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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두개 Apr 25. 2022

도시 토박이의 마음에 심겨진 씨앗

비타꼰 연재 1화

 

 안녕하세요. 저는 강원도 화천에 표류하고 있는 27 새댁입니다. 아직 지역에 완전히 정착하지 못해서 자유로운 표류자입니다. 사실 저는 농업대학교에 다니고 있는 늦깎이 학생입니다. 농업을 배우고 싶어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농업 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올해 코로나로 인해 휴학을 하게 되었고 학교에서 만난 청년과 결혼을 하게 되었지요.   화천에 오게  것도 남편이  지역에 있는 귀농학교를 나와 인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


남편도 저처럼 농사를 짓는 집안이 아닙니다. 피부 질환을 앓게 되면서 직접 농사를 지어며 살아야겠다고 결심해 귀농학교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올해는  간의 경험을 인정받아 농사팀장으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혼을 약속한 저는 덩달아 따라오게 되었지요. 덕분에  학교의 넓은 운동장에서 직접 준비한 결혼식을 지난 9 25일에 올리게 되었습니다. ​


앞으로의 연재를 통해서 도시에서 태어난 젊은 남녀가 만나 어떤 생각을 가지고 시골에서 농부로 살아가는지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아직은 미숙한 종로 댁이 좌충우돌 시골 아낙네가 되어 가는 과정을 함께 지켜봐주세요.





나는 태어나서  대학을 다닐 때까지  번도 종로 밖을 벗어난  없는 도시 토박이다. 삶에 야망이 있는 야무진 아이로 10 시절을 보내느라 사춘기가  새가 없었다. 그래서 20살이 되어서야  늦게 질풍노도의 시기를 맞았다. 욕심에  미친다고 생각했던 모교를 다니면서 방황하는 시간이 오래 지속되었다. 인생은 온통 불만 투성이였고 습관적인 우울감에 빠지곤 했다. 학과 동기들과도 어울리지 못하고 그저 학점을 채우기 위한 목적으로 수업을 들으러 학교에 왔다 갔다 했다. 나머지 시간에는 용돈을 벌기 위해 늦은 새벽까지 알바를 하는 우중충한 일상이었다.​


‘나의 색은 어디로 갔을까...’ 매일 이런 고민으로 허우적대고 있을 때 우연히 복도에 붙은 포스터 하나를 보게 되었다. 때는 바야흐로 약 6년 전 2학년 1학기였다. 교목실에서 농촌 봉사활동를 함께 갈 학생들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왠지 내가 꼭 가야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교목실을 찾아갔다. 등하교를 하며 수없이 지났던 곳인데 마치 비밀의 문으로 들어가는 듯 했다. 밝은 얼굴로 수녀님께서 맞아주셨을 때는 속으로 복권에 당첨된 것처럼 ‘야호!’를 외쳤다. 그 후로 수업이 비는 시간에 교목실로 달려갔고 수녀님과 농활을 준비하는 시간이 즐겁기만 했다. 그렇게 고대했던 여름방학을 맞이하며 충북 괴산으로 떠났다.


도착한 곳은 솔뫼농장이라는 곳이었다.  때의 기억이 얼마나 인상 깊었는지. 토마토 농사를 짓는 아저씨의 손이 시꺼맸던 , 숲처럼 우거진 옥수수 사이를 헤치고 지나갔던 , 주전자에 시원한 믹스커피를 가득 채워 놨던 , 트럭 뒤에 타고 논에  뽑으러 갔던 , 밤이면 나무 탁자에 모여 촛불을 켜고 감사기도를 드렸던 , 밤에 계곡으로  보러 떠났던 , 작은 개구리를 처음 만져본 , 신선한 농작물을 먹는 기쁨도 있다는 ,  농장에 모인 농부들은 유기농 농사를 짓는 다는 .  것도 아닐  있는 사소한 사실들이  마음에  닿았다. 우물가에서 장화에 묻은 흙을 씻을 때는 ‘ 지금 행복한  같아.’라고 작게 말했다.​


아마도 많은 부분을 잃어버렸겠지만 이 생생한 기억들은 여전히 나의 가슴을 뛰게 한다. 화천과 괴산은 무척 다르다. 농활이 아니라 생활로 마주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기억들이 있어서 농촌에서의 삶을 지속하게 된다. 올 여름에는 결혼자금 마련을 위한 꽈리고추 농사를 혹독하게 짓느라고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 결혼도 남편도 포기하고 다시 서울로 도망치고 싶은 날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떠오르는 어느 과거의 내가 있다. 괴산에서 농활을 마치고 서울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전철 안에서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했던 21살의 나를 말이다.

​​

농활 이후 돌아간 일상은 얼마간  전과 다를  없었다. 그렇게 다시 반년이 흐르고 답답한 마음에 솔뫼농장 총무님께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답답하냐. 우리 집에 .”  말에 휴학원을 내고 다시 괴산으로 갔다. 다시 찾아간 괴산에서는 당시 솔뫼농장의 총무님 댁에서 지내게 되었다.  집의 삼남매가 학교에 다녀오면 매일 방문을 열고 내게 뛰어 들어와 함께 뒹굴며 놀았다. 며칠 놀다 보니 때마침 솔뫼농장에서 운영하는 고추장 공장에 일손이 필요하고 했다. 공장에서는  가마솥에다 엿기름을 끓이고 항아리에 고추장을 가득 담아 옮기는 일을 했다. 아침이면 트럭타고 일을 나갔다가 저녁이면 가족들과 밥을 먹는 정다운 시골일상을 체험했다. 그리고 가끔 농부님들의 모임에 가기도 했다.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들이 나누는 농사 이야기를 듣는  좋았다.  곳에서 겪는 일들은 새로웠지만 어쩐지 익숙하게만 느껴졌다.

어느새 시간은 한 달이 지나있었고 집에 돌아가야 했다. 이번에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정답을 얻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음에선 무엇인가 모를 씨앗이 움트고 있었다. 아직도 그 씨앗의 이름은 모른다. 마침내는 알고 싶어서 나는 이 길을 계속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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