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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화신 Sep 04. 2015

직접 겪은 일은 힘이 세다

산악인 엄홍길의 강연



#7. 직접 겪은 일은 힘이 세다
: 산악인 엄홍길, 영혼을 흔든 강연의 비밀



강연 듣는 걸 좋아한다.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의 성공 스토리도 좋고, 역경을 극복한 이야기도 좋고, 철학이나 인문학처럼 지적인 강연도 좋다. 마음을 비워주는 예배나 법회도 좋고,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인생사도 좋다. 그래서 기회가 될 때마다 여기 저기 발품을 팔며 꽤 많은 강연을 들었다. 스피치의 대가라고 불리는 달변가의 강연, 이 시대 최고의 지성으로 칭송받는 대학자의 강연, 대한민국의 정신적 스승이라 불리는 종교 지도자의 강연 등을 들었다. 그런데 그 많은 강연 중에서 내 영혼을 뒤흔든 단 하나의 강연을 꼽으라고 한다면 주저 없이 산악인 엄홍길의 강연을 뽑겠다. 


몇 해 전 한 대학에서 우연히 엄홍길의 강연을 듣게 됐다. 사실 산악인의 이야기에 별로 관심도 없었고 엄홍길에 대한 특별한 ‘팬심’도 없던 터라 별 기대 없이 자리에 앉았다. 강연이 시작됐고 엄홍길은 자신이 산을 타면서 겪은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하나하나 이야기했다. 홀로 조난당한 일, 눈사태를 맞아 죽을 뻔했던 일, 완등을 코앞에 두고 하산해야 했던 일, 동료의 죽음을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던 일 등. 그중에서도 등산 중 추락해 다리가 180도 꺾여 돌아갔는데 그 다리를 질질 끌고 며칠을 기어서 결국 완등에 성공한 이야기는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다. 산악인 엄홍길의 이야기는 힘이 셌다. 다른 강연에서 느끼지 못한 뜨거움을 주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가 결코 달변가는 아니었는데 말이다. 사실 연사로서 엄홍길은 발성 발음이 좋은 편도 아니었고 제스처나 동선도 단조로워 능숙한 연사라고 평가할 순 없었다.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을 말하는 것. 엄홍길이 청중의 마음에 진실한 파장을 일으킨 비결은 이것이었다. 엄홍길은 '포기하지 말라', '도전하라', '희망을 가져라' 등 직접적 조언의 말은 거의 하지 않았다. 관념이나 사상, 생각 등을 말하는 대신 자신이 산에서 겪은 일들을 담담히 들려줬다. 엄홍길의 이야기를 듣고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위대함, 도전의 가치, 멈추지 않는 희망의 중요성 등에 대해 절절히 새기게 됐다. 어떠한 독서경험보다 영혼에 직접적으로 파고드는 메시지였다. 엄홍길의 강연을 듣고 나서 좋은 강연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방법을 직접적으로 알려주는 강연보다 ‘나는 이런 걸 겪었어’하고 본인의 경험들을 이야기함으로써 청중 스스로가 자신을 돌아보고 답을 찾게 하는 것이 좋은 강연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말하는 입장이 됐을 때, 엄홍길처럼 이야기해야 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다고 하지만, 한 사람이 자기 인생을 살면서 겪은 체험담만큼은 유일하고 독창적인 콘텐츠다. ‘등산을 했다’는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해당되지만 등산을 하면서 본인이 느꼈던 감정이나  함께했던 사람들과의 추억은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이야기다. 스피치를 할 때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인 이야기를 피하고 내가 몸소 겪은 이야기를 한다면 그 이야기는 희귀성을 지닌다. 세상의 모든 희귀한 것들은 높은 가치를 갖기 마련이다. 어쩌면 누군가의 인생에서 위대한 철학자의 명언보다 고난을 극복해낸 당신의 스토리가 더 좋은 나침반이 될 수도 있다. 영혼을 흔드는 말은 화려한 말, 권위 있는 말, 영적 가르침을 담은 말보다는 삶을 살아낸 말이다. 이 말에는 청중의 영혼을 흔드는 마력이 깃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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