그래서 더욱 놀라웠다.
아마도, 딸은 회장을 ‘하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친구들이 그 아이를 믿고 추천했겠지. 늘 조용하지만 성실하게 일하던 모습이, 누군가의 눈에 따뜻하게 남았을 것이다. 그렇게 아이는 스스로 빛을 내기보다, 다른 이들의 신뢰로 그 자리에 서게 된 게 아닐까.
전화를 끊고 나서 한동안 휴대폰을 내려놓지 못했다. 딸이 회장이 됐다는 단순한 사실이 이상하게 마음을 울렸다. 그동안 나는 아이들에게 너무 많은 ‘이유’를 만들어주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잘해야 한다, 실망시키지 말아야 한다, 힘들어도 견뎌야 한다는 말들.
그런데 오늘은 반대로 내가 그 아이에게 배웠다. 꾸미지 않아도, 조용히 제자리를 지켜도, 누군가에게는 ‘믿음직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요즘 매달 매일 정리해야하는 일들로 부쩍 바빠진 일상 속에서, 나는 자주 지친다. 그러나 그럴수록 내색할 수 없다. 힘들다 말하는 순간, 아이들이 내 얼굴을 떠올릴 것 같아서.
‘아빠도 힘들어하네’라는 생각이 들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래서 나는 오늘도 아무렇지 않은 듯 웃는다. 하지만 속으로는, 딸아이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는다.
‘아빠, 나 회장이 됐어.’
그 한마디가 내 하루를 단단히 붙잡아 준다.
봄은 그렇게 우리 집에도 찾아왔다. 아이는 반의 중심에서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고, 나는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조금 더 묵묵히 하루를 살아간다.
잘 자라주는 아이들이 있기에, 나는 오늘도 내일도 버틸 수 있다.
그리고 언젠가, 아이가 또 다른 세상 앞에 서게 될 때, 그때도 이 순간처럼 말하겠지.
“그래, 네가 그렇게 자란 게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