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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한빈 Nov 12. 2017

삶의 깨달음으로 승화된 생태-여성주의 시학

-구숙희의 시세계-

삶의 깨달음으로 승화된 생태-여성주의 시학

-구숙희의 시세계- 


김한빈

(시인, 평론가, 경성대 외래교수)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예술은 세계와 대지에 숨겨진 존재(진리나 본질)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자신의 독특한 예술철학을 밝힌 바 있다. 그 예술 가운데서도 시작(詩作)이 가장 예술적이라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존재는 드러나면서도 스스로 감추기도 하는 이중성을 필연적으로 내포하는데, 그 존재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인간의 표현 도구가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시는 우리의 삶과 세계와 대지를 노래하면서 그 속에 감춰진 진리나 본질적 의미를 찾아내어 보여주는 것이다.


  구숙희 시인의 시편들은 자연친화적 태도로 자연과 계절을 즐거이 노래하고, 뭇생명들(수많은 식물과 동물들)에 대해 생태주의적 관점으로 접근하고, 삶에 대한 자기성찰을 통해 원숙한 인격체로서 명경지수(明鏡止水)의 경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사랑과 배려’라는 모성적 이미지를 바탕으로 사물과 인간 군상들과 이웃에 대한 따뜻한 휴머니즘의 시각도 제시한다. 구숙희 시인은 하이데거의 말대로 존재를 드러내면서도, 언제나 생태-여성주의(에코-페미니즘)적 관점을 취하고 있다. 또한 다양한 시적 기교를 활용한 의욕적인 표현형식의 새로운 시도도 구사한다. 


 제1부 시편은 자연과 계절을 노래한 시 작품들이다. 먼저 자연은 하늘과 달과 별 그리고 산과 바다, 비와 안개를 중심 소재로 다루고, 계절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를 동시에 노래한 작품과 각 계절을 하나의 배경으로 설정한 작품들로 나뉜다. 특히 봄과 여름, 겨울이 두 편씩이라면 가을은 네 편 이상으로 비중이 높다. 자연과 계절이 중심 소재로 등장한 것은 자연이 주로 생태주의와 관련을 맺고, 계절이 여성주의와 연관된 특징을 갖는 것과 관계가 있다. 다시 말하면, 구숙희 시인의 생태-여성주의의 시학이 가장 잘 드러난 시 작품들이 제 1 부 시편에 등장한다. 시인은 언제나 천상 세계의 하늘, 밤하늘, 달, 별을 노래한다. 화자의 시선은 위로 향한다. 엄혹한 현실을 견뎌낸 초월과 달관의 관점으로 상승적 지향의식을 보여준다. 먼 산을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도 이와 마찬가지다. 


우물 속 하늘 편지지에/ 맑은 마음 담아/ 띄운 사연/ 

영롱한 이슬처럼/ 고운 물감으로/ 그리운 사연 담아 그려보자//

-<중략>-

비췻빛 물감 풀어/ 하늘 편지지에/ 고운 사연 붓칠 하면/ 

사연 전할 고추잠자리/ 가을하늘을 날아오른다// 

                                                                -「가을 편지」부분


 우물에 비친 가을 하늘을 편지지 삼아, 고결한 마음을 담아 그립고 고운 사연을 전하는 내용을 한 폭의 수채화요 한국화 같은 이미지로 형상화한 시다. 우물 속 하늘 편지지는 푸른 색이다. 이 색감은 옥빛과, 비췻색으로 더 변용된다. 우물은 원형적 심상으로서 자아성찰의 매개물이면서도 광대무변한 우주를 비추는 통로(채널)이다. 그 우물 안을 들여다보는 화자의 맑은 마음은 영롱한 이슬처럼 투명하고 백색의 이미지를 품고 있다. 이러한 푸른(벽碧) 하늘과 이슬 물감, 흰 구름(백白)이 서로 색채적 대비를 이루며 청량한 이미지를 자아내는데 후반부에서 ‘빨간 고추잠자리’(홍紅)가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날아오르며 화룡점정의 완성을 보인다. 그리운 누군가에게 쓴 편지를 전할 전령사인 빨간 고추잠자리의 비상(飛上)은 이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시인의 삶의 자세로서의 상승적 지향의식을 암시한다.  


칠흑 같은 겨울밤/ 세상 모든/ 물상들을 지워가는/ 평등의 눈이 내린다/

검은 마음 덮으려/ 축복을 내리신다// 

다시 봄이 오면/ 마음 가다듬고 물감 뿌려/ 캔버스에 틔울 새싹/ 벌써/ 기다려진다// 

                                                             -「눈 내리는 밤」전문


 누구나 겨울밤 흰 눈이 내리는 자연 현상을 경이감을 품고 바라본다. 시인은 어떤 영감을 얻는다. 구숙희 시인에게는 이 세상은 하나의 캔버스이다. 때로는 검은 바탕을 둔 화폭이기도 하다. 칠흑 같은 겨울밤에 내리는 눈은 불평등한 세계를 평등과 통합의 세계로 바꾸는 조물주의 기적이기도 하고, 부정적인 심리 상태에 놓인 화자의 검은 마음을 화해와 정화의 경지로 승화시키는 축복이기도 하다. 겨울은 검은 무채색의 심상이지만, 다시 찾아오는 봄은 삼라만상이 각자의 색채를 자랑하는 유채색의 축제이다.


불빛에 어룽어룽/ 유리창을 물들이는 추억들//

밤 향기가 빛으로 반사/ 생각에 잠긴다//

슬픈 일이 아닌 좋은 일에/ 왜 눈물이 고이는 걸까/ 우수인가 향수인가//

-<중략>-

유리창에 어룽거리는 불빛/ 가슴으로 소리 없이 눈물을 마시네// 

                                                          -「빗속으로 든다」부분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준 시인들은 곧잘 삶의 근원적 비애를 노래한다. 이는 대승 불교의 대자대비한 보살심의 발로일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기독교 시인 김현승은 「눈물」에서 인간이 가장 순수해지는 순간이 눈물을 흘리는 때라고 했다. 구숙희 시인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비 뿌리는 유리창에 어리는 불빛을 통해 과거의 추억들을 더듬는 화자는 좋은 일과 행복 앞에서도 그리고 연인들 모습에서도 역설적으로 비애를 느낀다. 삶은 연민일까 화자는 자문한다. 또한 ‘빗방울이 흐르는 유리창에 불빛이 밤 향기를 빛으로 반사한다’는 공감각적 표현으로 우수에 잠긴 시적 상황을 탁월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이는 바슐라르에 의해 밝혀진 ‘불’의 이미지가 회상과 연결된다는 유명한 이론과 직결된 표현이다.


먼 산은 나에게 말한다/ 지그시 눈을 감으라 한다//

-<생략>-

어머님 품같이 포근한 가슴에/ 안기라 하네/ 품어주라 하며/ 사랑을 가르치네//

일상을 털어 버리고/ 무상무념으로 숨을 고르고/ 가다듬고 바라보면서/ 

명상에 잠기기도 하는 산장의 하루/ 신나는 음악으로/

병상 속 온몸을 활기로 채워주네// 

                                                           -「먼 산 바라보며」부분


 인간의 아픈 심신을 치유할 수 있는 존재는 자연이다. 현대 문명에서 말미암은 현대인의 병은 자연의 품속에서 다시 정상으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먼 산’은 어머니의 이미지다. 인간이 아파할 때 구원자로서 요청하는 대상이 ‘어머니’다. 따라서 자연과 어머니라는 모성의 품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구숙희 시인은 모성 지향성의 원초적 의식을 거의 모든 시 작품에 노출한다. 게다가 ‘산’으로 상징되는 자연의 모성적 이미지는 무념무상의 반개한 미륵불상으로 확장된다. 


눈발 날려도/ 꽃봉오리 터뜨리고/ 하양 분홍 진홍/ 진주 알로 송골송골// 

겨울의 껍질을 뚫고/ 뾰족뾰족 솟은 싹/ 솟아 부풀어진 보리밭 밟아주면/ 온실 아니어도/ 

-<생략>-

자연의 모든 생명들/ 누가 부르지 않아도/ 고개를 내미는 봄/ 마냥 신비롭네요// 

                                                              -「자연의 신비」부분


 꽃봉오리, 새싹, 보리밭, 시금치와 배추, 흙, 이 모든 자연의 생명은 구숙희 시인의 친근한 동무다. 눈발 날리던 겨울의 껍질을 뚫고 고개를 내미는 자연에 대한 경이감을 표현한 이 작품은 대지에서 은폐된 진리를 찾는 철학자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을 떠올리게 한다. 대자연에서 경이감과 외경심을 느끼는 자만이 시를 창작할 수 있다. 그것이 인간 존재를 자연의 일부분이라는 겸손한 인식을 바탕으로 하는 생태주의의 출발점이고, 대자연과 계절의 회귀적 변화가 삼라만상을 낳고 기르는 여성주의 관점으로 연결된다. 여기에 구숙희 시인 자신의 생태-여성주의 시학이 가장 잘 드러난다.


 제2부 시편은 구숙희 시인 자신의 시 창작 태도와 삶의 태도를 정갈한 시어와 담담한 어조로 노래한다. 개인적인 삶은 곧 가족과 친구, 이웃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이때 가족은 어머니, 아버지, 오빠, 올케, 시아버지, 아들 등으로 구성된다. 대표적인 작품으론 「그리움 하나 더 가지고 살다」,「어머니가 그립다」, 「어머니의 밥상」,「아버지의 전령사 까마귀는 날다」, 「사랑채와 나그네」, 「사과 궤짝 책상」,「아들」, 「친구네 아들 엄친아」,「자야라는 친구」등이 있다.


 먼저 시 창작 태도와 시인의 존재 의미를 규명하기 위해「작품은 날개를 달고」,「내 가슴에 꽃 시(詩)를 심는다」두 편의 시를 소개한다.


작품에 날개를 달다/ 작은 심장 하나를 더 가진다//

아이를 낳기만 하고/ 유모가 대신 젖을 물린다//

나보다 더 나다운 사람/ 내 심장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불타는/ 폭포수를 끄집어 올린다// 

                                                       -「작품은 날개를 달고」전문


 시 작품을 창작하면 생명의 핵심인 ‘작은 심장’ 하나를 더 얻는다. 시인이 작품이라는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는 ‘유모’의 젖을 먹고 자란다. 다시 말하면 시 작품은 새로운 생명으로서 탄생하지만, 작품을 감상하는 독자는 유모가 되어 작품에게 젖을 물리듯 작품을 키운다. 현대 문학의 이론은 개별 독자의 능동적 수용을 주장한다. 텍스트는 하나의 의미만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품 해석의 몫은 오늘날 독자의 것이 되었다. 


 한편 작품은 스스로 살아 움직이고 성장한다. 그리하여 작품은 시인 자신보다 더 참다운 자아요, 본질적인 자아가 되어 시인의 생명 속에서 존재한다. 그래서 시인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불타는 폭포수를 끄집어 올린다’는 역설적 논리를 펼친다. 새로운 눈빛으로 하강적 심상인 폭포수를 상승적 이미지로 끄집어 올린다. 구숙희 시인의 시편 말미에 감정을 승화시킨 눈물이 가끔 등장한다. ‘불타는 폭포수’를 이와 연결해 보면 물과 불의 이원 대립적인 심상이 시적 긴장감을 환기할 뿐만 아니라, 지나온 삶의 여정 동안 흘린 수많은 ‘눈물’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도 그것을 다시 열정적인 삶의 태도로 전환하려는 적극적인 의지가 엿보인다. 


봄이 웅크리고 앉아/ 싹을 틔운다//

옹기종기 모인 온기/ 가슴을 데운다/

노란 움이 모자를 쓴 채/ 틔우는 싹/ 시혼詩魂이 파릇파릇 돋아난다//

아, 그래/ 시/ 마음 밭 가득 채워 줄/ 희망의 싹// 

가슴은 콩닥콩닥/ 마음 밭에서 / 시의 보석이 자라고 있다//

설레는 가슴/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네// 

                                             -「내 가슴에 꽃 시(詩)를 심는다」전문


봄이 틔운 ‘싹’은 시인의 ‘시혼’(詩魂)과 같다. 그리고 새싹은 새 ‘희망’이다. 시인의 마음속에서는 언제나 ‘보석’ 같은 시가 자란다. 이미 원숙한 경지에 들어선 구숙희 시인이라도 시를 대하는 태도는 마치 사춘기 소녀가 가슴 설레는 첫사랑을 만나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 같다고 한다. 이는 시에 대한 순수한 절대 사랑이다. 


바람이 놀다 간 자리/ 그리움 안은/ 꽃잎/

송골송골/ 눈물로 맺혔다//

스치는 눈빛에/ 멍든 가슴 안고/ 새가 되어/ 종알종알 화답하는/

가슴에 피는/ 은구슬 닮은// 

길섶/ 아담한 꽃/ 홀로 앉은 그 자리에/ 

바람의 넋이 되어/ 말이 없다//

바람꽃 핀다//

                                                             -「바람꽃 연가」전문


 이 시 작품은 구숙희 시인의 대표작이다. 1연의 ‘꽃잎’은 ‘바람이 놀다 간 자리/ 그리움 안은/’ 채로 절대 순수이며, 비애와 연민인 ‘눈물’로 맺힌다. 그 ‘눈물’은 2연의 ‘은구슬’로 변용된다. ‘은구슬’은 ‘멍든 가슴 안고/ 새가 되어/’ 시인의 가슴에 피는 것이다. 아픈 상흔을 지우지 못해도 자유의 비상을 꿈꾸는 새가 되어 세계와 대지와 ‘종알종알’ 정답게 ‘화답’하는 시인의 일상적 삶의 모습이 연상된다. 즐거이 대상과 소통, 교감하고, 언제나 화합, 일치를 추구하는 서정 시인의 본령을 보여준다. 그러한 ‘은구슬 닮은’ ‘바람꽃 핀다.’ 3연에서 ‘바람꽃’에 대한 내면화된 묘사가 제시된다. 시인은 ‘바람꽃’이 고독한 존재로서, 번잡한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호젓한 달관의 경지에 이른 인격체로 묘사한다. ‘바람꽃’은 ‘바람의 넋이 되어/ 말이 없다.’ ‘바람’은 전달과 변화의 매개물이다. 그리하여 세계와 대지의 온갖 이야기를 ‘꽃’에게 들려주리라. 또한 ‘바람’은 시련과 역경이다. 지난 세월에 겪어낸 풍상이다. 그 ‘바람의 넋이 되어’ 무언과 침묵을 지키는 달관의 경지에 도달한다. 상처로 인한 고통의 울부짖음도 잊고, 불평불만의 말도 삼키고, 오히려 연약한 인간의 언어를 초월한 경지를 묘사한다. 결국 ‘바람꽃’은 시인의 자기 동일시의 대상이요, 시인의 분신이다. 그 ‘바람꽃’이 마지막 연에서 현재 시제형으로 ‘핀다.’ 서정시의 시제는 영원성을 함축한 절대 시제다. 


 제3부는 주로 수많은 식물을 의인화된 대상으로 바라보면서 시인과 대상과의 일치, 곧 공감과 나눔, 공존과 대화, 화해 등을 추구하고, ‘꽃과 나무’라는 대상을 내면화-사랑, 눈물, 추억, 연민 등-하여 시인의 내적 세계를 진솔하게 드러낸다. 시적 대상인 식물들은 해바라기, 들꽃 들풀, 맨드라미꽃, 양파, 깻잎, 함박꽃, 감꽃,대추나무, 장미, 태양초, 골담초, 양귀비꽃, 딸기, 목련꽃, 철쭉, 아카시아꽃, 사루비아꽃, 사랑초 꽃 등으로 참으로 다양한 꽃과 나무들을 노래한다.


미운 꽃은 목련화요/ 예쁜 꽃도 목련화라//

미소 가득 웃음 가득/ 청순미 가득 담아/

소복 입은/ 청상으로 다가오네//

미운 정 고운 정/ 가슴에 담아 온/ 고이 기른 냉가슴앓이 꽃/

꿀 먹고 벙어리로/ 수절 지키는 아녀자로/ 가슴 가득 눈물로 고였네/

고인 눈물 엿물처럼/ 방울방울 빗물 되어 맺히는구나//

-<하략>-

                                                                   -「목련꽃」부분


 봄도 아직 이른 봄에 피어나는 우윳빛 고운 피부에 고운 자태를 지닌 목련꽃을 바라보며 밉기도 하고 예쁘기도 한 시인의 감정엔 모순이 있다. 이를 이중감정의 병립이라 한다. 또한, 대상의 미소 가득한 청순미를 사랑하기도 하고, 소복 입은 젊은 과부로 여겨 연민을 느끼기도 한다. 하얀 목련화를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은 감정이입의 과정을 거쳐 ‘소복 입은 청상→ 수절의 눈물→ 빗물’로 연결된다. 

외가 한적한 마당 가에 곱게 핀/ 초롱불들 많이도 피었구나//

꽃잎 따서 꽃물 먹고/ 빨아 삼키며 놀던 그때가 그립다//

참깨 꽃과 닮은 사루비아꽃/ 참깨 꽃은 하얀색/ 정열의 빨강 사루비아/

어릴 적 추억이/ 아름다운 영상으로 스친다//

언제 봐도/ 아름다운 추억 한 자락이다// 

                                                       -「늦여름 사루비아꽃」전문


  외가에서 놀던 유년 시절은 언제나 그립고 아름다운 추억이다. 어머니가 살았던 작은 방이며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손때가 묻은 툇마루며 장독대며 우물은 이전부터 이미 친숙한 공간과 사물처럼 당시의 시인에게 다가온다. 마치 자신이 어머니의 처녀 때 시절로 돌아간 듯한 일종의 기시감(旣視感)마저 느낀다. 그것은 가족 공동체의 일체감에서 일어나는 감정일 것이다. ‘외가 한적한 마당 가에 곱게 핀/ 초롱불들(사루비아꽃)’은 유년 시절에 얽힌 추억들을 회상케 하고, 그리움의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꽃에서 초롱불이 연상되고 불이 다시 과거 회상으로 연결되는 것은 ‘불’이라는 이미지가 회상의 기능을 한다는 바슐라르의 이론과 상통한다.  


 제4부 시편들은 이전의 식물들과 달리 사람들, 다양한 인간 군상들과 그들에게 느끼는 정과 세태 풍자와 교훈성을 중심 소재로 다루고 있다. 시인은 더 나아가 인생, 삶의 의미를 천착하고, 여행을 떠나고, 여러 가지 사물들에서 느낀 점 등을 노래한다. 


인생사 고달프다/ 배고픔 굶주림에/ 허기진 인생살이/ 한없이 눈물 난다//

불행을 딛고 서서/ 희망을 불태우며/ 젊어서 사서 고생/ 늙으면 후회 없다//

인생을 아름답다/ 말하진 않았지만/ 지나고 돌아보니/ 그래도 아름답다//

황홀한 세상 구경/ 세상 빛 찬란하다/ 늙어서는 황혼빛에/ 황금빛 물들이네//

                                                           -「후회 없는 삶」전문


 천상병 시인의 「귀천」은 간난신고의 삶을 겪은 화자가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하고 삶에 대한 긍정적 태도를 보여주는 국민 애송시이다. 구숙희 시인도 이와 같다. 고달픈 인생살이에서 눈물 흘린 날들이 얼마나 많았으랴. 그래도 인생이 아름답다고 긍정하는 시인의 마음은 원숙한 인격체의 여성이 도달한 명경지수(明鏡止水)의 경지이다. 「거울」이란 시 작품은 자아 성찰의 매개물인 거울을 통해 세상과 인생을 관조한다. 그 모습이 그대로 서정주 시인의 ‘거울 앞에 선 누님같이 생긴 꽃’을 연상케 한다. 「후회 없는 삶」은 우리 고전 시가 가사의 형식을 차용한 독특한 시행 배열을 시도하고 있다. 3.4조의 2음보 연속체로 전개되다가, 말미의 ‘늙어서는’ 이라는 의도적인 파격을 일으켜 시상전개의 마무리를 예고한다. 마치 연꽃 한 잎이 살짝 비뚤어진 연적 같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푸념해 봤자/

잘난 거 하나 없으니/ 내세울 게 없다//

그냥/ 그렇게 사는 편이 낫다//

-<생략>-

가진 것 없으면 그만이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참기도 하면서 사는 것이/ 차라리 웃을 수 있는/ 내 소망이다//

이대로 살자//

                                                          -「나는 바보다」부분


 ‘그냥/ 그렇게 사는 편이 낫다//’, ‘그렇게 사는 것이 나을 거다//’, ‘이대로 살자//’ 시인은 끊임없는 자아 성찰의 결과로서 현재의 삶을 수용하고, 긍정한다. 이는 안분지족의 삶의 태도이며, 무욕의 경지다. 그러한 시적 화자 ‘나’는 과연 바보일까. 초월과 달관의 경지에 이른 도인일까.


늙으면 좋다더니 이제 알겠네/ 젊어서는 운 없다고 한탄했는데/ 

늘 그러기야 하겠냐고/ 참고 견디다 보면 마음 편히 살아갈/ 좋은 일 있을 걸세//

지난 삶은 일기예보와 같았다//

-<생략>-

잘 좀 참아보소/ 설마 좋은 일 생기지 않겠나/ 젊은이들이여!// 

                                                           -「젊은이들이여」부분


 인고의 삶을 견뎌 온 시인은 지나온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통해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따뜻한 충고를 해준다. 교훈적인 메시지를 담은 시 작품은 ‘예술이 좋은 감정을 가져야 한다’는 톨스토이가 주장한 바를 잘 보여준다. ‘지나온 삶은 일기예보와 같았다’는 시구는 하나의 경구(警句)처럼 독자에게 다가온다.


맑은 날 흐린 날도 있는 인생/ 흘린 눈물로/ 

맑은 영혼을 가질 수 있었던// 

울분이 분수처럼 터져/ 콧물인지 눈물인지 뒤범벅/

빗물에 섞어 흘려보낸/ 내 아픔의 고된 삶//

어느 여행길 흐린 날은 걷히고/ 맑은 하늘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니/ 

무지개가 원형인 것을 보았다/

-<하략>-

                                                                 -「여행」부분


 인생은 고해(苦海)라고 했지만, 그 고통의 바다를 가족 공동체의 사랑으로 항해하다 보면 어느덧 고통은 ‘눈물’로 정화되고, 오히려 순수한 영혼을 찾게 된다. 삶의 과정이 여행길이라면, 실제의 여행은 이중의 의미가 부여된다. 여행 중의 여행이니까. 그 여행에서 얻은 경험은 시인이 시적 영감을 얻는 자양분이 될 것이다. 


 제5부 시편들은 구숙희 시인의 세계와 대지에 대한 다양한 관심사를 옴니버스식 구성으로 펼쳐놓은 것들이다. 먼저 세태 풍자의 주제를 다룬 작품이 다섯 편, 자연환경 문제를 생태-여성주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생물(고양이, 오리, 청둥오리, 물오리, 물고기, 꿩 가족, 매미 거미, 굴뚝새 등)들이 소재로 등장한다. 3부에서 다양한 식물군을 다루었지만, 5부에서는 날짐승과 길짐승, 심지어 곤충에게까지 관심을 넓히고 있다. 자연물(바다, 섬), 생활 취미로서 낚시와 물고기잡이, 미각으로서 굴, 멍게, 다슬기, 인물군으로서 비둘기 할머니, 아파트 사람들, 친구, 동심의 세계로서 연 놀이와 연, 여행의 경험으로서 부산과 강화도, 지역 풍물로서 서울과 한강 등을 보여준다. 


엄마 까투리는/ 애들아 정신 차리고 엄마 뒤에 바짝 붙어/ 따라 오너라/

멀리 가면 안 돼요 내 뒤만 잘 따라 오렴//

오늘처럼/ 큰 동물이 오면 소리 내지 마라 숨죽이고 엎드려라/

그리고 잘 들어봐라 지금부터는 비상시에/ 잘 따라 해야 할 수칙을 숫자로 알려 주겠다//

암기를 꼭 잘 해주기를 바란다 애들아//

-<중략>-

이리하여 까투리 엄마의 훈련이 시작되었다

꺼벙이네는 그 이후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이야기로 전해 오고 있다.// 

                                -「까투리 엄마와 장끼, 아기 꺼벙이의 생존법」부분


 약육강식의 먹이사슬에 얽매인 험난한 세상에 어버이는 자손들에게 생존법을 전수해야 종족은 번식할 수 있다. 까투리 엄마는 어린 아기 꺼벙이에게 모성 중심의 생존 훈련을 시행한다. 이 시 작품은 독특한 대화 형식을 빌려 극적 구성을 취한다. 게다가 재미있는 우화적 구성 기법은 세태 풍자성과 교훈성을 동시에 획득하는 장치가 된다. 


넉넉지 않은 살림살이/ 혼자 꾸려가기에도 부족한/ 

할머니/ 그는 생활보호 대상자//

비실비실 홀쭉한 비둘기를/ 도우며 살고 있다/

-<생략>-

자신의 입치레도 바쁠 텐데/ 알곡 사다 모이로 준다/ 영양식이라 쌀보다 비싸다/

조류독감 문제로 곤욕도 치르기도/ 가엾은 생명들에게 베푸는 사랑/

그 사랑이 통하지 않는 세상// 

                                                     -「비둘기 할머니 사연」부분


 타자에 대한 사랑과 보살핌은 현대 문명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해결 방안으로서 여성성과 맥락이 닿아 있다. 강자가 더 강해지기 위해, 부자가 더 부자가 되기 위해 혈안이 된 이 각박한 시대에 자신보다 더 약한 존재에게 사랑과 보살핌의 시선을 돌리는 것은 진정한 휴머니즘의 발로이다. 이 시는 ‘생활 보호 대상자’인 할머니가 자신도 사회적 약자이지만, 자신보다 더 미약한 생명인 비둘기를 보살펴주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담긴 작품이다. 생명 존중의 사상이 그대로 발현된 시 작품이다. 구숙희 시인의 여성-생태주의적 관점이 잘 표현된 시 작품이다.


지붕 위에 뜬 달/ 절구통 위에 뜬 달/

장독대 고인 물속 달/ 사랑 나무 가지에 걸려/

오도 가도 못하고/ 산머리에 걸려/

숨조차 쉬지 못한 채/ 대롱대롱 매달린 반달연//

-<생략>-

바람아 불어다오/ 반으로 접힌 반달을 펴다오/ 멀리 환히 비추게//

                                                    -「나뭇가지에 걸린 연」부분


 ‘연’은 동심의 세계다. 아이들이 하늘 끝까지 날려 보내려던 미지 세계에 대한 꿈과 희망이 현실 세계에선 흔히 벽에 부딪히고 만다. 이 시의 화자는 ‘반달연’, ‘방패연’, ‘가오리연’이 나뭇가지에 걸린 광경을 보고, 실패와 좌절을 겪은 이들을 떠올리고, 현실에 대한 깊은 연민을 보여준다. ‘바람아 불어다오’라고 화자는 자연 현상에 주술적인 소망을 빈다. 이때 ‘바람’은 원형적 이미지로서 변화를 상징한다. 그러면 바람은 ‘나뭇가지에 걸린 연’으로 하여금 좌절에서 일어나 새로운 삶으로 향한 추동력을 발휘하게 한다. ‘반으로 접힌 반달을 펴다오/ 멀리 환히 비추게//’ 반달연을 펴면 둥근 보름달이 되어 어두운 세상을 밝게 될 것이다. 시인의 풍부한 상상력이 돋보인다.


  일반적으로 좋은 시는 인생과 자연,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을 뛰어난 발상과 풍부한 상상력으로 포착하여 높은 예술적 형상화의 과정을 거쳐 문학적 진실성을 성취한 작품이다. 다시 말하면 좋은 시는 통찰과 형상화 과정과 진실성의 3요소가 유기적으로 결합한 것이다.


 구숙희 시인은 이러한 시작(詩作)의 문법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작가이다. 자연과 계절을 맑고 정갈한 언어로 노래하고, 모든 생명에 사랑과 배려를 아끼지 않는 여성성을 간직하며, 언제나 엄혹한 현실을 견뎌낸 초월과 달관의 눈으로 별을 바라보듯 상승적 지향의식을 보여준다. 


  대표작 「바람꽃 연가」에서 ‘바람꽃’이 번잡한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고독한 달관의 경지에 이른 인격체로 제시된다. 또한「후회 없는 삶」과 「거울」은 원숙한 인격체의 여성이 도달한 명경지수(明鏡止水)의 경지를 보여준다. 그리고「먼 산 바라보며」에 담긴 모성 지향성은 구숙희 시인의 ‘삶의 깨달음으로 승화된 생태-여성주의 시학’을 이루는 원초적 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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