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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한빈 Nov 27. 2017

좋은 시 읽고 좋은 시 쓰기

좋은 시 읽고 좋은 시 쓰기   

                                                                                                            김한빈


1부  좋은 시의 요건



머리말


  좋은 시를 판별하는 엄격한 기준이 있다고 단정하는 데 무리가 있다. 그러나 누구나 공감하는 좋은 시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좋은 시란 대개 인생과 자연,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바탕으로 탁월한 발상과 표현을 통해 높은 예술적 형상화의 과정을 거쳐 문학적 진실성을 성취한 작품이다. 간단히 말하면 통찰과 상상력과 진실성의 3 요소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야 한다.


  국민 애송시라고 할 만한 좋은 시들을 선별하여 그 시작품이 왜 좋은 시인지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표현 형식적 측면에서 창작과정, 발상과 표현, 운율과 이미지 제시 방법, 시상 전개 과정 등을 살펴보고, 의미 내용적 측면에서 시어의 함축적 의미, 주제 제시 방법, 사상적 배경 및 시인의 정신세계 등을 분석하면서 본받아야 점을 새겨 좋은 시를 쓰는 데 활용하고자 한다.


본문


  먼저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룬 좋은 시 중에서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을 다룬 몇 편을 읽어 보고 절실한 개인적 체험을 어떤 시적 형상화를 통해 보편적 의미로 승화시켰는지 알아보자. 올해는 박목월 시인의 탄생 100주년이다. 박목월의 「이별가(離別歌)」를 본다.


「이별가(離別歌)」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뭐락카노, 바람에 불려서


이승 아니믄 저승으로 떠나가는 뱃머리에서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뭐락카노 뭐락카노

썩어서 동아밧줄은 삭아내리는데


하직을 말자 하직 말자.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뭐락카노 뭐락카노

너 흰 옷자라기만 펄럭거리고...


오냐. 오냐. 오냐.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음성은 바람에 불려서


오냐. 오냐. 오냐.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경상도의 가랑잎> (1968)


  시는 시적 화자의 ‘자기고백(self-expression)'이다. 다른 말로 ‘자기독백’, ‘자기표현’이다. 시는 시인 또는 시적 화자가 혼자 중얼거리고, 독자는 곁에 다가와 가만히 엿듣는 형식이다. 이러한 대표적인 예는 유치환의 「깃발」이다. 반면에 위 시는 대화형식이다. 시적 화자와 청자가 동일한 시간과 상황에 존재하므로 대화이다. 시적 화자가 청자 ‘너’에게 직접 말을 건네는 형식이다. 이것은 서정적이라기보다 극적(dramatic)이다. 극적 제시 방법은 구체적이고 생생한 장면을 제시해주는 효과가 있다. 일상적 대화의 말투를 구사함으로써 시적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게다가 사투리를 적절하게 사용함으로써 현실감과 운율의 효과를 동시에 얻고 있다.  


  시적 상황 속의 청자는 ‘저 편 강기슭’으로 건너간 ‘너’, 죽은 아우이다. 죽은 사람의 목소리가 화자에게 잘 들리지 않는다. ‘강’은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을 가로질러 흐르는 ‘경계’의 원형적 상징이다. 우리나라 민속의 저승사자가 인도하는 강이다. 그러나 삶과 죽음 또는 이승과 저승이라는 두 세계가 ‘강’에 의해 단절되어도, 두 세계는 동일한 차원 속에 존재하는 연속적 관계이다. 강바람이 불고 있다. ‘바람’은 전달과 동시에 장애라는 원형적 의미를 갖는다.   


  시적 화자의 현재 위치는 ‘이승 아니믄 저승으로 떠나가는 뱃머리’ 위에 있다. 이미 ‘산 만큼 산 나이’다. 아우를 저 편 강 너머로 떠나보내면서 아우의 하직인사를 듣고 답하는 상황이다. ‘뭐락카노’라는 시어(사투리)를 점층적으로 반복함으로써 고조되는 감정을 나타내고 있다. 이승에서 맺은 인연은 동아밧줄처럼 질긴 속성을 가졌어도 시간 앞에서 속절없이 삭아내린다. 


  물론 위 시에 나타난 ‘강’이나 ‘바람’이 실제 현실세계엔 존재하지 않는다. 시인의 탁월한 상상력에 의해 구성된 허구의 세계이다. 이러한 비과학적, 비논리적 진술을 ‘가진술, 의사진술, 사이비 진술(pseudo statement)’이라고 한다. 비유와 상징, 역설, 유추 등 다양한 시적 진술이 이에 포함된다.


  위 시의 제재는 헤어짐이다. 우리나라 시가 문학의 3대 시적 상황을 헤어짐, 경제적 궁핍, 부정적 현실을 들기도 한다. 헤어짐은 혈육이나 연인과의 이별, 사별을 포함한다. 삶의 여러 문제 중에 가장 절실한 것이 자기에게 닥쳐올 죽음에 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보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가져온, 극복하기 어려운 슬픔을 어떻게 이겨내느냐는 것일 수 있다. 종교에 의지하지 않고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별로 없다.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통찰에 도달해야 가능한 일이다. 위 시의 화자는 이 문제를 어떻게 대응하는가. 여기에 화자의 태도가 드러나고, 이 태도가 주제를 형성한다. ‘하직을 말자 하직 말자./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죽은 아우의 하직인사를 만류한다. 이승에서 맺은 인연이 강을 건너 부는 바람과 같이 저승에서도 이어질 것이므로 ‘영영 이별이라고 말하지 마라’고 답한다. 강이 이승과 저승을 갈라놓는 단절의 기능을 하지만, 한편 배를 타고 건너가기만 하면 도달할 수 있는 저승은 이승의 연속적 세계다. 따라서 죽은 아우를 저승에 가서 다시 만날 수 있다. 이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다. 삶과 죽음을 인식하는 통찰이다. 


  고전시가 향가의 대표작품인 월명사의 「제망매가」와 비교할 수 있다. 누이의 죽음을 종교적 인식을 통하여 극복한다. 인생무상을 절감하지만, 저승이 아니라 ‘미타찰’이라는 불교의 극락세계를 설정하고 거기에서 죽은 누이와  재회할 것을 믿으며 도를 닦는 극복 방식을 보여준다.


  그러나 자식의 죽음을 다룬 정지용「유리창」과 김광균의 「은수저」에선 슬픔의 극복은 어렵다. 오히려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적인 대응방식이기도 하다. 김광균의 「은수저」에는 죽은 아이의 유품인 은수저를 밥상에 올려놓고 눈물을 흘리며 방문 밖에서 들려오는  아이의 목소리를 환청으로 듣는 화자가 등장한다. 자식 잃은 슬픔을 객관적 상관물(objective correlative)인 ‘은수저’를 통해 진솔하게 표현한다. 영국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엘리어트(T.S. Eliot)는 시인의 주관적인 정서를 이와 객관적 상관성이 있는 이미지(사물, 사건, 정황)를 통해서 독자에게 생생하게 전달해야 한다고 한다.


  정지용의 「발열(發熱)」은 아이가 앓고 있는 폐결핵을 낫게 해주지 못하는 아버지의 무기력한 심정을 애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발열(發熱)」


(1~4연 생략)

아아, 이 애 몸이 또 달아 오르노나.

가쁜 숨결을 드내쉬노니, 박나비처럼,

가녀린 머리, 주사 찍은 자리에, 입술을 붙이고

나는 중얼거리다, 나는 중얼거리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다신교도(多神敎徒)와도 같이.

아아, 이 애가 애자지게 보채노나!

불도 약도 달도 없는 밤,

아득한 하늘에는

별들이 참벌 날으듯 하여라.


  결국 아이를 잃고 죽은 아이를 그리워하는 심정을 노래한 작품이 「유리창」이다.


「유리창」


유리(琉璃)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肺血管)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山)새처럼 날아 갔구나!


 <조선지광>(1930.1) 


  위 시는 오늘날 새롭게 시도되고 있는 ‘단시짓기’ 움직임과 관련 있다. 최근 우리나라 중견 이상의 시인들이 디지털 모바일 시대에 맞춰 극히 짧은 분량이나 10행 이내의 형식을 탐구하고 있다. 이는 압축과 생략의 미덕을 최대한 발휘하는 시 형식이다. 실제 우리나라의 현대시는 2000년 이후의 젊은 시인들이 긴 시를 쓰는 경향과 달리 대체로 짧은 형식이었다. 위 시도 10행이다. ‘유리창’은 단절과 통로의 이중적 기능을 한다. 개인적, 창조적 상징(전통적, 관습적 상징보다 개인적, 창조적 상징의 사용이 좋은 시를 가르는 기준이 될 수 있다)이다. 삶과 죽음의 세계, 이승과 저승의 세계를 한 단면으로 나누면서 동시에 만나는 장치이다. 처음엔 죽은 아이의 고운 영혼이 유리창에 어리는 듯해서 유리창을 닦는 행위를 시각적 심상으로 표현하여 아이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낸다. 이것이 이미지즘의 수법이다. 비가시적인 표현대상을 구체적 심상을 통해 가시화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선 1930년대 중반 김광균 등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도된 모더니즘의 시는 기본적으로 이미지즘의 수법을 중시한다. 정지용은 전통시 계열의 시인이면서도 1920년대 중반 「향수」에서 벌써 이러한 수법을 사용해왔다. 또한 알고 보면 이러한 수법은 중국 송나라 회화에서 즐겨 사용한 전통적인 것이다. 그리고 유리창을 닦는 행위는 객관적 상관물이다. 


 시적 화자가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날개를 매단 천사같이 고운 영혼은 보이지 않고 ‘별’만 보일 뿐이다. 그 순간의 심정을 ‘외로운 황홀한 심사’라고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이를 어느 비평가는 감정의 대위법이라고 논평했다. 자식 잃은 슬픔과 죽은 아이의 영혼을 만난 듯한 기쁨을 음악 작곡법에 빗댄 것이다. 8행까지는 감정을 최대한 절제하다가 9~10행에서 감정을 분출한다. 우리 모국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했다는 정지용 시인이 나머지 두 행에 시어로 부적합한 자음(파열음 ‘ㅍ’, 파찰음 ‘ㅉ’, ‘ㅊ’)과 감탄사(아아)와 감탄형 어미(-구나), 영탄부호(!)까지 사용한다.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으면 자식을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고 한다. 아마도 시인은 죽은 자식을 자신의 가슴에 묻었다 하더라도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자식의 영혼은 ‘산새’되어 천국으로 날아가 별이 되었다고 믿었으리. 그 별이 마치 천사처럼 날개를 퍼덕이고 이승의 세계로 돌아와 아버지를 찾아왔다. 시인은 죽은 아이를 몇 가지의 이미지(‘차고 슬픈 것’, ‘언 날개’, ‘별’, ‘산새’)만으로 형상화한다. 위 시를 영상물로 제작한다면, 나지막하게 시작하여 점차 고조되어 가는 애절한 첼로의 선율을 배경 음악으로 사용하여, 창가에 기대어 생각에 잠겨 있는 사람의 모습을 화면에 담고,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는 인물의 모습을 클로즈업시킬 것이다.


  한편, 남자의 가장 큰 스트레스는 실업이 아니라 상처(喪妻)라고 한다.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 유배지에서 부인의 부음을 전해 듣고 후생에 다시 태어나 부부로 만나 자신이 먼저 죽어서 사별의 아픔을 알려주겠다고 노래했다. ‘뉘라서 월모(부부의 인연을 맺어주는 신선)에게 하소연하여, 서로가 내세에 바꿔 태어나 천 리에 나 죽고 그대 살아서 이 마음 이 설움 알게 했으면.’ 그런데 김춘수 시인은 김수영과 더불어 1950년대 이후 대표적인 모더니즘의 이론가요, 시인으로서 양대 산맥을 형성했다.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관념적인 시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래도 부인과의 사별의 슬픔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강우(降雨)」  김춘수   

  

 조금 전까지는 거기 있었는데

 어디로 갔나,

 밥상은 차려놓고 어디로 갔나,

 넙치지지미 맵싸한 냄새가

 코를 맵싸하게 하는데

 어디로 갔나,

 이 사람이 갑자기 왜 말이 없나,

 내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온다.

 내 목소리만 내 귀에 들린다.

 이 사람이 어디 가서 잠시 누웠나,

 옆구리 담괴가 다시 도졌나, 아니 아니

 이번에는 그게 아닌가 보다.

 한 뼘 두 뼘 어둠을 적시며 비가 온다.

 혹시나 하고 나는 밖을 기웃거린다.

 나는 풀이 죽는다.

 빗발은 한 치 앞을 못 보게 한다.

 왠지 느닷없이 그렇게 퍼붓는다.

 지금은 어쩔 수가 없다고,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상황을 먼저 설정한다. 평소와 같이 밥상을 차려놓고 아내는 잠시 자리를 비운 듯 착각한다. 아내의 상(喪)을 치르고 하관하고 집에 돌아와도 아내가 집에 그대로 있을 것 같다. 밥때가 되면 어김없이 밥상을 차려줄 것 같다. ‘비가 온다(14행)’는 제목이 뒤늦게 나타난다. 아내가 마실 나갔다가 비와 와서 돌아오는가 확인해 본다. ‘풀이 죽는다(16행)’에서 비로소 아내의 부재에 실망한다. 곧바로 비는 퍼붓는다(17행). 아내의 부재를 인식한 시적 화자의 슬픔을 ‘강우(降雨)’라는 하강적 심상으로 표현한다. 마지막 시행에서 ‘지금은 어쩔 수 없다고’ 아내의 부재를 인정하고 체념한다.


 위 시에는 가진술이 거의 없다. 단지 ‘강우(降雨)’는 객관적 상관물이면서 동시에 지배적 심상(모티프 motif)이다. 지배적 심상은 한 편의 시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이나 정서를 유발하는 심상, 주제를 형상화하는 데 핵심적으로 기여하는 심상, 자주 반복되는 심상 등을 말한다. 시에는 객관적 상관물과 지배적 심상이 살아나야 좋은 시이다.


  삶과 죽음의 문제를 뛰어난 상상력을 발휘하여 민족 보편적 정서인 한을 표현한 박재삼의 시 작품을 보자.


「한(恨)」

   

감나무쯤 되랴,

서러운 노을빛으로 익어가는

내 마음 사랑의 열매가 달린 나무는!


이것이 제대로 벋을 데는 저승밖에 없는 것같고

그것도 내 생각하던 사람의 등뒤로 벋어가서

그 사람의 머리 위에서나 마지막으로 휘드려질까 본데,


그러나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안마당에 심고 싶던

느껴운 열매가 될는지 몰라!

새로 말하면 그 열매 빛깔이

전생(前生)의 내 전(全)설움이요 전(全)소망인 것을

알아내기는 알아 낼는지 몰라!

아니, 그 사람도 이 세상을

설움으로 살았던지 어쨌던지

그것을 몰라, 그것을 몰라!


<주간성대(週刊咸大)> (1958)


  사랑하던 사람이 죽어서 저승으로 갔다. 살아있을 때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지 못한 ‘나’의 설움이 이제 감나무의 감으로 익어, 이것이 저승에 있는 그 사람의 등 뒤나 머리 위로 벋어나간다. 그 사람이 이 감나무의 열매를 보고 내 마음을 알아줄지도 모른다. 그도 마찬가지로 이 세상을 설움으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이승과 저승은 결코 단절된 세계가 아니다. 간절한 그리움과 한이 있으면 두 세계의 경계를 넘는다. 이러한 발상은 김소월의 「접동새」, 서정주의「귀촉도」에서 이미 제시되었다. 원래 ‘새’는 원형적 심상으로 죽은 이의 영혼을 상징한다. 그런데 감나무가 저승으로 벋어나가는 것은 또 다른 상상력이다. 가진술이 제공해주는 시의 아름다움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가져온 극복하기 어려운 슬픔을 종교적으로 승화시킨 현대시 작품은 절대고독의 시인 김현승의 「눈물」이다. 자식 잃은 슬픔을 기독교의 절대자에 대한 종교적 깨달음으로 오히려 절대자 앞에서 겸허해지고 순수해지는 단독자(독일 철학자 라이프니츠)의 모습을 제시한다. 


「눈물 」  


더러는

옥토(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는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의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김현승 시초> (1957)


  나무의 꽃을 피우고 시들게 하고 다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절대자의 섭리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에게 웃음을 주고 눈물을 지어주시는 것도 절대자의 뜻이다. 눈물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고 최종적인 가치라는 통찰은 종교적으로 고양된 의식에서 가능한 것이다. 자연현상에 대한 깊이 있는 관찰을 삶의 문제에 유추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이러한 발상은 자연스러운 설득력을 지닌다. 주제가 참신하다. 새로운 관점, 낯설게 하기 수법이다. 기존에 주어진 관념, 틀에 얽매인 사고, 통념에 의해 굳어진 생각을 깨고 새로운 시각으로 낯설게 보아야 좋은 시이다.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깊은 철학적 통찰을 바탕으로 구체적이고 생생한 심상을 활용하여 예술적으로 형상화한 시 작품을 고은의 「문의(文義) 마을에 가서」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시는 명상적이고 독백조의 절제된 어조를 구사한다. 왜 우리나라의 고전과 현대문학에 관조적 태도를 보이는 시나 시가가 보기 드문가. 철학의 빈곤과 미학의 궁핍 때문이다. 이 것의 결핍 현상은 관조적 태도를 확보하지 못하게 한다. 단지 감정에 휘둘릴 뿐이다. 미학의 기본은 ‘관조’다. ‘관조’는 칸트의 무관심성의 미학을 뜻한다. 자기멸각(自己滅覺, dis-interested-ness)이다. 자기자신의 이해관계를 벗어나 대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그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예술이 되기 위한 전제조건을 충족해야 좋은 시다. 


「눈길」


이제 바라보노라.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눈길을.

온 겨울을 떠돌고 와

여기 있는 낯선 지역을 바라보노라.

나의 마음속에 처음으로 

눈 내리는 풍경.

세상은 지금 묵념의 가장자리

지나 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로소 덮이노라.

바라보노라, 온갖 것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눈 내리는 하늘은 무엇인가.

내리는 눈 사이로

귀 기울어 들리나니 대지(大地)의 고백(告白).

나는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

나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

안에서는 어둠이노라.

온 겨울의 누리 떠돌다가

이제 와 위대한 적막(寂寞)을 지킴으로써

쌓이는 눈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피안감성>(1962)


  고은의 「눈길」은 우리나라 현대시에서 요구되는 관조와 통찰이 있다. 


「문의(文義) 마을에 가서」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쪽으로 뻗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는가.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문의(文義) 마을에 가서> (1974)


  위 시는 신동문(辛東門) 시인의 고향인 문의 마을(충북 청원 소재)에 가서 그의 모친상에 참석하였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고요하고 적막한 겨울 마을을 배경으로 죽음과 삶이 교차하는 순간의 깨달음을 담고 있다. 화자가 삶과 죽음의 의미를 통찰하는 시적 공간인 문의 마을을 삶과 죽음의 길 사이에 위치시켜 화자에게 명상을 통한 고양된 인식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맺는말


  좋은 시가 갖춰야 할 요건들에 어떤 것이 있는가를 국민시인 수준급들의 대표작 몇 편의 시들을 통해 살펴보았다. 일반적으로 인생과 자연,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을 뛰어난 발상과 풍부한 상상력으로 포착하여 다양한 표현방법을 통해 표현해내는 것이 좋은 시라고 말할 수 있다. 거기에 문학적 진실성을 담고 있으면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다. 가진술, 극적 제시 방법, 이미지즘의 수법, 객관적 상관물, 지배적 심상, 낯설게 하기 수법 등은 좋은 시를 쓰는 데 필수적인 수사법이다. 관조적 태도는 시를 예술적 경지로 승화시키는 고양된 인식적 요소다.



김한빈

시인, 평론가, 경성대 외래교수


<문장 21>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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