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된 스피치란 무엇인가
#1. 깊은 산속 고목나무
: 잘 된 스피치란 무엇인가
“아무도 없는 깊은 산속에 거대한 고목나무가 쓰러졌다면 과연 소리가 났는가, 나지 않았는가?”
선가에서 내려오는 오래된 화두다. 듣는 이가 없는 공간에 울려 퍼진 소리는 소리라고 할 수 있을까, 없을까?
그렇다면 말은 어떠한가.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는 당신의 말은 말일까, 말이 아닐까? 당신이 내 이름을 불러줄 때 비로소 꽃이 되듯, 당신이 내 말을 들어줘야 비로소 말이 되는 걸까.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잣말을 하면서 ‘나 지금 대화중이야’, ‘나 지금 발표 중이야’라고 하지 않는 걸 보면 말이란 건 확실히 들어주는 사람이 필요한 쌍방향적인 무엇 같다.
그렇다면 사람들 앞에서 스피치를 한다는 건 스스로의 만족이 중요한 일일까, 청중의 만족이 중요한 일일까? 스피치란 걸 오래 하면 할수록 자신의 만족보다는 청중의 만족이 중요하다는 확신이 생긴다. 화자가 자신이 준비한 말을 완벽하게 하고 들어왔어도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이 아무런 감흥을 받지 못했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피아니스트 손열음은 자신의 책 <하노버에서 온 음악편지>에서 '잘 된 연주'에 대해 결국 명확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글을 끝맺는다. '안 틀린 연주'가 잘 된 연주는 아닌 것 같은데 또 그렇다고 잘 된 연주를 설명하기도 어렵다. 다만 이런 구절이 눈에 띈다. '선생님은 관객이 집에 돌아가서까지 또렷이 기억해 모든 사람과 공감하고 싶은, 그러나 누구에게도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말로는 설명할 길이 없는 단 한 번의 '매지컬 모먼트'가 있었다면 그 음악회는 성공한 거라 하신다.' (p.40)
말을 생각해본다. 자신은 완벽했다고 느끼지만 반응이 별로인 스피치와, 자신은 불만족스러운데 사람들의 반응이 좋은 스피치는 둘 중 어떤 것이 더 잘 된 스피치일까. 나의 선택은 후자 쪽으로 기운다. 듣는 사람이 있어야 나의 말이 비로소 완성된다면, 우리가 말을 할 때 상대의 반응을 살피면서 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도 도출해볼 수 있다. 완벽한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연단에 섰어도 청중의 반응에 따라 이야기의 순서나 분량을 조절해가며 말해야 한다. 피아니스트가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할 때 지휘자가 이끄는 오케스트라의 템포를 듣고서, 그 템포에 자신의 연주를 맞출 수밖에 없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자아도취. 이것은 스피치를 할 때 조심해야 할 한 가지다. 몰입과는 다르다. 자아도취는 일방적인 무엇이다. 말하는 사람이 자아도취 되면 자신이 해야 할 말만 열심히 하고 자리로 돌아와서는 만족한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그것은 별 의미 없는 시간이다. 듣는 이와 마음의 주파수를 맞춰야 한다. 가끔 스피치 동호회에서 노래를 부르는 연사님들이 있다. 어떤 분들은 청중의 반응을 전혀 살피지 않고 무아지경에 빠지는 바람에 자체적으로 앙코르를 부르기도 한다. 청중은 딴 생각에 빠져있다. 조금 안타까운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향해 말을 한다는 것은 그 누군가와 내가 주파수를 주고받으며 하나의 완성품을 만들어가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협연'임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