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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한빈 Nov 12. 2017

하이데거 예술 철학과 시의 본질

하이데거 예술 철학과 시의 본질                       

                                                                김한빈





머리말 


 마르틴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 1889 독일-1976)는 20세기 서양 철학의 대표적인 철학자이다. 철학뿐 아니라 문학과 문예 비평, 심리학, 신학, 생태학 등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서양 철학의 전통 전체와 대결하면서 철학에 새로운 기초를 놓으려는 『존재와 시간』은 난해하기로 유명하다. 여기에서는 주로 그의 후기 사상을 이루는 주저인 『숲길』과 『횔덜린 시의 해명』을 중심으로 예술 작품의 존재 규명과 시와 시인의 본질 해명을 다뤄 본다. 『숲길』(신상희 옮김, 2008), 『횔덜린 시의 해명』(신상희 역, 2009), 「시와 사유-하이데거는 어째서 중요한가?」(박이문, 2004), 「시작(詩作)의 존재론적 해명」(염재철, 2012), 「시가 아름다운 이유-하이데거 시론(시론)을 중심으로」(김동규, 2013), ‘열린 연단,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숲길>, 박찬국(2015)  등의 저서와 논문 및 강연을 참고하여 정리해 보았다. 상당히 많은 내용이 인용되었음을 미리 밝힌다.


본문


현대 과학 기술 문명 비판


 하이데거는 『숲길』「무엇을 위한 시인인가?」에서 현대를 신들이 떠나 버린 ‘궁핍한 시대’라고 부른다. 그는 “세계는 황폐해졌고, 신들은 떠나버렸으며, 대지는 파괴되고, 인간들은 정체성과 인격을 상실한 채 대중의 일원으로 전락해버린 시대”라는 유명한 말로 비판한다. 고향 상실의 시대로서 현대는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울지 모르지만 모든 존재자에게서 존재의 무게와 충만함이 사라져 버린 궁핍한 시대라는 것이다. 여기서 존재자는 개별 사물들, 존재는 그 사물들을 존재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존재자들의 근원적인 존재를 경험하려면, 자신의 진리를 내보이면서 다가오는 존재자들에게 우리 자신을 열어야 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태도를 ‘존재자를 그 자체로서 존재하게 함(sein­lassen)’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존재자를 그 자체로서 존재하게 하기 위해서는 과학 기술 문명이 규정하는 모든 존재자에 대한 지배 의지를 포기해야만 한다. 이러한 태도는 모든 인위적이고 조작적인 태도를 멀리하는 노자의 무위(無爲)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에 대한 모든 지배 의지를 떠나서 자연을 그 자체로 보려고 하는 하이데거의 입장과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말하는 노자의 입장은 상통한다. 존재자 전체를 대상화하여 개념적으로 파악하려고 하는 서양 형이상학의 태도가 정점에 달한 현대 과학 기술 문명과 그것을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자연관이 위기에 부딪히는 순간에 서양 철학과 동양 철학 사이에 하나의 대화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박찬국, 2015)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대의 과학과 기술은 모든 존재자를 수리적으로 계산 가능한 에너지 저장원으로 보면서 존재자들의 진리를 은폐한다. 존재자들의 진리는 무엇보다도 예술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관점은 과학이야말로 존재자들의 객관적인 진리를 드러내는 반면에 예술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주관적인 체험을 표현하는 것일 뿐이라고 보는 근대적인 사고 방식과 완전히 대립되는 것이다. 


생기사유의 지평에서 예술 작품의 근원에 대한 해명


 하이데거는 「예술 작품의 근원」에서 예술 작품에서 어떻게 존재자들의 진리가 개시되는지를 보여 준다. 예를 들어, 하이데거는 고흐가 그린 농촌 아낙네의 구두에서 그 존재자의 진리가 열려 밝혀진다고 본다. 하이데거는 ‘반 고흐’의 그림에 개시되고 있는 농촌 아낙네의 구두의 진리를 이렇게 서술한다. 


 너무 오래 신어서 가죽이 늘어나 버린 신발이라는 이 도구의 안쪽 어두운 안쪽로부터 밭일을 나선 고단한 발걸음이 엿보인다. 신발이라는 이 도구의 수수하고도 질긴 무게 속에는 거친 바람이 부는 드넓게 펼쳐진 평탄한 밭고랑 사이로 천천히 걸어가는 강인함이 배어 있고, 신발가죽 위에는 기름진 땅의 습기와 풍요로움이 깃들어 있으며, 신발 바닥으로는 저물어가는 들길의 고독함이 밀려온다. 신발이라는 이 도구 가운데에는 대지의 말없는 부름이 외쳐오는 듯하고, 잘 익은 곡식을 조용히 선사해주는 대지의 베풂이 느껴지기도 하며, 또 겨울 들녘의 쓸쓸한 휴경지에 감도는 해명할 수 없는 대지의 거절이 느껴지기도 한다. 더 나아가 이 도구에서는, 빵을 확보하기 위한 불평 없는 근심과, 고난을 이겨낸 후에 오는 말없는 기쁨과, 출산이 임박해서 겪어야 했던 [산모의] 아픔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 떨리는 전율이 느껴진다. 이 도구는 대지에 속해 있으며, 농촌 아낙네의 세계 속에 포근히 감싸인 채 존재한다. 이렇듯 포근히 감싸인 채 귀속함으로써 그 결과 도구 자체는 자기 안에 [고요히] 머무르게 된다.(신상희 역, 2008) 


 하이데거는 고흐의 그림이 농부 아낙네의 구두를 단순히 모사한 것이 아니라, 농부 아낙네가 살고 있는 세계와 이러한 세계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대지를 함께 드러냄으로써 농부 아낙네의 구두의 진리를 드러낸다고 보고 있다. 


 농부 아낙네의 구두는 농부 아낙네의 이러한 세계에 속해 있고 그것 안에서 보호받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농부 아낙네가 자신의 세계에 대한 안정된 관계를 맺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농부 아낙네에게 구두는 단순한 도구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또한 하이데거는 농부 아낙네의 구두에는 농부 아낙네의 삶과 세계가 뿌리내리고 있는 대지가 드러나 있다고 본다. 여기서 ‘대지의 해명할 수 없는 거절’이라는 말은 대지가 인간이 자신을 한갓 에너지원으로서 드러내려고 하면서 남용하려는 것을 거절하면서 자신을 은닉하는 현상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농부 아낙네의 구두는 이 대지에 속해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이 대지를 모든 것이 그 안에서 자라나서 다시 돌아가는 어머니로서 드러내고 있다. 


 이와 함께 우리는 농부 아낙네의 구두를 단순한 도구로 보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통해 아낙네가 거주하는 세계는 포근하고 아늑한 세계가 되고 대지는 우리를 떠받치는 고향의 대지가 되는 것으로 경험한다. 


 보통 한낱 도구로 간주되는 것일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이러한 세계가 뿌리내리고 있는 대지를 개시하는 것으로 경험하면서 그것에 신뢰감(안정감, 정)을 느끼게 되면, 그것은 단순한 도구로 간주될 수 없는 자체적인 존재와 무게를 갖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이데거는 농부 아낙네의 구두에는 “도구 자체의 ‘자기 안에 머무름’이 생기(生起, Ereignis)한다.”라고 말하면서 그러한 사태를 가리키고 있다. 이때 ‘생기’는 하이데거 후기 사상의 근본 개념으로서 존재-진리가 현존재(인간)와의 상호 공속관계 하에서 그 자신에게 고유한 모습(자성自性)을 가지지고 나타나는 모습 또는 그러한 사건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것은 우리가 함부로 남용할 수 없는 ‘자체적인 존재와 무게’를 갖는 것으로서 나타나고 우리의 삶과 대지를 모으면서 그것들 사이에 존재하는 통일과 질서를 지탱하는 장소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것을 단순히 도구로서 남용할 경우에는 우리의 삶도 황폐해지고 우리가 거주하는 세계와 대지도 황량해진다.


예술 작품의 본질


 예술 작품은 사물들의 진정한 본질을 전혀 예상하지 않은 방식으로 현출(顯出)하게 하면서 사물을 전적으로 새로운 빛 안에서 드러나게 한다. 진정한 예술 작품에서는 진리가 작품 가운데서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예술 작품 속에는 존재자의 진리가 작품 속으로 스스로를 정립하고 있다. 여기서 정립한다는 말은 ‘서 있게 함’을 뜻한다. 어떤 존재자가, 즉 한 켤레의 농촌 아낙네의 신발이 작품 속에서 자신의 존재의 빛 가운데로 들어선 것이다. 존재자의 존재는 지속적으로 밝혀지는 그런 [열린] 장소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고 한다면, 예술의 본질은 존재자의 진리가 ‘작품-속으로-스스로를-정립하고-있음’이다.(신상희 역, 2008)


 여기서 우리는 예술의 본질에 대한 하이데거의 핵심적인 규정에 이르게 된다. 그것은 사방세계(四域사역, 대지-하늘-죽을 자-신들)에 대한 그의 후기 담론과도 긴밀히 연결된다. 즉, 세계와 대지를 자기 안에 모아들이는 사물의 사물존재가 작품 속으로 정립되어 여실히 드러나고 있을 때, 작품은 비로소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작품은 사물적 하부구조와 심미적 상부구조의 통일에 의해서 하나의 예술 작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작품은 자기 안에 정립되는 어떤 것이 자신의 존재의 열린 장으로 들어와 스스로를 여실히 드러내 보일 때, 바꿔 말하면 사방세계를 펼쳐 보이면서 사물화하는 그런 사물의 참다운 존재를 작품 속에 구현할 때, 비로소 하나의 현실적인 예술 작품이 된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예술 작품의 현실성은 오직 예술 작품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존재의 진리가 고유하게 생기하는 사건으로부터만 직접적으로 경험될 수 있디. 


  예술 작품 안에서는 사물의 사물존재가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는데, 바로 이렇게 작품 안에서 “스스로를 나타내 보임”(sichzeigen)이 곧 존재자의 존재의 빛남(Scheinen)이다. 우리는 반 고흐의 그림을 대하면서 그 작품을 아름답다고 느낀다. 그 느낌을 촉발시키는 존재의 빛남이 예술미의 본질이다. 예술이란 그 안에서 존재자의 존재의 빛남이 일어나는 비은폐성(탈-은폐성, 진리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알레테이아(alētheia), 망각과 은폐에서 벗어남)의 영역이다. 이러한 진리로서 작품 안에서 “스스로 생기하면서”(sichereignen) 현성한다. 따라서 예술의 영역 안에서 일어나는 예술미는 사물이나 인간 또는 어떤 역사적 사건이 자신의 존재의 비은폐성 안으로 들어서는 탁월한 방식이다. 이러한 예술미를 수반하는 예술 작품은, 비은폐성으로서의 진리가 스스로 생기하여 작품화되는 예술의 영역 안에서 근원적으로 정초된다. 


예술 작품의 근원으로서 시작(詩作)의 본질


 모든 예술은 존재자로서의 존재자의 진리의 도래가 일어나게 함으로서 그 본질에 있어 시작(시작)이다. 거기에서 예술 작품과 예술가가 동시에 존립하게 되는, 그런 예술의 본질이란 진리가 스스로를-작품-속으로-정립함이다. 예술의 이러한 시 짓는 본질로부터 예술이 존재자의 한가운데에서 열린 곳을 열어젖히게 되며, 이 열린 곳의 열려 있음 안에서 모든 것이 예전과는 전혀 다르게 존재하게 된다. (신상희 역, 2008)


 여기서 시 짓기(시작詩作)란 예술가가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해 임의적으로 어떤 것을 착상하여 구성하는 그런 활동이 아니다. 시 짓기는 그 안에서 존재자가 존재자로서 환희 밝혀져 존재하게 되는 그런 존재의 열린 장을 “환히 밝히는 기투(企投, Entwurf, Projet, 인간 실존은 현실세계 속에서 항상 자기 자신을 창조하면서, 그 가능성을 전개해 간다. 이것은 실존이 '기도한'(entwerfen) 것이고, '앞에 던져진'(projecter) 것)”이다. 하이데거가 규정한 시 짓기로서의 예술의 본질에 대한 해석은 모든 예술을 좁은 의미에서의 시(Poesie)로 환원시키려는 시도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모든 예술에서 시 지어지는 것이 바로 존재의 ‘알레테이아’라는 의미에서의 ‘비-은폐성’이라는 사실을 특별히 강조하기 위해서 취해진 본질 규정이다. 


 예술이란 작품-속으로의-진리의-정립으로서 시 짓기다. 단지 작품의 창작 행위만이 시를 짓는 예술적인 활동이 아니라, 작품의 보존도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그 자신의 고유한 방식에 있어 시를 짓는 예술적 활동이다. […] 예술의 본질은 시 짓기다. 그러나 시 짓기의 본질은 진리의 수립(Stiftung)이다. 우리는 여기서 수립함을 삼중적 의미에서-즉 선사함(Schenken)으로서의 수립, 터닦음(Gründen)으로서의 수립, 그리고 시작함(시원始原, Anfangen)으로서의 수립함으로-이해한다.(신상희 역, 2008)


 시 짓기로서의 진리의 수립은 우선은 예술 작품을 창작한다는 관점에서 사유되고 있다. 비-은폐성으로서의 진리가 시 짓는 기투를 통해 작품 속으로 정립됨으로써, 우리에게 익숙하였던 예술 작품에 대한 종래의 모든 일상적 앎은 허물어지고, 작품이 존재한다는 유일무이한 사실만이 섬뜩한 충격으로 우리에게 엄습해온다는 것이다. 예술 작품이 존재한다는 이 놀라운 존재사건과 더불어 우리에게는 존재자가 존재자로서 근원적으로 탈-은폐되는 존재의 새로운 차원이 열리게 된다. 이 새로운 차원은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을 능가하면서도 각각의 존재자에게 자신의 현존을 수여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넘쳐흐르는 것이다. 진리의 수립은 이러한 넘쳐흐름(Überfluß)을 허용해준다는 의미에서의 선사함이다. 


 진리의 수립으로서의 시 짓는 기투는, 그 안으로 각각의 역사적 민족이 이미 내던져져 있는 그러한 삶의 터전을 열어놓는 행위이다. 이러한 터전이 바로 대지이며, 그곳은 역사적 민족의 공동체를 지탱해주고 감싸주는 그 민족의 대지가 된다. 그 민족의 대지는 거기에 그 민족이 체류해 왔고 지금도 체류하고 있으며 또 앞으로도 체류해야 할 공동체적 삶의 시원적 바탕이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시원적 밑바탕은 거기에 체류하고 있는 역사적 민족에게조차 대개는 은닉되어 있고 망각되어 있다. 그러기에 이렇게 은닉된 채로 남아 있는 그 민족의 공동체적 삶의 시원적 밑바탕을 열어 밝히면서 터닦아 나가야 한다는 것은 그 민족에게 주어진 존재의 역사적 운명일 것이다. 이러한 존재의 역사적 운명에 귀 기울이면서, 한 민족의 세계를 예술 작품 속에 내세워지는 대지의 차원 위에 열어 놓으면서 건립해나가는 것이 진리의 수립으로서의 터닦음이다. 


 선사함으로서의 진리의 수립과 터닦음으로서의 진리의 수립은 시작함으로서의 진리의 수립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이 셋은 하나로 통일된 채 존재의 진리의 열린 장 안에 공속한다. 여기서 시원이란 존재자로서의 존재자의 진리가 솟아나 펼쳐지는 존재의 심연이다. 이러한 심연 안에서 앞으로 도래할 모든 역사적 사건들과 사물들은 어떤 식으로든 탈은폐되어 펼쳐질 것이기에, 시원은 앞으로 도래할 모든 것들에 앞서 이러한 것들을 떠나보내면서 스스로 솟아나는 앞선-도약(Vorsprung)이다. 그러나 시원은 대개 위장된 방식으로 탈은폐된 존재자의 한가운데에 체류하는 세인들에게는 숨겨진 채로 남아 있다. 그래서 시원은 존재의 심연이다. 이러한 시원은 “언제나 섬뜩한 것이 몰고 오는, 다시 말해 평온한 것과의 투쟁으로 말미암아 빚어지는 비밀스러운 충만”을 자기 안에 지니고 있다. “시 짓기로서의 예술은 진리의 투쟁을 시원적으로-수립한다(Anstiftung)는 셋째 의미에서의 수립이며, 이것이 곧 시원으로서의 수립이다. 


 예술 작품을 창작한다는 관점 속에서 사유된 시 짓기로서의 진리의 삼중적 수립은 이제 예술 작품의 본존과 관련하여 사유된다. 왜냐하면 진리의 수립은 오직 작품을 작품으로서 존재하게 하는 예술 작품의 참다운 본존 속에서만 현실화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술 작품을 보존하는 각각의 방식은 작품 안에 진리를 수립하는 각각의 방식에 상응한다. 예술은 진리를 솟아오르게 하여, 그 진리를 수립하고 창작하고 보존하는 시 짓기이다. 이와 같이 진리를 수립하는 보존으로서의 예술은 작품 속에서 존재자로서의 존재자의 진리를 열어 놓으며 솟아오르게 한다. 그것을-거기로부터 자신이 유래하고 있는 그런 본질 장소로서의-존재의 열린 창 안으로 가져온다는 것, 바로 이것이 근원(Ur-sprung)이라는 낱말이 의미하는 참뜻이다. 예술 작품의 근원은 시 짓는 예술가, 즉 창작하는 자와 보존하는 자의 근원이 되는 동시에, 더 나아가 한 민족의 역사적인 터-있음의 근원이 된다. 바로 이러한 근원이 예술이다. 왜냐하면 예술은 본질상 그 안에서 존재의 진리가 역사적으로 생기하면서 현성하는 탁월한 하나의 방식이기 때문이다.(신상희 역, 2008)


하이데거의 예술 사상과 시 사상


 하이데거의 시 사상은 그의 예술 사상의 일환이지만, 그는 “시는 시 예술이 모든 예술 가운데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말할 만큼 예술에서 시를 높이 위치시켰고, 또 “예술의 본질이 시작(詩作, Dichtung)이라 규정할 정도로 시를 중시했다. 그런데 시작이 예술 일반과 마찬가지로 그의 존재론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하이데거가 시작을 모든 예술 중에서 특별한 위치에 자리매김하는 것은 시작의 요체로서의 언어가 지니는 존재론적 특별함 때문이다. 언어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음성적․문자적 표현 수단이거나 의사 전달과 상호 소통의 수단이 아니다. 그에게 언어는 근원적으로 존재-진리를 모아들이고 짓는 것이다. “언어라는 것은 존재자를 비로소 처음으로 그러한 존재자로서 열려진 터 가운데 가져온다. […] 언어가 존재자를 명명할 때, 그 명명을 통해 비로소 존재자는 단어와 현상함으로 옮겨진다. 근원적으로 볼 때, 명명은 존재자를 그것의 존재로부터 불러내어 다시 그것의 존재에로 불러들인다.” 이러한 점은 비단 그로서의 언어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말로서의 언어 역시 존재-진리의 모아들이기다. “말함(Sagen)은 빛의 기투이며, 그것을 통해 열려진 터에 들어선 존재자가 고지된다. 이때의 기투는 숨어 있지 않음이 존재자 자체에서 보내는 던짐을 풀어냄이라 할 수 있다. […] 개개의 언어는 본질적으로 이와 같은 말함의 일어남이며, 그 가운데서 한 역사적 민족에게는 그들의 세계가 발현하고 또 폐쇄적인 것으로서의 대지가 보존된다.(염재철, 2012) 


 하이데거의 시 사상은 그의 저서 『횔덜린 시의 해명』속의 「횔덜린과 시의 본질」이란 글에서 독일 시인 횔덜린의 시를 해명하는 과정에서 잘 들어난다. 그는 언어를 “존재-진리를 수립하면서 이름지어 부르기”로 규정하고 마침내는 “존재의 집”으로 부른다. 


 하이데거는 언어가 인간의 재보(財寶)라고 말한다. 언어가 단순히 인간의 의사소통에 사용되는 유용한 도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의미 즉 언어는 “인간이 역사적인 것으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 보장해주고 있다.”는 의미다. 인간이 역사적으로 존재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그는 실존의 존재 연관적인 측면에 주목해서 인간을 규정하는 용어로 ‘현존재’(현존, Dasein, 존재에 즉해 그때마다 거기에 있음)을 사용한다. 인간의 삶은 자연 존재의 흐름으로서의 대지에 언제나 귀속해 있으면서, 동시에 인간 연관적인 존재의 흐름으로서의 세계 가운데 있으며 그것을 창조하기도 하고 파괴하기도 한다. 인간이 존재한다-또는 산다는 것은 그처럼 언제나 근원적으로 어떤 형태로든 갖가지 존재 영역에 잠겨 있고 또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만 가능하다. 인간은 그런 맥락에서 존재에 현존하며 현성한다-곧 ‘현존재’이다. 그리고 현존재으로서의 인간이 그처럼 존재에 현존하고 현성하는 사건(생기, Ereignis)이 다름 아닌 존재의 생김으로서의 역사(Geschichte)이다. 하이데거의 역사는 철저하게 존재-역사(seinsgeschichte)이다. 


 이처럼 언어는 인간이 마음대로 좌우할 수 있다는 의미의 재보가 아니라, ‘인간이 존재-역사적으로 살 수 있게 보장해준다’라는 ‘존재사적 의미’에서 재보다. 그런데 그것은 ‘가장 위험한 재보’라는 것이 하이데거가 횔덜린과 함께 공유하는 시각이다. 그 두 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인간은 언어로 인해 전적으로 개방된 것에 내맡겨지는데 이 개방된 것은 존재하는 것으로서는 인간을 그의 현존에로 내몰고 자극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서는 인간을 기만하고 실망시킨다.” 다시 말해, 존재는 자기 밝힘에서의 그 밝음의 측면에서는 현존으로서의 인간이 존재에 머무르게 하는 가능성을 지니지만, 동시에 자기 숨김의 그 어둠의 측면에서는 현존으로서의 인간으로 하여금 존재 망각과 상실에 빠지게 하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언어의 이 위험은 사실 언어의 위험이라기보다 언어가 샘솟아 나오는 존재 자체가 지니는 위험이다. 반면에 언어에게는 존재를 언어 작품 속에서 개방적으로 드러내어 참답게 보존해야 할 과제가 부여되는데, 본질적인 말은 그것이 이해되어 만인을 위한 공동 소유가 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스스로 세속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언어의 본질 연관과 관련하여, 언어를 하나의 “대화”(Gespraech)로 규정한다. “우리 인간은 하나의 대화이다. 인간의 존재는 언어에 근거하고 있으나, 이러한 언어는 본래 대화 속에서 비로소 생긴다. 그러나 대화는 언어가 실현되는 하나의 방식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는 대화로서만 본질적일 수 있다.” 그의 ‘언어의 대화’는 보다 존재 연관적이다. “근원적인 대화는 운명적으로 보내어진 것의 언제나 말없는 말건넴이요, 고요한 인사의 소리다. 그리고 이 고요한 소리에서는 그 소리를 통해서 가리켜 보이도록 규정된 그 어떤 존재가 먼저 우리의 정감에 촉발하는 요구와 같은 것이 생겨난다. 이 요구 속에 서 있다는 것, 이것이 곧 들을 수 있음이다. 그리고 이 들을 수 있음이 진정한 말함의 본질 근거를 제공해 준다. 진정한 말함은 듣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들을 수 있음은 (근원으로부터) 자기가 들은 것은 다시 말하는 것과 같다.”


 즉, 언어가 근원적인 대화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하나의 동일한 것, 즉 존재가 건네주는 말-그것은 인간적 발화 기관을 통해 울리는 소리가 아니기에 고요한 소리다-의 들음이요, 또 그것에 따라 말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같은 들음과 말함의 통일 속에서 앞서 말한 인간 본질인 현존(Dasein)이 역사화한다. 


 시적 언어의 본질적 말하기가 존재-진리를 모아들이고 짓는 것이라는 『예술 작품의 근원』의 입장이나, 시적 언어는 근원적으로 존재와 언어 사이의 대화라고 말하는 『횔덜린 시의 해명』의 입장은 모두 한결같이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고 보는 하이데거의 언어 규정으로 수렴된다. 시작은 요체가 언어요, 그 언어의 본질이 존재의 수립이라면, 곧 시작은 언어를 통한 존재 즉, 상주하는 것의 수립이다. 하이데거는 이 상주하는 것에 관해 횔덜린의 시 <마치 축제일처럼......>의 해명에서 이렇게 말한다. 


 “신들과 인간 ‘너머’에 있는 성스러운 것은, ‘저 숱한 시간들보다도 더 오래된 것이다.’ 저 옛날처럼 까마득한 것은 예전의 모든 것보다 앞서는 최초의 것이요, 차후의 모든 것보다 나중에 오는 최후의 것이며, 모든 것에 선행하는 것이요, 모든 것을 자기 안에 간직하고 있는 것, 즉 시원적인 것이요, 이렇게 시원적인 것으로서 상주하는 것이다.”(염재철, 2012)


 이 말처럼 신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자들이 오로지 저 상주하는 것의 흐름과 방식 가운데서만 각자 이러저러하게 될 수 있는 것이라면, 상주하는 것 곧 존재야말로 모든 것들에 앞서는 것이요, 또 모든 것을 자기 안에 간직하는 것이 것이요, 그래서 그러한 것으로서 여여하게 머무르는 것, 곧 상주하는 것이다.


 존재는 존재자처럼 측정되거나 계산될 수도 없고, 또 그 겉모습을 그려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존재는 사유를 통해 관념적으로 만들어지거나 개념적으로 연역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존재를 이해하는 데 있어 더 심각한 문제는, 존재 곧 모든 존재자에 앞서 머무르는 것으로서의 “상주하는 것이야말로 덧없이 사라지는 것”이라는 데 있다. 왜 그것은 형이상학의 실체적 본질처럼 항상적이지 않고 덧없이 사라져 가는 것일까? 존재는 존재자 또는 그것의 실체적 본질처럼 한 순간도 멈춘 채 고정되어 바로 그러한 것으로서 우리에게 잡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존재는 여여한 흐름이요, 매 순간의 바뀜이요, 끊임없이 스스로를 없애감이다. 존재는 없애가면서 자신을 숨기는 양상의 것이기에, 존재에 의해 존재자가 드러남에도 정작 존재 자신은 우리의 감각과 사고로부터 벗어난다. 하이데거는 존재의 이 스스로를 없애가는(무화無化) 숨김의 흐름을 ‘존재의 자기 숨김(Sichverbergung des Seins) 현상으로 규정한다.


 존재는 흐르면서 사라지는 덧없는 양상의 것이기에 수립이라는 방식으로 붙잡아 매어져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수립한다는 것은, 이를테면 일종의 텃밭을 마련해주는 일이다. 그리고 그런 바탕이 되는 텃밭이 다름 아닌 언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수립은 언어를 통한 일종의 “터잡기”(Gruendung)이다. 


 존재를 언어에로 데려오는 자가 바로 시인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시인은 모든 사물들을 그것들이 존재하는 그 본질에서 명명한다. 시인의 명명은 단지 사물에 한갓되이 이름을 부여하는 일이 아니다. 시인은 사물과 사태를 그것의 본질, 즉 존재에서 받아들여 말한다. 그래서 시인의 말하기는 본질적인 말하기다. 시인은 이 본질적인 말하기를 통해 모든 존재자로 하여금 비로소 그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드러나게 하도록 그렇게 사물을 부른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뭇존재자는 바로 존재하는 그런 것으로서 자신을 알려온다. 시작은 그런 본질적인 “낱말에 의한 존재의 수립”으로서, 그런 시작적 수립 가운데서 존재는 자유롭게 정립되게 선사된다.


 하이데거는 「횔덜린과 시의 본질」 후반부에서 횔덜린의 시 구절을 인용해 인간의 존재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은 이 땅 위에 시적으로 거주한다.” 언어는 근본적으로 존재 연관적인 것으로서 존재와의 대화이며, 그 대화 가운데서 존재를 수립하는 것이야말로 근본적 말하기로서의 시작의 본질이며, 그리고 그처럼 존재와 대화하며 존재를 수립해 나가는 것이 이 땅에 살아가는 인간 존재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시인의 존재는 무엇이며, 시인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 시인은 성스러운 것이 건네주는 인사를 받는 자이지만, 그의 본질적 사명 때문에서라도 그 자신이 인사하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하는 그런 자이다. 즉, 날이 밝을 때 시인은 보다 높은 자의식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이때의 깨어 있음이란, 들리지 않지만 존재의 고요한 소리를 듣는 귀를 갖추고 있는 것이며, 보이지 않지만 존재의 일렁임을 보는 눈을 갖추고 있는 일이다. 존재의 소리와 모습은 존재자를 지향하는 눈과 귀로는 결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깨어나 있는 시인은 존재의 밝음 가운데 그 가까이 머물러 있어야 한다. 존재의 밝음 가운데 그 가까이 머무는 것이 바로 고향에로 귀환하는 일, 즉 귀향의 본래 뜻이다. 


 횔덜린의 시 「귀향-친지에게」는 겉으로는 그늘진 알프스로부터 고향 린다우로 가는 호반에서의 귀향 이야기로 보이지만, 하이데거는 그 시가 품은 참뜻을, “귀향이란 근원 가까이로 귀환함”으로 풀이한다. 실로 근본적인 의미에서 귀향할 수 있는 사람은 일찍이 방랑자로서 방랑의 무거움 짐을 어깨에 메고, 자기가 찾아야 할 근본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고자 근원으로 돌아오는 자이고, 귀향하는 자이다. 그리고 시인의 정신이 깨어나 근원 가까이 머물 때, 그리하여 근원의 고요가 내는 소리가 명료해질 때, “오직 그때에만 시인은 고유한 것, 즉 표현의 명확성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이다.” 물론 이때의 자유는 먼저 시인의 말이 저 성스러운 것의 찬란한 빛에 순응함을 전제로 한다. 


 시인은 이 같은 존재 방식-본질적 말하기로서의 시적 응답 방식-으로 존재의 아름다움을 모아들이고, 수립한다. 횔덜린의 시구처럼 ‘시인은 근원 가까이 살기에 그곳으로 떠나기 어렵다.’ 시인의 거주는 근원 가까이 머무름이고, 근원의 보여줌이며, 또 그런 면에서 근원의 선사이다. 대지의 아들이자 동시에 하늘의 아들인 시인은 그런 본질적인 의미에서 집-근원에 거주한다. 바로 이것이 “인간은 이 땅 위에 시적으로 거주한다”의 진정한 의미이다. 일상적 인간들은 시인이 시적 거주로서 먼저 잡아 놓은 그런 터에 비로소 찾아 들어 거주한다. “시인의 낱말은 죽을 자들이 고향에 거주하도록 거주함의 터를 닦아주고 정초하는 그런 것을 표현한다.” 그러하기에 시인은 이 땅 위에 인간의 거처를 마련하는 자요, 인간들을 근원으로 실어 나르는 “사공”이다. 가끔 하이데거는 성스러운 존재와 가사적 인간 사이에 놓인 시인의 이런 사이-존재를 고대 그리스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낱말인 “반신”이라고 부른다.


 횔덜린의 시편을 통해 존재의 수립으로서의 시작의 본질을 해명한 하이데거는 존재 망각의 이 시대, 달리 말하면 고향 상실의 이 시대를 ‘궁핍한 시대(die dürftige Zeit)로 규정한다. “왜냐하면  그 시대는 달아나버린 신들은 더 이상 없고 도래할 신들은 아직 없다는 의미에서 이중적 결여와 없음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 이중적 존재 결여의 궁핍한 시대에 하이데거가 시인에게 부여하는 사명은 엄숙하다. “시대가 궁핍하기 때문에 그 시대의 시인은 너무도 풍부하고, 또 그렇게 풍부하기에 그는 종종 있어온 것들을 회상하고 도래할 것을 기다리는 가운데 무력해지기도 하며, 이러한 외견상의 공허 속에서 단지 잠들기만을 원하기도 한다. 시인은 이렇게 자신의 사명으로 인해 최고의 고독 속에서 홀로 머무름으로써, 그는 자기 민족을 대표해서 진실로 그 민족을 위해 진리를 성취한다.” 시인의 고독은 존재와 인간 사이에 홀로 내던져져 도래할 존재의 침묵의 소리를 들어내어야 할 운명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땅 위에 인간이 시적으로 살 수 있도록 그 텃밭을 홀로 일구어야 하는 운명 때문이다.(염재철, 2012)


맺은말


하이데거 예술 철학의 의의


 존재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은 서양의 오래된 형이상학적 문제였으나, 현대 과학 기술 문명에서는 그 문제를 물리학이나 화학과 같은 자연 과학의 영역으로 축소시켰다. 영미 분석 철학의 토대를 마련한 비트겐슈타인도 서양의 형이상학적 전통이 실재하지 않는 관념적 세계에 대한 탐구가 무의미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서양의 전통적 형이상학의 과제를 해명하기 위해 새로운 존재 사유를 제시했다. 다시 말하면, 영원불멸의 본질을 찾고자 한 플라톤(이데아)이나 헤겔(절대정신)과 달리 ‘존재’를 새롭게 해석했다. 하이데거의 초기 담론에서 죽음에 대한 불안이라는 근본 감정은 불교 사상과 맥락을 같이 한다. 또한 후기 담론의 존재 사유는 노자의 ‘도덕경’과 상당한 공통점을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서양 철학의 한계를 동양 철학에서 출구를 모색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예술 작품이 존재론적 진리를 드러내는 과정을 묘사한『숲길』「예술 작품의 근원」과 시와 시인의 본질을 규정한『횔덜린 시의 해명』「횔덜린과 시의 본질」에서 진리를 수립하는 시인의 사명을 강조하는 하이데거의 사상은 오늘날 ‘죽은 시인의 사회’로 명명된 이 현대 과학 문명 시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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