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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두개 Oct 30. 2021

수박

나의 입맛에 풀물이 든다

 마음이 답답할 때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늘어 놓으면 후련할 것 같지만 대부분의 경우 돌아서면 겸연쩍어진다. 세상에 꼭 내 입장만 있는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 좀 알아달라 징징대는 스스로를 발견하면 후회가 밀려온다. 그 많은 말들을 삼킬 수는 없었을까. 다 뱉어야만 후련했을까.


  여름은 꽈리고추 농사로 지긋지긋했다. 아침이면  공기에 몸이 움추러들어 점퍼를 챙겨입는 10월인데도 주렁주렁이다. 하우스를 가득 메운 고추를 보고 있으면 농업에서의 착취는 가축뿐 아니라 식물에게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한다. 하우스라는 인큐베이터에서 작물에게 끊임없고품질의 결실을 바라는 인간의 폭력성을 본다.


 그리고 그 폭력은 어떤 모습으로든 다시 인간에게 돌아온다. 한 여름에는 점심 즈음 하우스 내부 온도가 43도를 훌쩍 넘는다. 그래도 수확량을 채우지 못하면 다시 하우스에 들어가 고추를 따와야 한다. 다른 일꾼들은 군말 않고 참아내는데 나는 불만이 한 가득이다. 나만 힘든게 아닌 줄 알면서도 날선 신경전에 나오는 말마디는 칼자루가 되어 상처를 내고 만다.


 더위 속에서 홀로 칼을 가는 일은 스스로에게 가하는 폭력이다. 그런데 자연은 나약한 인간을 얼마나 가여이 여기는지 열 식힐 과실로 다독인다. 땀 흘린 뒤 한입 베어문 수박에 몸도 마음도 누그러지게 한다. 밭에서 가져온 수박을 쩍 갈라 한 조각 씩 나눠주고 나는 가만가만 머뭇거린다. 수박을 먹을까 말까 고민이 앞서는 것이다.


 달콤한 과육 사이 씨를 일일이 발라 먹는 일이  귀찮아서다. 도시에서는 수박이 아니어도 더위를 식혀줄 음식이 많았지만 시골에서는 다르다.  흘린  간식으로 수박만한 것이 없다.  맛을 알기에 고민 , 하고   베어 물고 오물오물 씨를 모아 툴툴 뱉는다. 어느 날은 다들 씨를 덤덤히 삼키는데 나만 씨를 뱉어내고 있음을 알았다. 불현듯 내가 너무 어린아이 같은 짓을 하고 있는게 아닌가 부끄러워졌다. 물론 씨를 뱉을지 말지는 선택이지만, 이제씨를 뱉지 않는 사람이고 싶었다.


 불편하지만 삼킬  아는,  일이 힘들어도 노력을 지속하는 것이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각자마다의 방법이 있겠지만 스스로 내린 처방은, 수박 씨를 일일이 뱉어내지 않는 것처럼  안의 불편한 말들을 모두 꺼내지 않는 것이다. 나의 의도가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애써 증명하기보다, 나를 대변하다 이내 칼이  말을 함부로 휘두르지 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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