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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한빈 Nov 12. 2017

강인한 생명력으로 꽃 피운 ‘긍정과 희망의 미학’

-이수정의 시세계-

강인한 생명력으로 꽃 피운 ‘긍정과 희망의 미학’

-이수정의 시세계- 



김한빈

(시인, 평론가, 경성대 외래교수)






 늘상 울고 웃으며 사랑하며 살아온 이수정 시인은 아픔의 재를 털고 날아오른 불사조의 의지로 순수한 삶을 지향하는 노래를 독자들에게 바친다. 여기 수록된 시편들에서 강인한 생명력으로 꽃 피운 ‘긍정과 희망의 미학’이라는 시 정신이 산맥처럼 솟아 있고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인은 아무리 고통으로 점철된 삶일지라도 삶은 살만한 것이라는 긍정적 확신과 소박한 소망을 품은 미래에 대한 낙관적 희망을 수정(水晶)같이 맑고 투명한 언어로 노래한다. 시인은 병상의 아픔을 이겨내며 바라본 계절의 순환과 시간의 의미를 읽어내고, 시와 가족과 자연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노래하는 열정과 의지를 보여준다. 


1부


모진 비바람 맞으며/ 버텨선 한 그루 나무/

지금 이 순간 행복 가득/ 마음의 숲을 자랑한다./

큰 나무 그늘 아래/ 사랑이 숨 쉬고/ 오랜 세월 흘렀네./

부대끼고 비비고 살아온 날들/ 어제만 같고 꿈만 같다./

지나간 시간들/ 이유는 천만가지/ 돌아보니 꽃밭에 앉아있다./

                                                              -「한 그루 나무」전문


 우리나라 시인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백석’은 ‘이용악’과 더불어 일제 강점기 북방 정서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그의 시 작품들 중에서도 널리 사랑받는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의 지배적 심상으로 제시된 ‘갈매나무’의 상징과 이수정 시인의 「한 그루 나무」는  주제면에서 서로 닮았다. 먼저 백석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느낀 슬픔과 절망감을 극복하고, 현실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정신적인 각성을 이루는 과정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더 크고 높은 것’의 존재를 깨닫고 집착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아를 깨닫는 과정이 잘 드러난다. 시의 끝부분에서는 ‘갈매나무’를 통해 ‘드물고 굳고 정한’ 존재를 향한 자아의 이상을 투사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수정의 「한 그루 나무」에서도 화자는 온갖 풍상을 겪은 지난날을 회상하며 ‘지금 이 순간’ 행복이 가득한 마음의 숲에서 한 그루 나무 아래에 쉬면서 삶이 ‘꽃밭’이라는 긍정적인 실존적 자각을 보여준다. 


그때그때 초심을 잃지 않고/ 청명한 하늘을 보며/ 참아보련다//

괴롭고 힘들었던 일들/ 가슴 아려도/ 모든 것이 나로 인해 오간다.//

희망이 보이고 빛도 보이네/ 인생의 봄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아픔은 어둠이 아니라/ 선물이였다.// 

부족함에서 만족을 구한다//

                                                  -「부족함에서 만족에 구한다」전문  


 시인은 시작(詩作)을 통해서 자기성찰과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태도(대응방식)를 노래한다. ‘모든 것이 나로 인해 오간다’는 실존적 인식은 인생사의 중심에 자신이 놓여 있다는 불교적 주체관을 바탕으로 한다. ‘아픔이 어둠이 아니라/ 선물’이라는 역설적 인식으로 승화된 삶에 대한 긍정과 ‘부족함에서 만족을 구한다’는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삶의 태도는 시인의 강인한 생명력을 통하여 고난을 극복한 소박한 ‘긍정과 희망의 미학’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여명(黎明)에서 종이 울린다/. 새벽 별이 반짝이고 사람들이 같이 산다./ 

닭이 운다, 개가 짖는다/. 오는 사람이 있고 가는 사람이 있다.// 

오는 사람이 내게로 오고/ 가는 사람이 다 내게서 간다.// 

아픔에 하늘이 무너졌다./ 깨진 하늘이 아물 때에도/ 가슴에 뼈가 서지 못해서/ 

푸른 빛은 장마에/ 넘쳐 흐르는 흐린 강물 위에 떠서 황야(荒野)에 갔다.// 

나는 무너지는 둑에 혼자 섰다./ 기슭에는 채송화가 무더기로 피어서/ 

생(生)의 감각(感覺)을 흔들어 주었다.//  

                                                - 김광섭「생(生)의 감각(感覺)」전문


 시인 김광섭은 고혈압으로 쓰러져 사경을 헤매다 무의식 혼돈세계에서 다시 소생했다.  절망과 고통으로 이어진 참담한 투병생활 끝에 새롭게 피어난 생의 감각과 의지를 표현한 시가 ‘'생의 감각’이다. 시인은 무더기로 피어 있는 ‘채송화’를 바라보고 비로소 살아있음에 대한 느낌과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배운다. 이수정 시인 또한 위의 시에서 ‘하늘을 보며~희망이 보이고 빛도 보이네’라고 강인한 생의 의지를 노래한다. 

바람이 불면/ 바람을 몰고 가고 싶다.//

가슴에 바람이 불면/ 자색 목련 한 송이 피울/ 시 한 편 쓴다.// 

내 가슴을 데울/ 시 한 편//

                                                             -「시 그리고 나 」전문


 이 시는 이 시집의 서시(序詩)격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7행 3연으로 된 짧은 시다. 그러나 시인의 삶에 대한 인식과 창작 태도가 함축적으로 담겨 있다. ‘바람’은 고난으로 점철된 우리네 삶이요, 그 삶이 가져다주는 아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바람’을 ‘몰고 간다’는 표현을 활용하여 삶에 대한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인식을 드러낸다. 한편 이 ‘바람’은 삶의 외부에서 불어오는 것인 반면에 ‘가슴에 바람이 부는 것’은 내면세계에서 야기되는 고뇌와 정신적 방황이다. 이 심리적 혼란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시작(詩作) 행위이다. ‘내 가슴을 데울 수 있는 자색 목련 한 송이’와 같은 시를 쓰면서 감정을 정화하고 생명력이 충만한 삶을 염원한다.


2부


꿈길 같은 질컥이는 수렁/ 하나 둘 비워 내고/ 채워도 가고/ 물안개 고개 넘는 길/

눈물의 흔적 / 멍든 가슴 사무치네.//

그늘이 없는 곳엔 쉴 자리 없고/ 따뜻한 태양 아래 발자취 남기고/ 

가시덤불 같은 인생/ 흔들림도 있었지만//

새벽은 밝아오더라/ 켜켜이 쌓인 삶/ 인생의 답은 없더라.//

                                                          -「인생의 길목에서」전문


 ‘수렁’과 ‘고개’라는 삶의 간난신고(艱難辛苦)를 ‘멍든 가슴 부여안고 눈물 흘리며’ 견뎌온 시인의 삶의 여정이 이 시를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그러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서양 속담과 같이 자조(自助)의 힘을 발휘하여 고난을 이겨낸다. ‘그늘이 없는 속엔 쉴 자리 없다’는 역설적 인식은 부정적 현실 상황을 긍정적 태도로 극복하는 시인의 ‘긍정과 희망의 미학’이라는 시 정신을 잘 보여준다. 언제나 희망찬 ‘새벽’을 염원하는 시인은 ‘인생의 답은 없더라’는 실존적이고 주체적인 삶의 태도를 견지한다. 


서늘한 가슴속으로/ 한줄기 눈물이 흐른다.// 

절박할수록 정지된 듯/ 더딘 시간 속에/ 

살짝 열린 입술 하얗게 메말라/ 병실 가득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쓸쓸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눈빛 속에/ 수정처럼 가득 고인 눈물//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위로를 버팀목 삼아/ 

몸을 일으키며/ 처진 어깨를 다독인다.//

                                                                     -「눈물」전문 


  독실한 기독교 신앙으로 절대고독을 노래한 김현승 시인은 이수정 시인과 동일한 제목의 시에서 사랑하던 어린 아들을 잃고서 그 지극한 슬픔을 절대자를 향한 신앙으로 견디어 내었다고 한다.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全體)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중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 김현승 「눈물」 전문


 사랑하는 이를 잃은 인간은 무엇으로도 극복하기 어려운 슬픔에 빠진다. 그러나 그 슬픔은 우리로 하여금 가장 순수하고 진실한 순간에 직면하도록 한다. 게다가 모든 것이 절대자의 섭리라는 종교적인 깨달음 앞에서 낙화 끝에 결실이 있듯이 웃음 뒤에 새로운 ‘눈물’이 있다는 역설적 인식으로 슬픔을 승화시킨다. 


 병실에서 고통의 눈물을 흘리는 이수정 시인의 화자는 가족의 따뜻한 위로를 버팀목 삼아 자신을 일으킨다. ‘수정(水晶)’같이 맑고 투명한 ‘눈물’을 통하여 순수하고 진실한 삶에 대한 강인한 생명력을 복원한다.


주어진 길 하나/ 투덜대지 않고 가고 싶은 길/ 

좋은 기분으로/ 산책하듯/

맑은 하늘 구름 가듯/ 꽃향기 맞으면/ 

싱글 생글/ 환한 웃음 지으면/ 게으름 없이 가고 싶은 길/ 

삐거덕삐거덕/ 소리를 낸다//

그래도 삶을 위한 다짐/ 멈출 수 없다.// 

내가 선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조약돌처럼 작아도/ 

맑고 고운 마음으로/ 보일 듯 보이지 않게/ 있는 그대로/ 지금 눈높이로/ 

내가 있는 자리에서// 그리 살아가리라.//

                                                           -「삶을 위한 다짐」전문


 천상병 시인이 「귀천」이라는 시 작품에서 고난에 가득한 삶을 ‘아름다운 소풍’이라고 인식하듯이, 또한 윤동주 시인이 「서시」에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라고 노래했듯이, 이 시에서도 시인 자신의 운명적인 삶의 길을 불평 없이 수용하면서 마치 ‘아름다운 소풍’이라도 나온 듯 산책하는 화자의 삶의 모습이 나타난다. 인생은 살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끝없는 하늘과 구름, 대지엔 아름다운 자연물이 있으니 경이로움에 사로잡힐만하다. 이 시집 전체에 흐르는 ‘긍정과 희망의 미학’이라는 시 정신이 어김없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3부


은빛 파도/ 시퍼런 물결 넘나드는 바닷길/

비릿한 냄새/ 태양에 뿌리네.//

익숙한 유행가/ 콧노래로 흥얼거리고/

내 마음에 숨겨놓은 은밀한 웃음/ 바람에 엉킨다.//

아름다운 풍경들/ 콜록거리는 나의 그림자/ 슬픈 공복처럼/

울림의 공간으로 이끌어간다.//

빨간 고추잠자리 날아오를 때/ 나뭇잎 소리 함께/

네게 닿지 않는 길을 열어 안부를 보낸다.//

                                                              -「고추잠자리 」전문


 이 시는 전반부에선 아름다운 자연 배경을 묘사하고, 이와 대비되는 화자의 슬픈 자화상을 제시한다. 후반부에서 ‘빨간 고추잠자리’의 비상은 화자의 상승적 지향의식이 반영된 이미지다. 닿을 길 없는 그리운 이에게 ‘고추잠자리’를 정서적 매개물로 감정을 전달하고자 한다. 이 시에는 다양한 이미지가 등장하여 공감각적이고 복합감각적인 표현 수법을 보여준다. 은빛 파도와 시퍼런 물결, 빨간 고추잠자리의 3중적 색채 대비가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를 환기하고, ‘비릿한 냄새’를 ‘태양에 뿌리네’라는 후각의 시각화라는 공감각적 표현을 구사한다. 또한 ‘콧노래’와 ‘웃음’, ‘나뭇잎 소리’는 청각적 이미지이지만, ‘웃음이 바람에 엉킨다’는 표현은 청각의 시각화이다. 게다가 ‘콜록거리는 나의 그림자’는 시각의 청각화이다. 이처럼 시각과 후각, 청각 등 다양한 이미지들이 복합적으로 잘 활용된 이미지즘의 시다 


한 잔 술에 취해 복사꽃 핀 얼굴/

그냥 그리 살아왔다고 고집하고 싶지만/ 빙그레 웃고 만다.//

아내로서의 역할/ 엄마의 역할 다 하지 못한 마음/ 눈물이 앞을 가린다.//

변하지 않는 마음 하나로/ 살아온 날들/

아름다운 세상/ 사랑하고 싶어 웁니다.//

당신을 바라보며/ 호사스러운 행복을 느끼고/

까르르/ 웃는 모습/ 나뭇가지도 비바람에 춤을 춘다.//

                                                           -「결혼 기념」전문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사랑하는 가족이 곁에 있다면 억만금을 가져도 가족이 없는 것보다 나을지도 모른다. 이 시의 화자는 아내로서 엄마로서 역할을 다 하지 못한 데 대한 회한의 눈물을 흘리지만, 가족애라는 변하지 않는 마음으로 한결같이 살아온 존재다. 남편과 자녀가 결혼 기념일에 함께 축하해주는 삶은 ‘호사스러운 행복’일 수 있다. 


* 일월// 기쁨과 새로운 각오로/ 내일을 위해 힘차게//

* 이월// 매화 만발하여/ 새 희망 가지마다/ 웅크린 가슴을 활짝 여네//

* 삼월// 강남 간 제비 돌아와/ 메아리 되어/ 봄을 기다린다.//

* 사월// 사뿐한 바람 불어/ 개나리 진달래 만발하여/ 친구 되어 주네//

* 오월// 언제나 그때처럼/ 벌 나비 꽃을 찾아// 

-<하략>-

                                                             -「일 년 열두 달」부분


 고려속요 「동동」은 우리나라 고전시가 중에서 처음 등장하는 월령체가이다. 일 년 열두 달을 각 연으로 설정하여 민중의 세시풍속과 관련지어 화자의 임 없는 외로움과 임에 대한 사랑을 노래했다. 이 시도 이와 같이 월령체가 형식을 빌려 사계절 열두 달을 짧은 구절에 담았다. 이러한 시 형식의 시도는 전통의 창조적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인용된 ‘오월’까지만 봐도 봄과 여름의 계절감이 흠뻑 묻어나면서 아름다운 자연물과 혼연일체가 된 화자의 삶에 대한 긍정이 잘 드러난다.


4부


숨 죽은 감각들이 식은땀을 흘린다./

빛 없이 자라는 그림자/ 아물지 않는 향기에 허기지네./

달구어진 모래알 같은 나의 체온을 느낀다.//

답답한 이 마음 아는지 모르는지/ 기침을 숨길 수 없다./

누군가 부르는 이명 습관처럼 들리고//

넘실거리는 파도 입속에 쩍쩍/ 내 몸은 수장된다/

심술궂은 심장소리 매운 눈물 삼킬 때/

붉은 저녁노을 그를 닮아라한다.//

                                                              -「붉은 저녁」전문


 우리말을 가장 능수능란하게 사용한 시인으로 단연 정지용을 꼽는다. 그의 「발열」이라는 시는 신열을 앓고 있는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안타까움이다. 덥고 습한 여름밤의 정경을 보여주고, 아이가 신열이 올라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부모로서의 괴로움을 표현한다. 마지막 부분 ‘별들이 참벌 날으듯 하여라.’는 부모로서의 절망감과 무기력이 극대화된 심사이다. 여기서 '별'이라는 시어는 화자의 어지럽고 복잡한 심리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와 달리 이수정 시인의 위 시는 시인 자신이 실제로 겪은 참담한 병상의 고통을 묘사하고 있다. ‘심술궂은 심장소리’에서 시인은 지독한 아픔을 느끼면서도 ‘붉은 저녁노을’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찬란한 슬픔’을 극복하려는 생의 강인한 의지를 보인다.  


왔소 왔소/ 천리 길 찾아왔소//

바람에 날려 왔나/ 구름에 쌓여 왔나//

해당화 피고 지고/ 철새도 따라 온다//

하늘 높고 날 저무니/ 어디 가서 쉬어가리//

가다가 날 저물면/ 꽃 속에 쉬어 가자//

                                                                  -「가을」전문


 이 시는 현대 민요다. 다시 말해 전통 민요의 현대적 계승이다. 우선 첫 연에서 A, A, B, A형의 전통 민요조를 활용하여 운율감을 살리고, 1연의 ‘-소’라는 친근한 느낌을 주는 회화체 어미에 이어, 2연에서 ‘-나’를 각운으로 놓아 대구법을 구사하면서 말건넴이라는 대화형식을 제시한다. 3연에서 ‘해당화’와 ‘철새’를 통해 각각 여름과 가을의 계절감을 자아낸다. 4연에서 천리 길을 찾아온 화자는 그리운 이를 만나 함께 길을 떠나며 저문 날 어디에선가 하룻밤을 묵어야 하는 나그네의 처지다. 그러나 어디든 꽃밭이고, 꽃 속에서 쉬겠다는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삶의 태도가 시의 주제를 이룬다. 


5부


내 야윈 어깨를 기댄/ 설사당 꽃/

하늘하늘 춤사위가 그리 정겹다//

고추잠자리 함께 찾아온/ 색색의 가을// 

내 그리움의 뜨락에/ 한 아름 가득 시를 부려놓고 가는구나//

욕심 부릴 줄 모르고/ 그저 그렇게 살아온 세월/

뱃고동만 울어도/ 그리 가슴 설렜다// 

맑은 샘물처럼/ 깨끗하고 순수하게/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너처럼/ 그렇게 깊어가는/ 가을을 닮은 꽃이고 싶다.//

                                                            -「설사당 꽃」 전문


 청마 유치환 시인이 코스모스를 ‘설사당이’라고 이름지었다는 설이 있지만, 청도 민요 모내기의 한 구절인 ‘처자 설사당 고개 넘어가네’가 있는 걸 보니 이미 우리말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설사당’의 어원이 서러운 사당패에 연원을 두고 있다는 해석도 있다. 이수정 시인은 위 시에서 가을의 정경을 배경 삼아 ‘맑은 샘물처럼’ 순수한 삶의 자세를 노래한다. 


달달한 더운 피 흐르는가 세밑 추위 아랑곳 않고/

초록 잎에 싸인 빨간 열매 꽃보다 고와라./

겨울 양식 걱정 없어 직박구리 수다 누가 말리랴/

쨍그랑 유리 하늘 산산이 깨져도 좋아라./

감탕나무 가로수 길을 걷노라면 엄마 정성 뭉근히/ 

달여진 조청 내음 달콤하여 근심 걱정 없어 좋아라./ 

사붓사붓 눈 내리는 밤 어느 지붕 낮은 집/

불 끄진 창틈으로 은밀한 숨소리 새어나올세라/

황급히 달아나는 하늬바람 뒷모습이 좋아라./

뜨끈한 국물 생각 간절한 날 친구 찾아올 것 같아/

내 안 텃밭에다 옮겨 심었다네 감탕나무 한 그루./

                                                             -「감탕나무」 전문  


 감탕나무는 수고 10m 에 달하며 암수딴그루로 3~4월에 잎겨드랑이에서 자잘한 황록색의 꽃이 핀다. 한국 원산으로 일본, 타이완, 중국 등지에 분포하는 상록활엽소교목이다. 흔히 제주도 및 울릉도와 남부지방의 해안가에서 자란다. 전라남도 완도군 보길면 예송리에 수령 약 300년의 감탕나무가 천연기념물 제338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이 감탕나무의 빨간 열매를 통해 화자는 지난날 단란한 가족 이야기를 회상하다가 친구를 맞이할 준비로 화자의 마음속에 그 나무를 옮겨 심는다. 낭만적이고 전원적인 목가풍의 시 작품이다.


꽃이 피었어요./ 

을/

피/

워/

보/

세/

요렇게// 

마음껏 피워 보세요./ 

음/

의/

꽃을 피워 보세요./

을/ 

피/

워/

보/

세/

요기 좀 보세요.// 


꽃이 피었어요.//

                                                          -「마음 꽃」 전문


 이 시는 독특한 시 형식을 새로이 시도하고 있다. 가로로 된 시행과 세로로 된 두운을 이중적으로 동시에 사용하여, 시각적으로 병치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수정 시인은 다양한 시 창작 방법을 모색하는 실험 정신을 과감하게 구사한다. 


  시 혹은 시 창작이 시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영국의 시인 키츠는 “불면의 밤을 보내며 완성한 시를 아침 해를 바라보며 불태워 버려도 좋다.”고 했다. 자신의 혼란한 감정을 시를 통해 정화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시인은 생명을 지키기 위해 시작(詩作)에 몰두할 수도 있다. 그것이 삶을 바라보는 창문이요, 생명을 지탱하는 뿌리요, 자기존재를 확인하는 중요한 길이기 때문이다. 이수정 시인의 시편들에서 별을 바라보고 흘린 눈물은 슬픔의 결정체가 아니라, 삶의 고통을 이겨내는 진주요, 수정같은 보석이다. 그에게 시는 바로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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