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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두개 Apr 25. 2022

나더러 농부가 되라하네

비타꼰 연재 2화


괴산에서 서울로 돌아오니 어느덧 봄이 찾아와 있었다. 산뜻한 봄의 기운처럼 시골에서 새 에너지를 품고 온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옥상에 올라가 감자를 심은 일이었다. 사실 감자를 고른 데에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언젠가 주워들은 ‘감자는 척박한 환경에서 잘 자란다.’는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감자를 심기 위해서는 흙을 구해야만 했는데 시골에는 널린 고운 흙이 도시에서는 돈을 주고 사야만 했었다. 시작부터 난관이라고 생각했지만 덕분에 그동안 관심이 없어 몰랐던 집 근처의 종로 꽃시장을 알게 되었다. 초록이라는 색이 얼마나 다채롭고 예쁘던지 장바구니에는 흙 한 봉지만 덜렁 들어 있었지만 마음에는 새로운 세상이 열린 기쁨이 가득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감자를 뚝딱 심고서 지그시 바라보았다. 마치 갓 태어난 강아지를 만난 것처럼 마음이 몽글몽글했다.



 그 후로 매일 옥상에 올라가 ‘감자야 잘 자라라~’ 사랑의 주문을 외웠다. 하지만 도시에서 두 뼘짜리 아담한 화분이 주는 즐거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나도 진짜 흙에 농사지어 보고 싶다!”는 욕심이 솟아났다. 그리고 아버지를 졸라서 동창분이 운영하시는 주말농장을 소개받았다. 그 농장은 의정부에 있었는데 얼마나 들떴는지 소풍가듯 밀짚모자를 쓰고 배낭에 간식까지 챙겨 전철에 올랐다. ‘서울 한복판에서 밀짚모자라니!’ 마치 도시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나만의 모험 길에 오른 것 같았다. 종로5가역에서 의정부역까지 전철로 40분이 걸렸고 역에서 내려 농장까지 20분을 더 걸어갔다. 도착한 농장에는 나에게 5평짜리 땅이 마련되어 있었다. ‘기대보다 땅이 좁은걸?’ 생각했지만 후에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농장 앞에는 주인장이 갖가지 모종들을 팔고 있었다. 무엇을 심어야 할지 몰라 주인장이 챙겨주는 대로 모종들을 몽땅 가지고 왔다. 하지만 ‘모종 심는 간격도 몰라요, 무슨 씨앗인지 몰라요.’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텃밭을 꾸몄다. 각종 쌈 채소와 깻잎, 고추, 가지, 옥수수, 호박까지 옥상에서 못 다한 꿈을 펼쳤다. 흙과 초록, 새 생명이 자라나는 그 공간에서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점점 날이 더워지자 텃밭 작물들이 기세를 앞다퉈 자라나 걷잡을 수 없어졌다. 고작 5평이라고 여겼는데 1주일에 한 번으로는 도무지 관리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한 주에 한 명씩, 동생이며 친구며 신선한 채소를 주겠다는 유혹으로 도움을 청했다.


 나의 여동생은 하필이면 가장 더운 날에 당첨이 됐다. 내 땅에는 물이 닿지 않아 우물가에 가서 물을 길어 와야만 했는데 양손 가득 주전자를 옮기는 일을 30번도 넘게 했다. 그래서 동생은 벌게진 얼굴로 “다시는 언니 농사짓는 일에 날 끌어들이지 마!”라고 소리를 쳤다. 하지만 그 후로도 내가 있는 곡성이며 화천이며 꼭 와서 일을 돕는 사랑스러운 동생이다. 동생의 호통을 들은 뒤로는 차마 누구도 고생시킬 수 없어 내가 벌인 일에 책임지느라 진땀을 뺐다. 아무리 텃밭 농사라도 공부를 하지 않아 엉망이 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평일이면 도서관에 가서 농업에 관련된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그때 처음 접했던 책이 들녘 출판사에서 발행한 <까칠한 이장님의 귀촌귀촌 백서>였다.


 이 책은 귀농총서 “농부가 세상을 바꾼다” 중 하나였다. 귀농총서에서 발행한 책들은 텃밭농사를 넘어 귀농귀촌, 농업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전해주었다. 왜 유기농을 해야 하는지, 건강한 토양과 퇴비는 어떻게 만드는지, 시골살이에 필요한 다양한 기술부터 조언까지 접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귀농총서를 차례대로 읽으며 텃밭을 가꾸다보니 자연스럽게 직업으로써 농부를 생각했다. 진지한 상상은 계속되었다. ‘만약 내가 농부가 된다면 퇴비를 얻기 위해 가축을 키워야 하는데 그 생명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그래서 귀농총서 중 <햄, 소세지, 베이컨 만드는 법>을 꼭 읽어보고 싶었다. 왜냐하면 햄을 만들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될 일의 첫 번째로 ‘돼지 죽이기’를 소개했기 때문이다. 왜인지 이 농부라면 생명을 다루는데 있어서 깊은 철학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내가 꼭 그 농장에 갈 운명이었는지 책은 절판이 되어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귀농운동본부에 전화를 걸어 농부님의 번호를 얻었다. 뭘 몰라도 한 참 모를 것 같은 여대생이 대뜸 책을 구한다고 하자 농부님은 이번 주에 햄을 만드는 워크숍이 있으니 농장으로 오라고 친절히 안내해주셨다. 그렇게 찾아간 곳은 생명역동농법을 실현하고 있는 김준권, 원혜덕 선생님이 계신 평화나무농장이었다. 그 곳에서 두 분에게 생명을 귀히 여기는 농사법과 삶의 이야기를 들었다. 햄을 만드는 1박 2일 동안 지금까지의 모든 고민들이 한 데 모였다.


 생태와 평화. 내가 원하는 삶은 생명을 체험하며 존중하고 평화를 지키는 것이었다. 처음 괴산에 갔을 때부터 텃밭 농사를 짓는 동안 느꼈던 감동들, 책을 읽으며 구하고자 했던 지혜들이 나더러 농부로 살라고 손짓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우연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내 가슴에 일렁이는 떨림을 믿었다. 그래서 그 후로 혼자만의 비밀로 귀농 준비를 했고 여러 선택지 중에 농업대학에 가는 것을 골랐다. 이 일이 3년 전이다. 지금은 농업대학 졸업까지 1년을 앞두고 있는데 아직도 농장을 차리기에는 현실적으로 부족함이 많다. 하지만 어떤 농부가 되고 싶은지는 변함이 없다. 생태와 평화가 뒷 전인 세상에서 감자같은 농부가 되는 것.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잘 자라서 사람들에게 잘 먹혀지는 감자같은 농부가 되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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