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속의 인간미
#2. 솔직해야 인간적이다?
: 거짓말 속의 인간미
몇 해 전 한 방송국의 라디오 기상리포터로 일한 적이 있다. 기상리포터는 방송국 내 스튜디오 대신 실시간 기상정보를 가장 빠르게 받을 수 있는 기상청 안에서 방송을 한다. 기상청 라디오실 안에는 8개 정도의 방이 있고 각 방에서 각 방송사 리포터가 기상정보를 전달한다. 신참이었던 나는 옆 방 언니들은 어떻게 방송을 하는지 모니터링을 하곤 했는데 새해 첫날 아침에 건넛방 언니의 방송에 주파수를 맞췄다. 마침 DJ가 '기상청 리포터 나와달라'며 그 언니를 부르고 있었다. DJ는 날씨를 묻기 전에 다짜고짜 질문 하나를 던졌다. “OO리포터는 새해 소망이 뭐예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가 이 상황이었다면 돌발 질문에 어떤 대답을 했을까 상상해봤다. 가족의 건강, 연애하기, 돈 많이 벌기, 책 많이 읽기, 효도하기, 자격증 따기 등등. 그중 하나를 말해야지 싶었다.
하지만 건넛방 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음~ 절대동안?” 그때 난 생각했다. 이것이 베테랑과 초보의 차이구나. 대답이라는 것이, 때에 따라서는 꼭 사실을 정확히 말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닐까. 옆방 리포터 언니도 아마 진지한 새해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가족의 건강처럼 간절한. 그러나 말로 했을 때 그다지 재미는 없는. 그 언니는 DJ의 질문에 자신의 다이어리 세 번째쯤에 적어넣었을 '피부관리'를 '절대동안'이라고 재미있게 바꾸어 말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활기찬 아침 라디오 분위기에 맞춰서 청취자에게 작은 웃음을 전달할 수 있었다. 짓궂은 DJ는 언니에게 동안은 힘들 거라며 놀렸고 덕분에 티격태격 유쾌한 분위기를 선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배려였다. 자기 본위가 아닌 전체 분위기와 듣는 사람의 기분까지 생각하고 말한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소망인 '가족의 행복'을 말하면 솔직한 대답이야 됐겠지만 솔직해서 얻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 소원은 이미 하느님께 빈 것만으로 충분한 일인데 말이다. 말의 융통성이란, 때에 따라 솔직함을 잠시 내려놓고 첫 번째 소망 대신 세 번째 소망을 말할 줄 아는 센스다.
융통성은 또한 유머의 하나다. 자신의 생각을 곧이곧대로 말해야 한다고 믿는 고지식한 사람에게는 유머가 끼어들 틈이 없지만, 상대의 반응을 고려하는 사람에게 유머란 청중과 호흡하기 위한 가장 좋은 도구다. 유머는 상대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해도 사람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집중력이 떨어진다. 그럴 때 유머로써 청중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분위기를 재정비하는 사람은 무엇이 진짜 중요한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저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성공적으로 말한 것 까지를 스피치의 완성이라고 보는 것과, 전하고자 했던 바가 청중에게 잘 받아들여졌는지 확인하는 것 까지를 스피치의 완성이라고 보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한번은 스피치 동호회에서 ‘아름다움에 대하여’란 주제로 스피치를 한 적이 있다. 30대 초반의 한 남성 연사님이 발표를 했다. “지난주에 저는 회사 후배 결혼식에 참석했습니다. 그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부케를 받는 분의 얼굴이... 못생겨서... 그 결혼식에 대한 좋은 인상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이런 생각이 스쳤습니다. 만약 몇 년 후 내 결혼식에서도 못생긴 여성이 부케를 받으면 어떡하나. 내 결혼식을 망쳐버리면 안 될 텐데. 그리고 며칠 후, 회사 지인이 제게 소개팅을 제안했습니다. 저는 기쁘고 설렌 마음으로 누구인지부터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결혼식에서 부케를 받았던 여성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순간 욱해서 ‘그분은 좀 아니지 않냐고’ 따졌습니다. 그러자 주선자가 하는 말이 ‘네가 그럴 때가 아니야. 그 여성분 직업이 학교 선생님이라서 의사나 변호사가 아니면 안 만난대’라는 것 아니겠어요? 저는 그 말을 듣고 확 열이 올랐습니다. 아니, 자신의 얼굴을 보지도 않는지... 절대 의사나 변호사를 만날 정도의 외모가 아닌데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오나 싶었습니다. 제가 너무 솔직해서 속물처럼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남자가 예쁜 여성을 찾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나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남자의 발표는 솔직했지만, 솔직해서 인간적이라고 느껴지기에 앞서 조금은 불쾌했다. 못생긴 여자는 능력 있는 남자 찾으면 안 된다는 말인가! 사실 남자의 직업을 대놓고 한정한 그 여성도 지나치리만큼 솔직했다. 나 역시도 남자든 여자든 이왕이면 좋은 조건을 찾는 것은 비난할 일도 아니며 당연한 일이라고 여기지만, 그때 확실하게 깨달은 한 가지는 이것이다. 솔직한 건 좋지만 때에 따라서는 강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는 것. 언제 어디서고 솔직한 것 보다는 때에 따라 거짓을 말하는 것도 인간적인 태도라는 것. 진정한 휴머니스트란 솔직한 사람이기 전에, 타인이 불쾌할 수 있는 것에는 솔직함을 포기할 줄도 아는 사람이다. ‘인간적’이라는 말 속에는 ‘솔직함’ 외에도 ‘타인의 마음을 생각하는 배려’도 포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