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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한빈 Nov 28. 2017

좋은 시 읽고 좋은 시 쓰기

좋은 시 읽고 좋은 시 쓰기                         

                                                                                                    김한빈


2부  발상과 표현



머리말


 ‘병(病)에게’ 말을 건넨다면, 그것도 오래된 지병(持病)이 도졌을 때 시인이라면 뭐라고 말을 걸까.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시인은 ‘병’을 의인화하여 친구 대하듯 친근한 어조로 말한다. 어조는 태도이고, 태도는 곧 주제이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음계(音階)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동안을 뉘우치게 되네.(이하 생략)//’ 조지훈 시인은 「병(病)에게」(사상계, 1968)란 시에서 대상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취하고 있다. 이를 낯설게 하기 수법이라고 한다. 대상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는 것, 고정관념과 선입견을 버리고, 일체의 관습적 시각에서 벗어나 자신이 속한 그 시대의 지배 이념에서 탈피하여, 무비판적으로 형성된 머릿속의 지도를 지우고 대상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시의 발상이다. 좋은 시는 사고의 독창성과 상상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발상을 일으킨 시이다. 


본문


  시는 언어 예술로서, 감각적 언어 표현이 시의 예술성을 획득한다. 시인의 정서나 관념을 구체적인 이미지를 통하여 감각적으로 생생하게 형상화하기 위해선 창의적인 ‘발상과 표현’이 중요하다. ‘발상’을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현실이지만, 여기에선 시적 대상에서 시상(詩想)을 일으키는 방법이란 뜻으로 쓴다. ‘표현’은 물론 다양한 수사법을 가리키는 말이다. 결국 좋은 시란 시의 내용(통찰과 진실성)과 탁월한 ‘발상과 표현’(예술성)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것이다.


  시인들은 시상(詩想)을 처음 떠올리는 것이 특히 어렵다고 말한다. 시적 대상에 대한 주관적 정서가 일어나려면 시인 자신의 독특한 발상이 선행되어야 하고, 발상은 풍부한 문학적 상상력을 토대로 하기 때문이다. 원래 정서(情緖)란 감정의 실마리이다. 이는 시적 대상을 보고 듣고 느끼며 감각적으로 인식하여 어떤 감정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정서는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들-칠정(七情), 희노애락 애오욕-을 바탕으로 한다. 이러한 정서는 시인의 뛰어난 발상과 연결되어 표출된다. ‘발상’의 구체적 사례로 감정이입, 투사, 동일시, 의인화, 세계의 자아화, 주객전도, 주관적 변용, 유추적 발상, 역설적 발상, 아이러니적 인식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에선 특히 주관적 변용, 유추적 발상, 역설적 발상, 아이러니적 인식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시인은 시적 대상-인생과 자연-을 새롭게 본다. 그리고 낯설게 하기 수법으로 제시한다. 이것이 바로 과학적 진술과 구별되는 시적 진술(가진술, 의사진술, 사이비 진술)이다. 이로 말미암아 시는 언어적 긴장감을 유발하고, 자유를 획득한다.


  조선 중기 여류 시인 황진이는 시간이라는 추상적 대상을 마치 사물을 다루듯 주관적으로 변용한다. 


동지(冬至)ㅅ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어

춘풍(春風) 니불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 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이 시조에는 세 가지 서로 다른 시간의 층위가 나타난다. 독수공방의 외로운 겨울밤과 꽃이 피는 봄날과 사랑하는 임이 오신 날 밤이 순차적으로 제시된다. 초장의 동짓달 밤과 봄날 이후 맞이한 임 오신 날 밤은 대척점에 있다. 설령 같은 길이의 밤일지라도 임이 부재하는 시간과 임과 함께 하는 시간의 심리적 길이는 전혀 다르다. 시간을 주관적, 상대적, 심리적 대상으로 파악한 것은 뛰어난 발상과 표현이다. 이로 인해 문학적 상상력이 과학적 상상력과 만나는 새로운 지평의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 이와 유사한 발상과 표현이 고전시가 정철의 연군가사인 「사미인곡(思美人曲)」에도 나타난다.


건곤(乾坤)이 폐색(閉塞)하야 백셜(白雪)이 한 비친 제,/ 사람은카니와 날새도 그셔 잇다. 

쇼샹 남반(瀟湘南畔)*도 치오미 이러커든,/ 옥누(玉樓)* 고쳐(高處)야 더욱 닐너 므삼 하리.  

양츈(陽春)을 부쳐 내여 님 겨신 데 쏘이고져,/ 모쳠(茅簷)* 비쵠 해를 옥누의 올리고져.


*쇼샹 남반 : 소상강 남쪽

*옥누 : 옥황상제가 있는 곳

*모쳠 : 초가집 처마


  하계로 귀양 온 화자(선녀)는 임(옥황상제) 계신 옥루고처가 추운 것을 염려하여 화자 자신이 있는 소상 남반의 따뜻한 봄볕을 부쳐 내어 임 계신 데를 쏘이고, 자신의 초가집 처마를 비추는 해를 임 계신 곳에 올리고 싶어 한다. 태양열 에너지를 활용하고자 하는 시인의 탁월한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대상을 주관적으로 변용한다. 이와 같이 시는 상상력의 소산이다. 상상력은 대상을 새롭게 보고 낯설게 제시하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윤동주 시인은 「길」에서 공간이 시간과 결합된 발상을 보여준다. ‘길’이라는 공간이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독특한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다. 


잃어 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중략-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중략-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김춘수 시인은「내가 만난 이중섭」에서 한국전쟁 중 부산에서 만난 화가 이중섭이 동경에 있는 아내가 온다고 기대하던 심리를 ‘머리에 바다를 이고 있었다’고 말한다. 아내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의 무게를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물론 비과학적 진술이다. 그러나 문학적 상상력에 의한 시적 진술이 오히려 더 진실성을 획득할 수도 있다. 


광복동에서 만난 이중섭은/ 머리에 바다를 이고 있었다.

동경에서 아내가 온다고/ 바다보다도 진한 빛깔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하략-


  백석은 「여승(女僧)」에서 한 비구니의 비극적 삶을 통해 일제 강점기 가족공동체의 해체 현상을 형상화하고 있다. 1연에서 다시 만난 여승에 대한 인상을 ‘서러워졌다’고 말한다. 이것이 시의 지배적 정서이다. 2연 이하에서 그 여승의 과거를 담담하게 회상한다. 시에 서사적 요소를 원용한다. 흔히 말하는 스토리텔링의 수법이다. 섶벌같이 떠돈 남편을 찾아 유랑하던 여인이 어린 딸을 여의는 장면을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고 표현한다. 실제 사건을 인과적으로 왜곡하여 사건의 선후 관계를 뒤집어 놓아 죽음이라는 비극성을 순화하고 있다.


여승(女僧)은 합장(合掌)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녯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平安道)의 어늬 산(山)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女人)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女人)은 나 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섭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十年)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山)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山)절의 마당귀에 여인(女人)의 머리오리가 눈물 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통일신라 시대 글 읽는 소리가 당나라에까지 들렸다는 최치원은 중국에서 귀국하였으나, 골품제로 뜻을 펼치지 못하고 가야산에서 은둔할 때 지었다고 하는 한시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칠언절구)엔 자연 현상을 자신의 의지로 바꿔 표현한다.


첩첩 바위 사이를 미친 듯 달려 겹겹 봉우리 울리니, 

지척에서 하는 말소리도 분간키 어려워라.          

늘 시비(是非)하는 소리 귀에 들릴세라,          

짐짓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둘러버렸다네  


  속세의 늘 시비하는 소리를 가야산에 흐르는 시냇물로 차단시키는 화자의 의지는 강렬하다. 시냇물을 방음벽 삼아 ‘온 산을 둘러버렸다’고 표현하기 때문이다. ‘동두천’의 시인 김명인은 「너와집 한 채 」에서 이와 유사한 발상과 표현을 잘 보여준다.


길이 있다면, 어디 두천쯤에나 가서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의 

버려진 너와집이나 얻어 들겠네, 거기서

한 마장 다시 화전에 그슬린 말재를 넘어 

눈 아래 골짜기에 들었다가 길을 잃겠네

저 비탈바다 온통 단풍 불 붙을 때 

너와집 썩은 나무껍질에도 배어든 연기가 매워서

집이 없는 사람 거기서도 눈물 잣겠네 


쪽문을 열면 더욱 쓸쓸해진 개옻 그늘과

문득 죽음과, 들풀처럼 버팅길 남은 가을과 

길이 있다면, 시간 비껴

길 찾아가는 사람들 아무도 기억 못하는 두천 

그런 산길에 접어들어/ 함께 불 붙는 몸으로 저 골짜기 가득/ 구름 연기 첩첩 채워넣고서 


-중략-


그 물색으로 마음은 비포장도로처럼 덜컹거리겠네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 매봉산 넘어 원당 지나서 두천 

따라오는 등뒤의 오솔길도 아주 지우겠네/ 마침내 돌아서지 않겠네 


                                                        김명인 시집 『물 건너는 사람』(세계사) 1992


  지금은 경상북도 울진이지만, 과거엔 강원남도 울진군인 시인의 고향, 북면 두천리에 가서 화자는 ‘골짜기 가득 구름 연기를 첩첩 채워넣고서(2연)’ 슬픔 많은 속세와 단절하려고 한다. 구름 연기가 골짜기에 가득한 것은 자연 현상이다. 이를 마치 화자의 의지인 양 주관적으로 변용한다. ‘따라오는 등뒤의 오솔길도 아주 지우겠네/ 마침내 돌아서지 않겠네(마지막 연)’도 마찬가지다. 이 부분은 깊은 산속의 오솔길이 문득 끊어진 것을 화자 자신의 의지로 지운다는 의미로 볼 수 있고, 그 오솔길마저 아주 지워버려 다시는 속세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한편, 시상을 일으키는 발상과 시의 표현은 동시에 일어나는 만큼 서로 결부되어 있다, 흔히 시의 대표적인 표현 방법으로 비유와 상징, 역설과 반어, 해학과 풍자, 대구와 대조 등을 거론한다. 이 가운데 비유와 상징은 다른 짝들과 달리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더 많다. 비유는 시의 문맥 속에서 부분적인 가치를 가지지만, 상징은 대개 지배적 심상(모티프)으로 주제와 직결된다. 상징을 전통적, 관습적 상징과 개인적, 창조적 상징으로 나눈다면, 현대시에서는 후자의 상징을 발견하고 활용할 수 있느냐가 좋은 시의 요건이 된다. 전통시 계열의 대표적인 시인인 서정주의 「꽃밭의 독백-사소(娑蘇) 단장」엔 개인적, 창조적 상징이 돋보인다. 


노래가 낫기는 그중 나아도

구름까지 갔다간 되돌아오고,

네 발굽을 쳐 달려간 말은

바닷가에 가 멎어 버렸다.

활로 잡은 산돼지, 매[鷹]로 잡은 산새들에도

이제는 벌써 입맛을 잃었다.


꽃아. 아침마다 개벽하는 꽃아.

네가 좋기는 제일 좋아도,

물낯바닥에 얼굴이나 비취는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나는 네 닫힌 문에 기대섰을 뿐이다.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벼락과 해일만이 길일지라도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원주(原註)]사소:사소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처녀로 잉태하여, 산으로 신선수행(神仙修行)을 간 일이 있는데, 이 글은 그 떠나기 전 그의 집 꽃밭에서의 독백. 


  ‘노래’와 ‘말’은 기존 가치이고, 한계를 지닌다. 화자(사소 부인)는 ‘산돼지’, ‘산새들’에 식상했다. 새로운 가치 세계를 상징하는 ‘꽃’을 지향하는 화자는 ‘문 열어라 꽃아’라고 독백한다. 이 시는 우리의 고대 건국 신화에서 착상했지만,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낸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전통적 상징을 관습적으로 답습하지 않고, 개인적 상징을 창조하여 활용한 표현 덕분이다.


  1950년대 모더니즘의 시인 김수영은 「눈」 (1956)에서 ‘눈은 살아있다’라고 일상적 어법에서 벗어난 진술을 한다. ‘눈은 깨끗하다’든지 ‘눈은 하얗게 쌓여 있다’라고 표현할 것을 새롭고 낯선 시적 진술로 제시한다. 언어의 긴장감을 중시했던 시인의 치열한 시정신이 이러한 시 구절에서도 나타난다. ‘눈’은 겨울밤 남들이 다 잘 때 자신은 떨어지면서(하강적 이미지-자기희생, 죽음 등) 오히려 새벽이 지나도록 순수한 빛으로 생생하게 살아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젊은 시인을 위하여 ‘눈’은 살아 있다. 이 ‘눈’을 새벽 마당 위에서 발견한 시인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무기력과 비겁으로 ‘참된 가치(자유와 정의)’를 실천하지 못해 죽은 영혼이라고 자조하던 시인이기 때문이다 (「사령」참조). 


눈은 살아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자기희생과 순수성의 상징인 ‘눈’을 바라보며 ‘가래’(일체의 비순수)를 제거하기 위해 ‘기침을 하자’는 시인의 권유는 5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여전히 유효하다. 이는 우리 사회가 김수영의 시정신을 극복할만한 수준에 아직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공정성과 신뢰성의 가치를 이 땅 위에 실현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김수영의 시를 계속해서 읽어야 한다.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기 위한 지난한 몸짓을 ‘꽃밭의 독백’으로 형상화한 발상과, 제 1 공화국 말기 부정적 현실을 비판하며 ‘살아 있는 눈을 바라보며 기침을 하자’는 표현들의 참신성은 대상을 새롭게 보고 낯설게 제시하기 때문에 획득 가능한 것이다. 


  상징의 한 종류로서 ‘신화적, 원형적 상징’을 활용하는 것은 상당한 수준의 경지일 것 같다. 이러한 상징은 현대시에 나타난 상징의 그 원형적 모습을 신화에서 찾을 수 있고, 신화에 나타난 상징이 그대로 혹은 약간의 모습을 달리하며 현대까지 계승되어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여류 시인 김남조의 시「겨울 바다」(1967)와 여류의 관형사를 벗어 던진 강은교의 시「우리가 물이 되어」에서 대표적인 사례를 찾을 수 있다. ‘물-불’의 원형적 상징을 공통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때 일반적으로 ‘물’은 생성, ‘불’은 소멸을 상징한다.


김남조 「겨울 바다」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未知)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중략-


허무의

물 이랑 위에 불 붙어 있었네.


-중략-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인고(忍苦)의 물이

수심(水深)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중략-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하략-


  이러한 원형적 상징들은 인류의 보편적인 무의식 세계 속에 내재되어 현대 문학과 예술에까지 전승되어 온 것이다. 많은 문학 예술 이론들이 이와 관련된 논의를 활발히 하고 있다.  


  시에 비유와 상징이 없다면 비유적, 상징적 이미지가 없는 것이고, 그저 묘사적 심상만 남게 된다. 물론 묘사적 심상만으로 제시된 시도 가능하다. 특히 1950년대 모더니즘의 시인 김춘수는  무의미시를 주창하면서 이러한 제시방법을 시도하였다. 최근 포스트모터니즘 시에 등장한 해체시의 방법론으로 묘사적 심상만을 제시하는 수법을 원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가 의미한다면, 무엇을 말하고자 한다면 비유와 상징을 사용하지 않을 수 있을까. 


  유추적 발상은 비유와 반대 방향의 발상을 한다. 비유는 표현 대상이 먼저 있고,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이와 유사성을 갖는 ‘비유된 대상’을 찾는다. 이를 비유어라 한다. 비유어는 비유적 심상을 환기하고, 더 나아가 비유적 의미를 갖는다. 반면에, 유추적 발상은 주로 자연 현상을 관찰하고, 그것이 갖는 속성을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대상으로 연결시키는 것이다. 곧 유추는 범주가 다른 것에 확장 비교하는 것이다. 


이형기 「낙화」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落花)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위의 시에서 시인은 봄날 꽃이 지는 현상을 관조적으로 관찰한다. 낙화는 아쉽지만, 이것이 자연의 이법임을 안다. 꽃이 져야 여름의 무성한 녹음이 있고, 가을엔 결실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젊은 날 이별이 아프지만, 훗날 영혼의 성숙을 가져올 것이라고 화자는 말한다. 시인은 자연 현상을 깊이 들여다 보고 이를 인생에 유추적으로 적용하는 발상을 보여준다.


나희덕, 「못 위의 잠」


저 지붕 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 놓았을까요, 못 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다봅니다 

종암동 버스 정류장, 흙바람은 불어오고 

한 사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마중 나온 모습 

수많은 버스를 보내고 나서야 

피곤에 지친 한 여자가 내리고, 그 창백함 때문에 

반쪽 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 

아이들은 달려가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제자리에 선 채 달빛을 좀 더 바라보던 

사내의, 그 마음을 오늘 밤은 알 것도 같습니다 

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때 묻은 호두알은 쉽게 깨어지지 않고 

그럴듯한 집 한 채 짓는 대신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온 아비, 

거리에선 아직도 흙바람이 몰려오나 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대로 

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를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 

못 하나, 그 위의 잠 


  시인은 못 위에서 잠자는 제비를 관찰하고, 이를 통해 지난날 외환 위기로 실업자가 되었던 아버지의 내면적 고통을 유추적 발상으로 떠올린다. 제비집이 비좁아 아비 제비가 그 옆에 박힌 못 위에서 겨우 잠자듯, 실업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아버지는 골목길이 너무 좁아 한 걸음 떨어져 걷던 과거를 시인은 오늘밤 눈물을 글썽이며 회상한다.


  ‘역설과 반어’는 표현방법이면서도 발상법이다. 우리나라에선 이 둘을 명확하게 구별하지 못한다. ‘반어’는 ‘아이러니’의 하위 범주이다. 우리나라의 ‘반어’는 좁은 의미의 아이러니(언어적 아이러니)다. 상황적 아이러니, 구조적 아이러니 등과 같은 경우에 이를 번역할 때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해 ‘역설적’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추측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선 ‘역설적’이란 말이 도리어  ‘아이러니’를 포함하는 넓은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물론 잘못된 일이다.


  역설법은 평범한 진술로 드러낼 수 없는 깊은 진리나, 오묘한 의미를 드러낼 때 쓰인다. 역설적 발상은 대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서 출발한다. 이치에 어긋나게 말하는 역설은 말 그대로 일반적 상식이나 통념을 뒤집어 사고하는 것이다. 따라서 역설은 비과학적, 비논리적 진술이고 당연히 시적 진술(가진술, 의사 진술, 사이비 진술)이다. 여기에서 사고의 독창성과 언어적 긴장감이 생긴다. 일제 강점기 만해 한용운 선사는 「님의 침묵」(1925년)에서 역설적 발상과 표현을 보여준다. 시인은 님의 절대성을 표현하기 위해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 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 멀었습니다.’라고 노래한다. 또 님과의 이별을 부정하고 님에 대한 더 큰 사랑을 깨달은 정황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라고 고백한다. 시인은 현상적으로 님은 부재하지만, 본질적으로 현존하는 님의 존재 양상을 이렇게 노래한다. 


  신경림 시인은 1970년대 근대화 과정에서 소외받은 농민의 울분과 비애를 드러내기 위해 ‘농무’를 추는 농민들의 몸부림을 통해 역설적으로 비참한 농촌 현실을 제시한다. 


「농무(農舞)」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 달린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중략-

산 구석에 처박혀 발버둥 친들 무엇하랴

비료 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이거나


  시, 특히 서정시는 일반적으로 대상에 대해 일어나는 한 순간의 정서를 표출하는 것이다. 이와 달리 위 시는 서사적이다. 서사는 동적 대상의 움직임, 시간적 경과, 일련의 의미라는 세 가지 요소를 갖는다. 위의 시는 화자가 농민들로 설정되어 집단성을 강조한 ‘우리’라는 주체로 등장하고, 운동장-학교 앞 소줏집-장거리-쇠전-도수장으로 공간이 이동한다. 공간의 이동은 필연적으로 시간적 경과를 수반한다. 쇠전은 소를 파는 가게이고, 도수장은 소를 잡는 도살장이다. 이때 소는 곧 농민이다.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고, 몰락하는 부정적 현실을 사실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우리 현대시에 ‘반어’가 시의 의미구조를 결정짓는 작품으로, 국민 애송시인 소월의 「먼후일」을 들 수 있다. 반어라는 표현법으로 완벽한 성공을 거둔 시이다. 임과 이별 뒤 오랜 세월이 지나서 그리움으로 이미 속이 다 타 버려 자포자기한 상태인 화자에게 임(당신)이 찾아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잊었노라."라고 말할 수밖에. 속으론 한 순간도 잊은 적 없는 임이지만, 겉으론 반대로 말하는 화자의 처지가 기가 막힌다. 반어는 표리부동하게 말한다. 겉과 속의 상반된 의미를 복합적, 동시에, 이중적으로 드러낸다. 따라서 반어는 일석이조의 표현 효과를 거둔다.


김소월 「먼후일」


먼후일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리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리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잊고

먼 후일 그 때에 "잊었노라."


  또한 반어는 시의 한 부분을 차지할 수도, 전체 구조를 형성할 수도 있다. 김수영의 시 「폭포」는 마지막 연(5연)에서 반어를 통해 대상에 대한 경외감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황지우의 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는 시 전체 구조가 반어, 즉 아이러니일 수도 있다.  


김수영 「폭포」


폭포(瀑布)는 곧은 절벽(絶壁)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向)하여 떨어진다는 의미(意味)

계절(季節)과 주야(晝夜)를 가리지 않고

고매(高邁)한 정신(精神)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金盞花)도 인가(人家)도 보이지 않는 이 되면

폭포(瀑布)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醉)할 순간(瞬間)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惰)와 안정(安定)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幅)도 없이

떨어진다.


  부정적 현실 상황 속에서 ‘폭포’는 절벽을 ‘고매한 정신처럼’ 떨어진다. 이 하강적 심상은 자기희생, 죽음을 상징한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4연)는 올곧은 소리만이 참된 소리이다는 뜻이다. 역으로, 곧지 않은 소리, 즉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소리는 소리가 아니다는 비판이 담겨 있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4연)는 공자의 경구, ‘덕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덕불고德不孤  필유린必有隣)와 상통한다. 도시 소시민으로 전락한 지식인이 ‘나타’(나태와 타성)에 빠지고 소시민적 ‘안정’을 희구하여, ‘취’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을 폭포는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마지막 연) 폭포는 일정한 ‘높이와 폭’을 가진다. 그러나 정신적 대상으로서 상징화된 ‘폭포’는 더 이상 물리적 자연 현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높이와 폭이 없다’고 반어적으로 표현하여 대상에 대한 경외감을 드러낸다.


  한편, 대상에 대한 비꼼과 조롱, 자조적인 비판을 위해 반어가 사용될 수도 있다. 화자는 복수로 설정되어 집단성이 강조되어 있다. 시인은 80년대 신군부에 의해 애국심을 강요하는 국가 권력을 반어적으로 비꼬는 어조(‘경청한다’, ‘삼천리 화려강산’ 등)를 구사하다가 끝부분에 가서 ‘날아갔으면’ ‘앉는다’, ‘주저앉는다’를 통해 ‘의도한 바와 상반된 결과’를 초래한 현실을 자조적으로 비판한다.


황지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群)을 이루며

갈대숲을 이륙하는 흰 새떼들이

-중략-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중략-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위의 시는 전체 구조가 상황적 아이러니이다. ‘날아갔으면’ 하고 소망하지만, ‘하는데’에서 반전을 보이며 ‘주저앉는다.’ 의도한 바와 상반된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 현실은 비극적이다. 시적 화자는 이상과 현실이 분리되어 있는 부조리한 세계 속에 던져진 존재이다. 위 시는 이러한 세계 속에서 좌절하는 인간의 실존적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은 자기가 처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이 시는 특정한 시대만을 반영하기보다 문학의 항구성,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 


맺은말


  좋은 시가 인생과 자연,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바탕으로 탁월한 발상과 표현을 통해 높은 예술적 형상화의 과정을 거쳐 문학적 진실성을 성취한 작품이라는 규정에 별로 이론(異論)이 없다. 다시 말하면 좋은 시란 통찰과 진실성과 상상력의 세 요소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야 한다. 시가 예술성을 향해 날아오를 때 시적 대상에 대한 통찰과 진실성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대상을 포착하는 뛰어난 발상과 적절한 표현방법을 동원하여, 의미 내용과 유기적으로 잘 결합된 형태를 추구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이 발상은 창의성과 상상력으로 대상을 포착하여 대상을 새롭게 보는 것, 현상들의 이면에 있는 관계를 새롭게 인식하는 것, 대상을 주관적으로 변용하는 것, 그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 그리고 낯설게 하기 수법으로 제시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김한빈 

시인, 평론가, 경성대 외래교수


<문장 21>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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