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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화신 Sep 04. 2015

근사한 말보다 듣고 싶은 말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8. 만담꾼의 나들이와 어머니의 보청기
: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몇 해 전 TV에서 아나운서 공개 채용 프로그램 방송  있다. 참가 J군은 만담 대회 우승자라는 이색 경력을 증명이라도 하듯 재치 있는 입담을 자랑했다. J는 예선에서 즉흥 스피치 테스트에 임해 ‘나들이’라고 적힌 종이를 뽑았고, 첫 마디를 이렇게 시작했다.

“저에겐 2년 동안 짝사랑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심사위원들이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봤다.

“제가 마음을 먹고 25kg을 감량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녀가 저에게 오더군요. 저는 어린이 대공원으로 그녀와 나들이를 갔어요. 그런데 제가 입장료를 여자친구에게 내라고 했더니, 헤어지자고 하더군요. 그럼 더치페이를 하자 그랬더니 더 네가 싫어졌다고... 25kg만 빼면 다냐고... 그래서 아름다운 나들이가 저에게는 슬픈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잔뜩 엄숙한 표정을 하고 앉아있던 심사위원들 사이에서 피식 웃음이 터져나왔다. 모두가 긴장하고 있는 시험장에서 어떻게 보면 실없어 보일 수 있는 이야기를 태연하게 늘어놓는 그의 배짱에 놀란 눈치다. 실제로 그가 여자친구에게 더치페이를 제안했는지 아니면 그저 웃겨보자고 살을 붙인 이야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찌됐든 그는 심사위원으로부터 자신의 이야기에 몰입하게 만들었고 웃게 만들었다. J는 여유 있게 예선을 통과했다. 아마 그가 나들이하기 좋은 곳을 추천하거나, 대한민국 국민의 나들이 패턴 등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했다면 재미없는 스피치가 됐을 것이다. 25kg을 빼고, 놀이공원 입장료를 여자친구에게 내라고 요구했던 자신의 이야기를 한 것이 합격 비결이었다.






이어진 본선 대결에서는 1:1 배틀이 펼쳐졌다. 이 배틀의 미션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사진 한 장을 찍어 와서 그 사진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었다. 지원자 중 K양과 P양의 대결이 눈길을 끌었다. K가 먼저 스피치를 시작했다. 그녀가 찍어 온 사진은 신문지에 싸인 빨간 꽃이었다.

“꽃은 언제 가장 아름다울까요? 저는 화려한 포장지에 싸인 장미보다는 조금은 투박하고, 눈에 잘 띄진 않지만 신문지에 싸인 꽃이 더 매력 있다고 생각합니다. 화려한 겉모습보다는 언제나 본연의 모습, 향기를 지키는 저 K. 지켜봐주시기 바랍니다.”

박수가 나왔다. 이어서 그와 대결할 P의 사진이 화면 위로 띄워졌다. 보청기를 착용한  한쪽 귀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심사위원들은 저게 무슨 사진인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하고 바라봤다. 그녀의 설명이 이어졌다.

“제 어머니는 사고로 양쪽 고막을 잃으셨습니다. 청력을 거의 잃고 보청기에 의지해 삽니다. 그래서 저는 어릴 적부터 크고 또박또박 말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지금까지는 어머니의 소통의 창이었지만 앞으로는 국민 모두의 소통의 창이 되고 싶습니다.”


누가 이겼을까? 두 지원자의 발표가 끝나자 7명의 심사위원들이 분주히 심사에 돌입했다. 심사위원들의 심사평이 시작됐고 한 여자 아나운서는 두 번째 발표자인 P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희는 누구보다 근사한 말들을 많이 들었던 사람들이잖아요. 사실은 근사한 이야기보다는 P양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거든요. 솔직한 이야기를 담아낸 것을 저는 높게  평가합니다.”

이어 심사위원석의 남자 아나운서가 말했다.

“P양은 감정에 호소하지 않고 담담하고 평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했군요.”

진행자가 외쳤다.

“자 이제, 결과를 공개합니다!”


결과는 7:0. P의 압승이었다. P가 찍어 온 보청기를 한 어머니의 귀 사진은 그녀만이 찍을 수 있는 사진이었고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여자 아나운서의 심사평처럼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솔직한 이야기를 담아낸 것이 승리의 가장 큰 요인이었다. 반면 K의 꽃의 비유는 뒤에 대기 중인 여성 지원자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로 삼아도 말이 될 만큼 보편적인 이야기였다. 사실 K가 P보다 진행 능력은 더 탁월했다. K는 많은 심사위원들로부터 ‘당장 방송에 투입해야 한다면 지체 없이 K를 선택하겠다’는 평을 들었다. 하지만 더 자기답고 더 솔직한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한 게 패인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영혼에 가 닿는 말은 절대 뜬 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란 걸 보여주는 사례다. 손에 잡히는 살아 있는 나만의 이야기, 실제 내가 겪었던 이야기를 하는 것 만큼 좋은 스피치는 없다. 사실 자신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풀어놓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 있는 자만이 자신의 모습을 꾸미지 않고 청중에게 드러내 보일 수 있다. 청중은 근사한 말보다는 당신만의 진솔한 이야기를 듣길 원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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