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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두개 Apr 25. 2022

홀로 떠난 모험 길에 운명처럼 만난 짝꿍

비타꼰 연재 3화


 ‘어머? 멋있는 남학생이네!’ 별 기대 없이 나간 장독대 앞에서 만난, 나를 블로그에서 불러낸 남편에 대한 첫 인상이었다. 남편은 인터넷으로 경축순환에 대해 검색하다가 우연히 나의 블로그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했다. 내가 쓴 농업대학교 면접 후기부터 양돈장 견학, 농업에 대한 나름의 철학들을 기록한 글을 본 것이다. 그리고 남편은 드디어 이상형을 찾았다며 기뻐했다고 한다. 그리고 정말 만날 인연이었는지 우리가 같은 해에 입학한 신입생이라는 사실은 그의 마음을 무척이나 뛰게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남편은 이미 블로그에서 나를 보고 ‘실물이 똑같다면 결혼해야지!’라고 결정을 한 상태였다고 했다.​



 우리는 만나서 왜 적지 않은 나이에 농대에 왔는지, 어떤 농부가 되고 싶은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그의 눈에 비친 나는 예상보다 키가 조금 큰 것 외에는 블로그에서 본 그대로였다. 당시에 남편은 학교에서 우리처럼 기반이 없으나 유기농에 뜻이 있는 사람들과 모여 동아리를 만들어 활동 중이었다. 물론 우리가 만나자마자 교제를 시작한 것은 아니었으나 자연스럽게 나도 동아리원이 되었다. 동아리는 각자의 전공분야를 가지고 ‘유기농 생태마을’을 만들자는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모여 회의를 하고 견학을 다녔다.


 마침내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동아리 원들과 사비를 들여가며 합숙을 하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롤 모델로 삼을 만한 농장과 농부님이 계신 곳이라면 어디든 갔다. 그러다 우리가 닿은 곳은 강원도 평창에 위치한 원가자농이었다. 사실 이 농장에 대한 정보가 귀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어느 산골에서 돼지를 키우며 직접 퇴비를 만들어 유기농 농사를 짓고 있는 농부님이 계시다는 사실은 우리를 한 걸음에 달려가게 했다. 그러나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돼지우리는 비어있었고 사진보다 훨씬 머리가 희어진 노부부가 우리를 맞아주셨다.


 주변에 민가 하나 없는 산골짝에서 부부가 2만평에 유기농 농사를 짓고 계셨다. 지금껏 살면서, 앞으로도 그런 비옥한 땅은 볼 수 없을 듯 했다. 비록 사진보다 세월은 많이 흐른 모습이었지만 농부님의 눈빛은 야생이 살아있어 강렬했다. 남편과 나는 이 곳이 우리 두 사람이 꿈에 그리는 농장이 아니겠냐는 이야기를 나눴다. 평생을 자신의 고집대로 농사를 지어오신 농부님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으셨지만 우리는 배움이 간절했고 남편은 큰 고민 없이, 농부님을 설득해 자신의 스승으로 모셨다. (우리 학교는 2학년이 되면 농장으로 실습을 가야한다. 원가자농은 실습지 목록에 없었지만 남편의 끈질긴 요청으로 실습지에 선정되어 농사를 배웠다.)


그 사이에 나는 전라남도 곡성에 있는 흑돼지농장으로 실습을 갔다. ‘함께 고랭지에서 돼지 키우며 농사짓자.’는 우리만의 맹세로 2020년은 400km를 떨어진 곳에서 살게 되었다. 나는 딸처럼 여겨주시는 돼지농장의 내외분 덕에 날로 살이 올랐다. 원 없이 돼지를 안아보기도 했고, 농장 선생님과 계절마다의 낭만을 즐기며 행복한 실습을 했다. 노지에 고추를 800평정도 키웠는데 아주 더운 날도, 비가 오는 날도 그저 웃으며 일했다. 앞으로 시골에서 살아갈 용기를 얻게 한 시간들이었다. 그 사이에 남편은 아주 혹독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여름휴가를 얻어 달려간 평창에서 만난 남편은 나와 몸무게가 3kg밖에 차이나지 않았었다. 나는 그런 남편이 안쓰러워 평창에서의 실습을 그만두었으면 좋겠다고 여러 번 말렸다. 그러나 남편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마침내 실습을 마친 남편과 재회했을 때는 전쟁에서 돌아온 사람처럼 보였다. 이전보다 더 견고하고 깊어진 농부의 모습이었다. 내가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지만 ‘이 남자를 놓쳐선 안돼.’라는 천사의 속삭임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고된 실습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오니 농장에서는 체감되지 않았던 코로나로 세상이 어지러웠다. 우리가 이대로 학교에 돌아간다면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있을지 염려되었다. 그래서 남편과 나는 고민 끝에 휴학을 결정했다. 딱 1년 만 더 이 상황이 지나가기를 기다려보자는 마음이었다. 마침 남편이 농대를 오기 전에 졸업한 화천현장귀농학교에서 농사팀장 제의를 받은 상태였다. 그렇게 우리의 화천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예상은 했지만 남편은 아주 깐깐하고 빈틈없는 농사팀장이었다. 이런 말을 할 때면 남편에 대한 자랑이 되기도 해서 내가 겪은 시골 살이에 대한 고달픔이 잘 전달되지 않는 것 같다. 시골에서 농사짓기를 택했으면 당연히 부지런히 몸을 괴롭혀야 하는 것이겠지만 모든 것이 처음인 나에게는 매일이 시련이었다. 제일 괴로운 순간은 아침에 눈을 뜰 때였다. 분명이 어제 잠들기 전에는 곧 병원에 실려 갈 것처럼 힘들었는데 눈이 또 떠지니 밭에 나갈 수밖에 없었다. 여름 어느 날에는 남편이 선물이라며 팀원들에게 헤드랜턴을 선물로 하사했다. 기겁을 한 나였지만 팀장인 남편을 따라 새벽 4시에 고추 밭에 나가 또 고추를 땄다.


 농사만 지었다면 조금 덜 힘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한다. 삼시 세끼 밥 차리는 것은 당연하다 해도, 매일 흘리는 땀에 빨래는 어찌나 많은지. 시골에서 처음 겪는 인간관계 문제까지 매일 밤 베개가 눈물로 마를 날이 없었다. 초보새댁을 배려해 남편이 많은 것을 도왔지만 어쨌거나 밭으로 끌고 가는 남편이 야속했다. 남편은 팀장으로서 내가 다른 팀원들에게 누가 되는 것을 용납지 않았다. 더불어 남편 입장에서는 올해는 꼭 혼인을 하자 약속했는데, 밑천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쏟아지는 고추를 다 따야만 했었다.


 고추를 따다보니 시간이 어찌 흘렀는지도 몰랐다. 어느새 우리가 결혼식을 치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 생각해보아도 우리가 정말 그 시간을 어떻게 통과해 왔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이 이야기가 남편과 내가 신입생 시절 학교에서 만나 부부가 되기까지의 짧은 이야기다. 다음 화에서는 우리만의 철학으로 올린 결혼식이야기가 계속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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