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미국의 유일한 트라피스트 맥주 양조장인 스펜서 브루어리가 문을 닫는다는 슬픈 소식이 들려옵니다. 미국에서 생산하는 트라피스트 맥주라고 의아해할지 모르지만, 스펜서는 트라피스트 맥주 전통에 미국의 크래프트 맥주 문화를 접목한 독특한 양조장으로 유명했습니다. 스펜서는 메사추세츠주의 성 요셉 수도원이 운영하는 양조장으로 그동안 두벨이나 트리펠 등의 전통적인 트라피스트 맥주뿐만 아니라 트라피스트 양조장에서 볼 수 없었던 IPA나 임페리얼 스타우트 등 크래프트에 가까운 맥주를 생산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서 다른 크래프트 양조장과 경쟁하기 힘들고 이익은 매년 줄어들기 때문에 문을 닫기로 한 것입니다. 양조장을 수도원 밖으로 매각하는 방안도 논의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수도원 맥주가 아니라면 의미가 없다는 점 때문에 폐쇄로 가닥을 잡았습니다.
맥주 팬으로서 트라피스트 맥주 전통이 하나둘씩 사라지는 일이 슬픕니다. 하지만, 벨기에의 시메이 양조장이라면 이런 일은 없을 듯합니다. 왜냐하면 시메이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판매되고, 주변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트라피스트 맥주이기 때문입니다. 시메이 양조장은 2018년 기준으로 연간 18만 헥토리터나 팔릴 정도로 세계에서 판매량이 가장 큰 트라피스트 양조장입니다. 이와 견줄 정도의 양조장은 네덜란드의 라 트라페 정도밖에 없습니다. 아무튼 저는 이 시메이 맥주를 세계 곳곳에서 가장 흔하게 봐왔습니다. 우리나라의 마트뿐만 아니라, 일본의 마트에서도, 동남아시아의 마트에서도, 유럽권이 아닌 곳에서도 가장 흔하게 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흔하다고 가치마저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트라피스트 맥주를 구하기 힘들었을 때, 시메이만큼은 마시고 싶으면 언제나 주변에 손을 뻗어 마실 수 있는 고마운 맥주였습니다.
트라피스트 맥주를 마시는 계절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가을에 마시면 특히나 좋습니다. 여름은 역시나 밝은 황금색의 시원한 라거가 어울리는 계절입니다. 트라피스트 엥켈이나 트리펠의 짙은 황금색은 여름의 더위가 서서히 모습을 감추고, 가을이 시나브로 고개를 쳐드는 시기의 노랗게 물든 들녘의 색입니다. 향긋한 과일의 풍미와 청량감은 무더운 여름에 마셨던 플랫한 맥주를 마감하고 가을을 반기라고 합니다. 반면 트라피스트 두벨이나 쿼드루펠의 다크 브라운색은 깊어지는 가을에 어울리는 색입니다. 마른 과일의 풍미와 몸을 데우는 알코올의 따뜻함은 깊어지는 가을을 즐기면서 겨울을 맞이할 용기를 내게 합니다.
그런데, 엥켈과 트리펠, 두벨과 쿼드루펠, 이것은 도대체 무슨 뜻이란 말입니까. 얼핏, 김연아의 더블 액셀이나 트리플 액셀을 떠올렸다면 반쯤 맞습니다. 이것은 트라피스트 맥주를 강도와 풍미 등에 따라 구분한 맥주 스타일을 말합니다. 아니 스타일이라기 보다는 비슷한 맥주를 한데 묶어 놓은 범주에 가깝습니다. 마침 우리 주변에는 시메이가 있어 트라피스트 맥주의 스펙트럼을 설명하기가 한결 수월해집니다. 시메이는 모든 범주의 맥주를 가지고 있는 트라피스트 양조장이기 때문입니다.
시메이는 1850년 베스트플레테렌의 한 무리의 수도사들이 설립을 도운 벨기에 남쪽의 스코흐몽 수도원(Abbaye Notre Dame de Scourmont)에서 만든 맥주 양조장입니다. 베스트플레테렌은 현재도 가장 품질이 좋은 전통적인 트라피스트 맥주를 생산하고 있으니, 시메이의 맥주가 질 좋은 양조 환경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여기서 스코흐몽은 그들이 개간한 땅의 이름입니다. 그들은 새로운 땅에 농경지를 짓고 수도원을 짓고, 자급자족을 위해 우유와 치즈를 생산했습니다. 또한 양조장을 짓고 수도원의 우물에서 나오는 물로 맥주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시메이 맥주는 그때의 맥주와는 다릅니다. 다른 여러 유럽의 양조장과 비슷하게 시메이도 2차 세계 대전 중에 독일군에 점령되어 양조 탱크가 뜯겨 나가고 양조가 멈추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1948년이 되어서 수도원의 테오도르(Theodore) 신부가 양조에 필요한 효모 이스트를 발견해 현재와 같은 맥주를 다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시메이 맥주는 확실한 트라피스트 맥주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시메이의 맥주는 수도원의 시설에서 만들어지고, 맥주의 생산 과정은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직접 감독하며, 맥주로 얻은 수입의 대부분은 자선 활동을 위해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트라피스트 맥주 양조장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조건입니다. 시메이는 트라피스트 맥주의 4가지 스타일을 모두 생산합니다. 이 맥주들은 엄연히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흔히들 색상으로 구분하여 부릅니다. 시메이 골드, 시메이 레드, 시메이 화이트, 시메이 블루라고 말입니다.
트라피스트 엥켈과 시메이 골드, 도헤(Dorée)
트라피스트 엥켈은 수도원 안에서는 가장 흔한 맥주이지만 수도원 밖에서는 좀처럼 마시기 힘든 맥주입니다. 엥켈은 원래 수도원 내에서 수도사들이 일상적으로 마시거나 수도원을 방문한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해 만들어진 맥주입니다. 엥켈(Enkel)은 ‘Single’이라는 뜻이 있는데, 도수가 가장 낮고 가장 기본적인 맥주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다른 트라피스트 양조장에서는 상업적으로 판매하지 않는 스타일이지만 시메이만큼은 2015년부터 도헤(Dorée)라는 이름으로 판매하고 있습니다. 이런 걸 보면 시메이가 얼마나 대중적인 양조장인지 알 수 있습니다.
도헤(Dorée)가 프랑스어로 ‘Gold’라는 뜻인데. 뜻 그대로 외관은 묵직한 황금빛입니다. 정향과 코리앤더 향이 물씬 납니다. 입안에 꽉 차는 탄산감과 알싸함이 가벼우면서 드라이합니다. 알코올 도수는 4.8%인데 밀맥주를 마시는 것처럼 편안하게 마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맛있는 맥주를 수도사들은 물처럼 마셨다고 하는데, 저 같았으면 물보다 맥주를 많이 마셨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의구심이 듭니다. 제아무리 수도사라도 맥주를 자주 마시면 취하지 않았을까? 실제로 그런 일이 적지 않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수도원 내에서 술에 취한 수도사들에게 내리는 형벌이 기록으로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성가를 부를 때 혀가 풀린 자는 12일, 구토를 할 만큼 술을 많이 마신 자는 30일간 속죄해야 한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속죄 기간에는 맥주도 마실 수 없었으니 맥주 대신 물을 마시는 게 더 힘든 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트라피스트 두벨과 시메이 레드, 프히미에흐(Première)
앞서 시메이 양조장을 지은 스코흐몽 수도원은 베스트플레테렌의 일부 수도사들이 나와 세운 수도원이라 말했습니다. 이들은 수도원의 건설 뿐만 아니라 맥주의 양조에도 도움을 주었는데, 양조장이 세워진 1862년부터 양조를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맥주가 시메이 프히미에흐(Première)입니다. 처음 만들어진 맥주라는 뜻이 있으며, 맥주의 레이블이 빨간색이라 시메이 레드 혹은 시메이 루즈(Rouge)라고 부르고, 해질녘을 닮아 시메이 브륀(Brune)이라고도 합니다. 맥주 스타일은 브라운 에일에 가까우며, 트라피스트 맥주 카테고리로는 두벨입니다. 수도원 자체가 베스트말레와 베스트플레테렌 수도원의 지원으로 세워졌고, 두벨이 1856년에 베스트말레에 의한 처음 양조 되었으니, 시메이의 첫 맥주는 아무래도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당시의 맥주 양조 환경에서 나왔겠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진한 구릿빛 색깔과 황백색 거품. 바닐라, 정향 등의 풍미와 브라운 슈가, 캐러멜의 스위티. 입안에서 꽉 찬 탄산감이 일품이며 높은 도수에도 부담 없이 마실 수 있습니다. 베스트말레 두벨과 함께 두벨의 표준으로 손색이 없습니다.
트라피스트 트리펠와 시메이 화이트, 트리펠
대부분 시메이 레드를 두벨로 알고 있지만 정작 레이블에는 두벨이 아닌 브라운 에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시메이 블루도 쿼드루펠로 표기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레드를 두벨로, 블루를 쿼드루펠로 말하지 않아도 대부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반면에 시메이 화이트는 트리펠이라고 레이블에 분명히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시메이 화이트는 처음부터 트리펠을 추구하고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처음 만든 해는 1966년으로 베스트말레가 처음으로 트리펠을 생산한 해가 1956년이니까 딱 십 년 후의 일입니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시메이는 선배 베스트말레 양조장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았습니다.
시메이 화이트는 생크 상(Cinq Cents)이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생크 상은 프랑스어로 오백(500)이라는 뜻입니다. 왜 이런 별명이 붙었는지 알기 위해서는 벨기에 지리에 대한 약간의 이해가 필요합니다. 벨기에는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북부 플랑드르 지역과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남부 왈롱으로 나뉩니다. 여기에 약간의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역이 있습니다. 시메이 양조장은 벨기에 남부의 프랑스와 인접한 동명의 도시 시메이에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곳의 언어와 문화는 대체로 프랑스와 가깝습니다. 시메이의 맥주 이름이 프랑스어로 불리는 이유입니다. 시메이 화이트가 세상에 나온 지 20년이 지난 1986년, 도시 시메이는 탄생 500주년을 맞았습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양조장 시메이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죠. 특별히 750ml 병의 트리펠을 만들었는데 이 트리펠에 ‘오백’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새로운 시메이가 나왔는데 굳이 ‘시메이 화이트 주세요’라고는 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왠지 재고로 남아 있는 맥주를 주었을 듯하네요. 대신 ‘시메이 오백 주세요’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저의 추측을 더해 봅니다.
이 맥주는 짙은 황금빛 외관과 풍성한 거품을 가진 맥주입니다. 처음에는 과일의 풍미와 달콤함으로 시작하여 스파이시하면서도 적당한 쓴맛으로 마무리됩니다. 목을 타고 넘어갈 때 톡 쏘는 느낌이 있어 더욱 청량하게 느껴집니다. 시메이 두벨과 비교하면 쓴맛과 단맛이 강하지만 서로의 균형이 안정감이 있는 맥주입니다.
트라피스트 쿼드루펠과 시메이 블루, 그랑 레저브(Grande Réserve)
트라피스트 쿼드루펠은 트라피스트 맥주의 그랑 크루(Grand Cru)이자 끝판왕이라 할만합니다. 쿼드루펠은 네덜란드 코닝스후펜 수도원의 트라피스트 양조장인 라 트라페에서 1991년부터 생산한 스트롱 다크 에일의 브랜드명(La Trappe Quadrupel)이었습니다. 이 스타일을 라 트라페가 처음으로 생산한 것은 아니었고 그저 그때까지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던 쿼드루펠이라는 이름을 먼저 쓴 것뿐입니다. 스트롱 다크 에일은 이미 벨기에에 여럿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맥주 중의 하나인 베스트플레테렌(Westvleteren) 12는 1940년에 소개되었습니다. 시메이 블루는 원래 1954년에 ‘블루캡’이라는 이름으로 크리스마스 에일로 한정적으로 나왔다가 그 평판이 좋아 연중 생산으로 전환하면서 그랑 레저브(Grande Réserve)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맥주이지만 와인처럼 생산 연도에 따른 차이가 있는 빈티지가 특징입니다.
시메이 블루는 시메이의 트라피스트 맥주 중에서 알코올 도수가 가장 높고(9%), 풍미도 가장 강한 맥주입니다. 다크 브라운 컬러와 황백색 거품은 두벨과 비슷하지만, 건포도, 건자두 등의 말린 과일의 풍미와 캐러멜, 브라운 슈가 등의 몰티한 풍미가 더욱 짙습니다. 게다가 트리펠처럼 과일 향이 화사합니다. 스파이시하면서도 탄산감이 있어 높은 도수에도 마시기가 어렵지는 않습니다.
친구에게 시메이 맥주를 처음 소개했을 때 친구는 Chimay를 어떻게 읽어야 하냐고 묻더군요. ‘치매 맥주인가?’라면서. 다른 친구는 이걸 ‘시마이’라고도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맥주는 이걸로 시마이 하자’라고 하더군요. 시마이는 일본어로 끝이라는 뜻입니다. 한국에 시메이라는 이름으로 수입되었지만 원래의 발음은 ‘시메’에 가깝습니다. 치매로 부르든 시마이로 부르든 누구에게나 확실한 것은 시메이는 깊어 지는 가을에 트라피스트 맥주를 부르는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2022년 11월 7일
염태진
이 글은 마시자 매거진과 함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