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유통기한과 남겨진 것들

2026.3.23(월)

by 달빛라디오

어제 창밖의 빛이 비스듬히 누워가는 오후였다. 어제가 생일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 건, 그리 가깝지 않은 업무상 지인들의 형식적인 메시지 몇 통이었다.

휴대폰은 종일 조용했다. 한때는 생일이면 불이 나게 울려대던 알람음들이, 이제는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침묵을 지킨다.


'나와 이해관계가 적어진 탓이겠지.'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화면을 껐다. 검은 액정 속에 비친 내 얼굴은 생각보다 덤덤해 보였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채우지 못한 허전함이 얇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문득 최근에 보았던 유튜브 동영상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50대를 넘어서며 관계의 반경이 줄어드는 시기, 혼자서 즐길 수 있는 일을 찾으라는 그 냉정하고도 따뜻한 조언.

"이러다 정말 잊혀지는 사람이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혼잣말로 새어 나왔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잊혀진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더 이상 누군가의 기대나 필요에 부응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몇 일전부터 새로운 취미까지는 아니지만 시작하는 행동이 있어 전동드리퍼를 꺼내고 원두를 갈기 시작했다. 드르륵, 손끝으로 전해지는 단단한 원두의 저항감이 오히려 생경한 위로가 되었다. 뜨거운 물을 조심스레 부으니 짙은 커피 향이 좁은 사무실을 가득 채운다. 누군가의 축하를 기다리느라 목을 빼고 서성이던 시간보다, 오로지 이 작은 물줄기의 조절에 집중하는 지금 이 순간이 훨씬 밀도 있게 느껴졌다.


인간관계에도 계절이 있다면, 지금 나의 계절은 낙엽이 다 지고 난 뒤의 초겨울 어디쯤일 것이다. 화려한 꽃은 없지만, 대신 시야를 가리던 잎사귀들이 사라져 나무 본연의 정직한 실루엣을 볼 수 있는 시기. 관계의 썰물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갯벌의 민낯처럼 투명한 '나 자신'이 남았다. 서서히 홀가분해지는 이 무게감이 싫지 않다. 어쩌면 나는 오랫동안 이 고요한 독대를 기다려왔는지도 모른다.


홈플러스에서 시그니처 메이커를 단 한 모금의 커피가 목을 타고 넘어간다. 적당한 쓴맛 뒤에 찾아오는 미묘한 단맛. 이것이 내가 받아들여야 할 중년의 생일 선물이다. 타인의 다정한 안부 대신, 스스로 내린 커피의 향기에 온전히 취할 수 있는 이 시간이야말로 내가 나에게 주는 가장 정중한 예의다.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나로 기억되는 연습을 시작하는 중이다.


세상 모든 불이 꺼져도 나의 집 내 방의 작은 스탠드 하나는 나를 위해 켜져 있음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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