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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한빈 Nov 12. 2017

현대적으로 계승한 ‘겸손과 온유’의 미학

-이홍혁의 시세계-

현대적으로 계승한 ‘겸손과 온유’의 미학

-이홍혁의 시세계- 


김한빈

(시인, 경성대 외래교수)





 퇴계 이황은「도산육곡 발(陶山六曲跋)」에서 ‘온유’의 가치를 옹호하면서 우리말로 쓴 시조․가사를 가창된 문학으로서 높이 평가했다.


 ‘한림별곡(翰林別曲)’과 같은 노래는 방탕한 뜻이 있고 거만한 데다가 외설스러워 숭상할 바가 아니다. 이별(離別)이 지은 노래가 세상에 널리 전하는데, 이것이 더 낫다고들 한다. 하지만 세상을 우습게 알며 공손한 뜻이 없는 데다가 온유(溫柔)한 태도가 적어 애석하다. -<중략>- 그런데 한시는 읊조릴 수는 있지만 노래가 되지는 않았다. 마음에 감동된 것을 노래로 부르려면 반드시 시속(時俗)의 말로 엮어야 한다.’


 이와 같이 이홍혁 시인의 시 세계도 ‘겸손과 온유의 미학’을 본질적으로 추구한다. 이는 동양 사상의 정수精髓라 할 수 있는 노자老子의 상선약수上善若水에 담겨 있는 철학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시인은 대체로 평이한 시어를 구사하면서 오랜 시 창작 경험과 연륜을 바탕으로 인생의 생로병사와 희노애락을 겸손하고 온화하고 부드러운 태도로 노래한다. 


 제 1 부 시편은 고향의 정경과, 전통문화와 토속적 풍물들을 노래하고, 다양한 인물 군상들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을 보이며, 인생의 생로병사와 희노애락을 주제로 전개하고, 궁극적으로 삶에 대한 성찰과 깨달음을 형상화한 작품들로 구성된다. 


 정겹고 평화로운 고향을 목가적 서정으로 노래한 「고향 길」, 「고향 풍경 1, 2」, 「벌초」등의 작품이 있고, 이어서 귀소 본능의 향수가 배인 전통문화의 풍물들을 다룬「곶감 선물」, 「한가위」, 「밤꽃」등의 작품으로 연결된다. 또한 시인은 따뜻한 인간애를 바탕으로 친구와 아버지, 할아버지, 외손자 등 여러 인물을 소재로 다룬 다양한 작품세계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시인의 주된 관심사인 삶의 숙명적인 과정으로서 생노병사와 희노애락을 다룬 작품으로 친구의 죽음을 아파하는 「장미의 병」, 연만하신 장인어른을 부축하여 병원으로 가는 「병원 가던 날」, 반려견의 죽음을 슬퍼하는「슈가 떠난 뒤」등이 있다. 이러한 시편은 결국 삶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통찰로 이어진다. 「뜬 구름」, 「바람 같은 삶」, 「파란 하늘」등이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한편 이홍혁 시인의 시 창작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으로서「창작」을 먼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한걸음 또 한걸음/ 세상을 읽으면서//

나 혼자 세상 생각/ 아픔도 삭여내면//

지나온/ 육십 평생이/ 그림자를 끌고 선다.//

큰 생각 적은 생각/ 온밤을 지새우며//

조심스레 풀어내는/ 살아온 이야기들//

나만의/ 당당함으로/ 창작의 기쁨 맛보네.//

                                                  -「창작」전문    


 이 시는 이 시집의 ‘서시’序詩이자, 시인의 ‘겸손과 온유의 미학’이라는 시 창작 관점을 잘 드러낸 작품이다. 그래서 화자의 어조는 언제나 온화하고 부드럽다. 그리고 겸손하다. 


 시인은 한걸음씩 올곧고 정직한 삶을 살면서 세상을 하나의 텍스트로 삼아 체험하고 이해하고 해석하는 과정을 거치며 인생관과 세계관을 형성해왔다. 세상은 거대한 아픔의 현장이고, 그 아픔을 극복하며 어느듯 육십 년 평생을 살아왔다. 지나온 삶의 족적足跡들이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 과거는 시간 속으로 흘러 사라졌을지언정 그 수많은 발걸음들이 기억 속에 남아있다. 그리고 삶과 세계에 대한 연민과 통찰로 밤을 지새우며 시를 쓴다. 정성스럽게 심혈을 기울여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제는 시인으로서 하나의 주견主見을 갖고 인생과 세상을 노래하는 ‘기쁨’을 맛본다.  


마음에 쌓아두고/ 가슴에 새긴 정을//

슬며시 건네주는/ 봉지 속 노오란 곶감//

정 가득/ 받아들고서/ 고마움에 젖는다.//

고마운 정을 한 입/ 베어 무니 입속에서//

사르르 내 가슴이/ 녹녹해 지는 순간//

갑자기/ 어머니 생각/ 목이 메어 눈물 난다//

                                                -「곶감 선물」전문


  중국 육적의 ‘회귤고사’를 바탕으로 지은 조선 후기 박인로의 「조홍시가」는 전통문화의 핵심인 ‘효’를 주제로 풍수지탄風樹之嘆을 노래한 유명한 시조이다. 어버이를 봉양하고자 하나 살아계시지 않음에 대한 탄식은 자식으로서 가슴 아픈 일이다. 이 시는 곶감을 선물로 건네준 이에 대한 고마운 정을 느끼면서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노래한 작품이다.  ‘가슴에 새긴 정’을 담아 건네준 ‘곶감’을 받고 고마움에 젖어 미감味感을 느낄 때 불현듯 ‘어머니’가 떠오른다. 시인에게 무한한 사랑과 정성을 베푸신 어머니가 생각나는 것은 ‘곶감’에서 느낀 정을 통해 연상된 것일 수도 있지만, 어머니께서 생전에 그 ‘곶감’을 즐겨 잡수셨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이 현대시조는 현대인의 삶과 전통문화 사상이 하나로 융합되어 나타난다. 한편, 위의 두 작품을 살펴보면, 이홍혁 시인은 현대 시조의 배행법에 대한 연구가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3장 6구의 시조 형식을 3행으로 처리하는 기존의 장별배행이 아니라, 6구를 6행으로 나누는 구별배행을 시도하여 현대 자유시의 느낌을 살린다. 게다가 시조의 핵심 내용이 담긴 종장을 3행으로 연장한다. 종장 첫어절인 3음절과 둘째 어절인 5음절을 각각 하나의 행으로 처리하여 시상을 집중시키고 강렬한 정서를 유발하고자 한다.


뜬구름 어디론가/ 바쁘게 달려간다//

산 넘어 무슨 일이/ 일어난 듯 줄지어//

넘어선/ 뜬 구름들아/ 머무를 때가 아름답다//

                                                 -「뜬 구름 -인생」전문 


 이홍혁 시인의 인생관이 압축되어 나타난 작품으로「뜬 구름 -인생」을 추천할 수 있다. 삶과 죽음에 대한 통찰은 문학의 영원한 주제다. 이 시에 형상화된 삶과 죽음의 세계는 수평적 연장 관계로 설정되어 있다. 산 넘으면 곧 저승이다. 한 번 가면 돌아올 수 없는 산이다. 그런데 바쁘게 달려가는 인생은 불쌍하다. ‘머무를 때가 아름답다’라는 종장의 끝구절은 희노애락으로 점철된 삶을 긍정하는 시인의 태도가 담겨 있다. 허망하고 정처 없는 부운浮雲 같은 이승의 삶일지라도 아름다운 것이다.


배움에 목이 굳고/ 출세에 거만한 인생//

그 사람 그런 사람/ 천년을 살 것 같이//

오만의/ 겉 추장 옷은/ 바람으로 날릴 것을//

죽음 앞 삶은 같다/ 왜 그리 앞서는가//

부는 대로 그렇게/ 흘러가며 떠~가지// 

못 가진/ 무거운 삶도/ 언젠가는 일어나리//

건강한 이 시간도/ 내일은 고민으로//

혹시나 행복으로/ 부메랑처럼 올지//

미래는/ 바람처럼 와서/ 바람같이 사라진다//

                                                -「바람 같은 삶」전문


 이 시 작품에도 마찬가지로 시인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잘 드러난다. 첫수에는 입신양명을 추구하면서 안하무인의 거만한 인간들이 판치는 경박한 세태에 대한 풍자를 보여주고, 2수엔 가난하고 소외받은 삶에 대한 연민과 희망을 노래하고, 3수에는 새옹지마의 인생에 대한 깨달음과 자연의 소멸 섭리를 제시한다. 


 제 2 부 시편은 자연친화 사상을 바탕으로 친숙한 자연물 특히, 수많은 식물(꽃과 나무)을 노래한다. 이들의 다양한 이미지가 만들어낸 아름다운 시상이 계절의 이야기(봄과 겨울)로 발전되고, 시인이 경험한 여행(보경사, 순천만)을 모티브로 향토 지역의 풍물들이 등장한다. 꽃과 나무는 마치 식물도감을 펼친 듯 갈대, 감꽃, 금목서, 은목서, 철쭉, 낙엽, 단풍, 대나무, 물칸나, 옥잠화, 진달래꽃, 배롱나무, 무화과 등으로 다양한 식물을 소재로 삼아 시인의 삶의 태도와 자연에 대한 애정 등을 노래한다. 


형체도 없는 것이/ 떼 지어 몰려오며//

그대는 나를 보고/ 춤추라 하겠지요//

그러나/ 잠시 누울 뿐/ 지나가면 비웃으리//

물 적셔 발 담그고/ 햇살 받아 키 키우며//

바람으로 은빛 단장/ 하늘을 높이 들고//

바람 곁/ 지켜 서면서/ 바람 갈까 두렵다네//

                                                -「갈대 -바람 앞에서」전문


 일반적으로 시조의 화자는 시인과 일치한다. 다시 말하면 시조의 화자는 시인의 개성을 그대로 표현할 뿐 아니라 작품 밖의 시인이 작품 속으로 들어와 발화한다. 이와 달리 이 시조는 ‘몰개성론’에 입각한 현대시의 기법과 같이 시인과 화자는 분리된다. 즉, 화자가 사물인 ‘갈대’로 설정되고 화자는 ‘바람’을 의인화하여 대화한다. 첫수는 갈대를 1인칭 화자로 내세운, 갈대와 바람의 대화 상황이지만, 2수는 ‘갈대’를 3인칭으로 설정하여 전지적 시점으로 바라본 시인의 시점이다. 


 갈대와 바람의 관계는 상호모순적이면서도 상호의존적이다. 1수의 바람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갈대에게 다가와 춤을 추라고 권유한다. 갈대가 춤을 춰야 비로소 바람의 존재가 구체적인 형체로 드러난다. 그러나 춤추는 갈대를 바람이 비웃고 떠나가 버린다면, 갈대는 허무감에 빠진다. 갈대가 춤출 수 있는 것은 바람의 영향에 따른 것이고, 바람은 갈대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상호의존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 한편 바람은 떠남의 본성을 숙명적으로 내포한다. 바람 없이 혼자 춤추는 갈대는 민망하거나 무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수에서 갈대는 ‘바람’으로 얼굴과 몸을 예쁘게 꾸미면서 바람 곁을 지켜 바람이 떠나갈까 두려워한다. 


 이 시는 노자의 음양 조화와 변화 사상이 행간에 깊이 배어 있는 작품이다. 갈대가 음이라면 바람은 양이다. 남녀 관계로 환치하여 해석할 수도 있겠다. 한편 바람을 수용하는 갈대는 겸손의 미덕을 실천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줄지어 곧게 서서/ 녹색 빛 아우르며//

정절로 지킨 바람/ 큰 울음 녹여내고//

절제와/ 청렴결백이/ 뼛속 깊이 굳어진다//

                                             - 「대나무」전문


 대나무는 대표적인 전통 소재이다. 대나무는 세한고절歲寒孤節로서 송죽매松竹梅라 하여 세한삼우歲寒三友로 칭송된다. 또한 매란국죽梅蘭菊竹이라 하여 사군자로 흠모의 대상이 된다. 조선 초기 원천석과 후기 윤선도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인들이 노래하고 사랑한 소재이다. 이 시의 ‘곧고 푸른 색’은 대나무의 절개와 불변의 이미지를 그대로 형상화한 것이다. 이 대나무에서 나라의 위정자들이 마음속에 새겨야 할 도덕성을 찾을 수 있다. 


이른 봄 화단에서/ 별들이 총총 떴다//

은하수 다리 건너/ 수없이 펼친 그림// 

별꽃의/ 봄 이야기는/ 따사로운 봄 향기로//

점점이 파란 물결/ 고개를 쏙쏙 올려//

봄소식 속삭임에/ 햇살은 얼비치고//

게으른/ 아지랑이는/ 봄 갈까 두렵다네//

                                                - 「봄 이야기」전문


  봄의 계절감이 물씬 풍기는 시 작품이다. 봄 마중 나온 상춘객은 ‘게으른 아지랑이’가 되어 봄이 더 오래 지속되기를 바란다. 겨울엔 하늘도 얼어붙어 별도 자취를 감춘다. 그러나 봄을 맞이한 꽃밭에는 천상세계의 별과 지상세계의 꽃이 만나 함께 어우러진다. ‘별꽃의/ 봄 이야기는/ 따사로운 봄 향기로//’에는 공감각과 복합감각이 이중적으로 표현된 뛰어난 시 구절이다, ‘별꽃’은 별과 꽃으로 해석해도 좋고 꽃의 아름다움을 별에 비유한 것으로 봐도 무방한 중의적 표현이다. 원래 시각 대상인 봄이 ‘봄 이야기’로 청각화되고, 봄 이야기가 꽃내음 뿜는 후각으로 전이되었다가 다시 ‘따사로운’ 촉각으로 변용된다. ‘게으른 아지랑이’는 시적 화자의 감정이입 표현으로 자기동일시의 투사가 일어난다. 


 제 3 부 시편은 7 가지 범주의 다양한 소재를 통해 세상을 파노라마적으로 관찰하는 한 편의 거대한 교향곡 같다. 시 내용들이 마치 여러 가지 악기들이 제각각 독특한 음색으로 협주하는 음악과 같이 다채롭고 풍성하다. 먼저 학교 등굣길 풍경을 노래한 「학교 가는 길」, 「입학하던 날-초등생 입학식」, 자연물을 관찰한 「창살에 걸린 별」,「출근길 새벽달」, 「구름」, 계절의 정서를 표출한 「10월의 마지막 밤」, 「겨울 코트」,「매미의 한」,「여름 햇살」,「여름 바다」,「실수-잠자리 목욕」등 다양한 작품이 있다. 평범한 사물을 심미적 관찰로 포착한「꼼장어의 비련」, 「자전거 두 바퀴」, 일생 생활의 성찰을 다룬「등산」,「명퇴-아버지」,「여유」,「지하철의 하루」, 내면세계의 고백을 표현한 「미술 심리」,「심리란」,「거울」등도 있다. 그리고 경상남북도와 부산 등지를 여행하면서 만난 지역풍물을 노래한「팔공산-선녀바위」,「오륙도」,「이기대」,「영도대교」,「함벽루」, 문화 예술 공연 체험담인 「연아 갈라쇼-나비」등 다양한 작품 세계가 있다.


외로이/ 창문 넘어/ 혼자서 기다리며//

빤짝이는/ 눈을 뜨고/ 님 찾아 헤매는 밤//

오늘도/ 외로운 방랑/ 창살에 머문다//

                                              -「창살에 걸린 별」전문


 서정시의 본질은 시인의 순수한 내면세계를 그대로 표출하는 것이다. 시적 대상과의 거리를 제거하고 세계를 자아화한다. 그러기 위해서 대상을 새롭고 낯설게 바라본다. 시인의 외로운 정서를 표현하기 위해 시인의 분신으로 ‘별’을 설정한다. 창문은 개방과 폐쇄의 이중적 장치이다. 창문은 내부 공간과 외부 공간을 단절시키면서도 연결시키는 통로이다. 외로움은 이 이중적 기능을 수행하는 창문을 열어 두 공간이 서로 만나게 한다. 


님을 그리워하는 화자가 불면의 밤을 지새우며 답답한 심정을 창문을 열어 달래보면서 밤하늘의 외로운 별과 마주친다. 그런데 별은 화자보다도 더 외롭다. 밤마다 님을 찾아 방황하는 모습을 창문 안쪽에 있는 화자에게 먼저 보여준다. 물론 이때의 ‘별’은 화자의 분신이다.


내가 갈/ 넘을 능선/ 힘들게 올라간다//

붙들고/ 사정해도/ 산은 묵묵히/ 나를 보고//

후회와/ 미련 떨치며/ 올라야만 허락한다//

                                                -「등산」전문


 산의 높이는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한평생 추구해야 할 인격의 수준이다. 산을 오르는 것은 곧 시인의 수직적 상승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산의 고고孤高한 높이에 쉽게 도달할 순 없다. ‘후회와 미련을 떨치며’ 지난한 자기성찰의 과정을 거쳐야만 가능하다. 과거의 무게를 지워야 몸이 가벼워진다. 그래야 비로소 산 정상에 오를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산 정상에 선다는 것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러 삶을 완성한다는 의미이다. 


햇살에 찔린 상처/ 붉은 등 씻으려고//

영지影池못에 멱 감으려/ 첨버덩 담구었더니//

앗 뜨거/ 웬 철판 연못/ 매끄럽게 비치네//

                                       -「실수(착각) -차량 위에서 잠자리 목욕」전문


 이 시는 1930년 중반 모더니즘의 시를 개척한 김기림의 「바다와 나비」를 연상케 하는 시적 발상과 표현이 담겨 있다. 그러나 김기림이 현대문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보여준 것과 달리 이 작품은 조선후기 사설시조의 해학정신을 현대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잠자리’로 설정된다. 가을 햇살이 따가운 잠자리는 파란 가을 하늘이 투영된 차량의 철판 지붕을 연못으로 착각하고, 그 위로 뛰어들었다가 ‘앗 뜨거’라는 독백과 함께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을 유머스럽고 극적으로 묘사한다. 현대문명의 산물인 자동차와 자연물인 잠자리가 연출하는 단막극의 코미디는 시인이 대상에 대해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시점을 취할 때 발생한다. 


폭염을 데워 놓고/ 햇살은 눈 부릅뜨고//

바닷물 짙게 물들여/ 푸른 청춘을 벗기는// 

파도는/ 젊음의 몸부림/ 백사장을 달군다//

천연색 화장으로/ 햇살을 쫓아보고//

신나는 모터보트/ 바다의 장난질에//

더 높은/ 뭉게구름만 기쁨으로 부푼다//

푸른 물 검게 타니/ 바람은 물을 타고//

넘실이 넘실넘실/ 일렁인 몸을 실어//

하루해/ 저물어 가는/ 밤바다가 정겹다//

                                             -「여름 바다」전문   

        

 위 시는 이홍혁 시인이 자연을 사랑하고 젊음을 추구하는 마음을 잘 드러낸 작품이다. 3수로 구성된 이 작품의 각 종장만 따와서 연결해도 한 편의 시가 된다. 그만큼 시의 구성이 잘 짜여져 있다. 여름 바다의 파도와 백사장 풍경, 장마가 끝난 뒤 더 높은 뭉게구름이 부풀어 오르고, 저녁놀이 붉게 물든 바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봐 저것들 좀 봐/ 저 섬들이 오륙도래//

그런데 다섯이야 여섯이야/ 등대섬, 굴 섬, 송곳 섬, 수리 섬, 솔 섬,/ 

하나, 둘, 셋, 넷, 다섯/ 아냐 하나 더 저기 저 섬/ 방패 섬도 있잖아 //

갈매길/ 지나는 길손/ 눈길 잡아 앉힌다.//

                                                     -「오륙도」전문


 이 시는 부산의 상징인 지역풍물을 사실감을 부각하여 묘사한 작품이다. 특이하게도 중장이 파격된 사설시조다. 초․중장은 오륙도를 찾은 여행객의 대화 형식으로 처리하고, 종장은 시적 화자의 전지적 시점으로 전환된다. 생생한 대화는 극적 제시 수법이다. 더욱이 현장감 넘치는 장면 묘사다. 오륙도 섬의 구체적인 이름을 열거하는 것 또한 현실성을 더 해주는 방법이다. 


 제 4 부 시편은 크게 나눠보면, 정치 풍자와 분단 현실을 다룬 작품들과 역사 기행에서 느낀 감회를 노래한 작품들, 다양한 인물 군상들에 대한 관찰과 세태 풍자를 담은 작품들, 여행 체험과 인상을 묘사한 작품들, 그리고 삶의 통찰을 보여주는 작품 등으로 구성된다. 먼저 정치 풍자와 분단 현실의 아픔을 다룬 작품으로 「정의의 농성」,「김정은」,「국회 청문회」,「국회의원」,「철마」,「휴전선」등이 있고, 사람 이야기와 세태 풍자를 담은 작품으로「노점상 할머니」,「최철훈 선생님」,「양심」,「핸드폰」이 있다. 그리고 낯선 여행지의 풍물을 노래한「캐나다 CN타워」,「맨하튼의 밤」과, 삶의 깨달음을 노래한「삶」등이 수록되어 있다. 


까마귀 끼리끼리/ 먹잇감 서로 펼쳐// 

욕심의 이전투구/ 당리黨利에 아전인수我田引水//

바라본/ 까치의 눈살/ 고운 마음 없으리//

                                                   -「국회 청문회」전문 


 공직자 후보자에 대한 검증 과정으로 국회 청문회를 개최한다. 그러나 국리민복과 거리가 먼 ‘까마귀’(국회의원)들은 당리당략을 앞세워 이전투구를 벌이는 행태를 보여준다. 이에 실망한 ‘까치’(국민)의 시각으로 ‘국회 청문회’를 비판하는 이 시는 우의적寓意的 장치를 잘 활용한 풍자적 작품이다. 


겉모습은 이웃 아재/ 큰 눈을 부릅뜨고//

일필휘지 날리며/ 언제나 항상 그곳//

문장21/ 사무실에서/ 글쟁이를 키운다//

글로써 못 채우면/ 한잔 술 머금고서//

“한산 섬 달 밝은 밤/ 수루에 홀로 앉아”//

한 줄을/ 읊어가면서/ 시상으로 보낸다//

*최철훈선생님은 문장21 발행인

                                                              -「최철훈 선생님」


 월간문학으로 등단하여 30여 년간 오로지 시 창작활동과 후진양성에 기울인 노력으로 한국해양문학상 대상과 부산문학상 대상을 수상하신 일주一砫 최철훈 시인을 시에 담았다. 한학과 동양 미학에 정통한 일주 선생은 한 잔 술과 자유자재의 붓을 벗 삼아, 풍류와 시서화詩書畵의 세계를 즐거이 노니는 선인仙人의 풍모를 보여준다. ‘한산 섬 달 밝은 밤’은 그의 애송시 첫구절이다. 그 노래 한 소절 부르면 번잡한 삶에서 오는 온갖 고뇌를 떨치고 장자莊子의 대자유인이 된다는 것이다.

광고판 색깔 화장/ 무지개 미소들로// 

세상의 아름다움/ 한 자리 모아 놓고// 

저마다/ 반딧불이 된/ 맨하탄의 밤이다//

                                               -「맨하탄의 밤」부분


 미국 뉴욕 타임스퀘어 광장엔 자본주의 최고의 명품 브랜드들이 저마다 화려한 조명으로 꾸민 광고판들이 즐비하다. 시인은 뉴욕 여행객으로서 ‘반딧불’ 천지의 불야성을 이루는 맨하튼  경을 시조 형식을 빌어 노래해 본다. 현대시조와 뉴욕 야경의 만남이 이색적인 풍경을 제공해준다.


살다보면 산다는 게/ 별것 아니라오//

내일에 집착해서/ 고단하게 살지 말자//

우리가/ 꿈꾸는 내일/ 어찌 보면 오늘이지//

매일을 하루같이/ 행복이라 느낀다면//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되는 것이지//

막연한/ 미래를 위해/ 소모전은 인제 그만//

산다는 게 별거든가/ 생각하기 나름이지,//

고통이라 생각하면/ 더 힘들어지는 세상// 

아서라/ 그만두어라/ 커피 향에 취해보자//

                                                                 -「삶」전문


 이 시는 ‘지금-여기’에 대한 실존적 자각과 안분지족의 삶의 태도가 잘 드러난 작품이다. 과도 경쟁의 현대사회는 재독 철학자 한병철 교수의 비판대로 ‘피로사회’이다. 현대인은 그 희생물이 되어 간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인식의 지평을 열어야 한다. 또한 남과의 끊임없는 비교에서 비롯된 부재와 결핍 의식은 불만족과 불행의 근원이다. 지금은 ‘커피 향에 취해보는’ 안분지족의 여유를 회복할 때다. 


 현대시조는 시조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계승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과거의 묵수가 아니라 새롭게 창조해나가기 위해 동양 인문학에 대한 세련된 조예와 현대시의 다양한 표현 기법과 현대사회와 현대인의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함께 융합시킬 필요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이홍혁 시인의 시 세계는 현대시조에 부과된 시대적 요청을 잘 소화해내면서, 때로는 다양한 실험적 기법을 과감하게 구사하며 현대시조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기도 한다. 시 작품 행간에 깊이 배여 있는, 동양 사상의 정수라고 말할 수 있는 노자老子의 ‘겸손의 도’를 바탕으로 언제나 ‘온유의 미학’을 추구한다. 이 시조집이 우리 현대시조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는 귀중한 디딤돌이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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