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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두개 Jul 19. 2021

고수

미지의 세계로

 

 엄마께서 제주도에 한 달 살기를 하고 계신 덕에 휴가를 제주도에서 보냈다. 떠나는 첫날, 새벽부터 남은 양배추를 수확하고 지친 몸으로 제주에 닿았다. 장마가 낀 제주는 너무나 습해서 몸에 곰팡이가 필 것만 같았다. 결국 습한 더위와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유토피와 제주도까지 가서 한바탕 했다. 다음 날 스냅사진을 찍기로 했는데 말이다.


 새벽 1시가 넘은 시각. 어스름한 도로 위에서 우리의 다툼은 다소 심각했다. 부모님께는 어떻게 얘기할래, 학교는 누가 먼저 휴학할래. 그러다 갑자기 헛웃음이 나왔다. 고난도의 두뇌 및 감정싸움에 요구되는 당이 부족해져 집중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허탈하게 웃으며 내일 아침 먹고 마저 헤어지자며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날이 밝고 예정했던 일정을 다 미룬 채 느지막이 일어났다. 어제 분명히 마침표를 찍은 듯했는데 우리는 해변가에서 서로의 얼굴을 감싸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이 남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이 여자가 무엇을 바라는지 드디어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듯했다. 바라건대 그 마침표는 둘의 관계가 아니라 오랫동안 묵혀온 본질적인 문제에 찍힌 것이었다.


 흑백 사진을 바라보고 있자니 유토피를 처음 만난 날 그가 들고 있던 신문지가 겹쳐 보인다. 과 동기 형에게 빌린 회색 프라이드와 한 손에 들려 있는 흑백 신문지. 신문지 속에는 고수 다발이 감싸져 있었다.

"고수 좋아하세요? 선물이에요."

"저 고수 안 좋아하는데."

"그래도 가져가세요. 제가 직접 키운 거예요."

"저.. 죄송하지만 고수 싫어해요."


 자신이 고수를 좋아하니 나도 좋아할 거라고 믿으며 다발로 들고 온 남자. 고수를 싫어해도 그렇지 매정하게 거절한 여자. 텃밭의 성큼 자란 고수를 보며 어쩌면 우리의 묵은 다툼 주제는 첫 만남에서 이미 예견된 것이었음을 짐작한다.


 쌀국수를 먹으면 같이 나오는 고수. 나는 그 냄새가 지독히 싫다. 텃밭에서 바로 채취한 고수는 더 고약하다. 꼭 노린재를 탁 잡으면 퍼지는 그 냄새 같다. 하지만 유토피는 쌀국수에 숙주만큼이나 푹 넣어 먹는다. 어떨 땐 쌈채소로도 먹는다.

"네가 만약 고수의 맛을 알게 되면 새로운 미각의 세계가 열릴 거야. 차원이 다른 쌀국수 맛이라고."

그래도 난 일단 싫고 본다.


 언젠가는 공동체에서 내가 돼지고기 전골을 끓인 적이 있다. 어딘가 부족한 맛이었는데 누군가 고수랑 잘 어울리겠다며 텃밭에서 한 줌 뜯어왔다. 과연 맛이 있을까 싶어 나도 한 줄기 용기 내어 먹어 보았다. 맛이 깊어지고 새로웠다. 고수라면 그냥 싫고 봤는데, 달리 느껴졌다.


 고수를 먹게 되면 그동안 가려져 있던 새로운 맛의 세계가 열릴까? 적어도 심심하게 먹었던 쌀국수와 다시 초면이겠다는 기대감이 든다. 내게는 다소 자극적이고 경험해 본 적 없는 고수가 유토피랑 닮았다. 조금 경계하고 있다만 어느새 궁금해지고 그러다가 그 맛에 물들어 버리는. 알게 되면 새로운 세계로 인도해주는.


 만약 내가 유토피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저 작은 텃밭에서 얕은 흙장난을 하며 농부라고 우기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글이 쓰고 싶어 농부가 되겠다고 했으나 흘린 땀이 적어 몇 글자 못 적어 냈을지도. 유토피를 만나 내 역량과 수준에 넘치는 농사를 짓고 있다. 평생 쨍그랑거릴 줄 알았던 내 통장에 수확한 농산물 값이 입금된다. 철 따라서 물 좋고 바람 부는 곳에도 자주 가고, 배도 부르다.


 제주도 새벽 도로 위에서 이 남자가 그토록 내게 화가 난 건, 한 번 제대로 믿어봐 달라는 호소였다. 왜인지 두려워서 고수를 깨작대듯 그에게도 같은 태도였음을 깨달았다. 그가 건넨 고수를 한 번쯤 들여다보았다면, 내 태도가 달랐다면 어땠을까 이제야 돌아본다.


 하지만 미지의 세계는 두려움보다 설렘이 가득한 것이기에. 아직 경험하지 못한 세계가 있음에 즐겁다. 맛있는 것을 많이 먹어 봤지만 고수를 통한 새로운 맛의 세계가 남아 있다는 사실. 이 남자를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비로소 첨벙 빠져들 준비가 되었다는 사실. 그 사실로 뛰어들면 실상 어떨지는 아직 모른다. 다만 흑백사진과 기억 속의 신문지를 오가며 유토피를 더 사랑하게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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