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우리의 한계가 될 때
#16. 꼬리표를 떼다
: 말이 우리의 한계가 될 때
내가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은 타인이 나에게 하는 말보다 중요하다. 내가 나에게 부정적인 말을 하는 것은 당연히 좋지 않거니와 스스로에게 꼬리표를 다는 말도 좋지 않다. 미국의 심리학자 웨인 다이어는 자신의 저서 <행복한 이기주의자>를 통해 자기 자신에게 꼬리표 붙이는 일을 경계하라고 강조한다. ‘나는 노래를 못해’하고 스스로에게 선언하게 되면 앞으로 노래실력이 늘 가능성마저 제 손으로 꺾어버리는 셈이다. ‘나는 달리기를 못해’하고 스스로에게 꼬리표를 붙이는 순간 그 꼬리표가 어딜 가나 자신의 다리를 무겁게 할 것이다. 언어에는 그러한 힘이 있다. 언어가 감옥이 되어 우리를 속박시킬 수도 있고, 날개가 되어 우리를 날게 할 수도 있다. 선택권은 언제나 내 손 안에 쥐어져 있다.
인도의 철학자 크리슈나무르티는 이렇게 말한다. "우선 자신이 말의 노예라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는 무엇이다(어떠하다)’라는 말이 우리를 조건 짓고 있습니다. 우리를 옥죄는 조건들은 모두 ‘나는 무엇이었다’, ‘나는 무엇이다’, ‘나는 무엇일 것이다’라는 말들을 바탕으로 합니다. ‘나는 무엇이었다’가 ‘나는 무엇이다’를 결정하고 이것이 다시 미래를 통제합니다. 종교도 모두 이런 말을 바탕으로 합니다. 우리의 개념 발달 역시 ‘나는 무엇이다’에 바탕을 두지요." ( 크리슈나무르티 <희망탐색> p.74, 용오름)
웨인 다이어와 크리슈나무르티가 전하고자 하는 말은 결국 같은 이야기다. 말로써 한계를 긋는 것도, 그 한계 앞에서 좌절하는 것도 언제나 자기 자신이다.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이란 존재는 어쩔 수 없이 언어의 노예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내면의 언어를 긍정적인 언어로 바꿔야 한다. 아니, 긍정적인 언어까지 아니더라도 적어도 꼬리표는 달지 않아야 한다. ‘나는 무엇이었다’, ‘나는 무엇이다’, ‘나는 무엇일 것이다’라는 사슬에서 자유로워지려면 모든 판단의 말들을 멈춰야 한다. 만약 내가 오늘 노래를 하다가 박자와 음정이 다 틀렸다고 한다면, 그럼 ‘나는 오늘 노래를 부를 때 박자와 음정이 틀렸다’라고만 말하면 될 일이다. 구태여 ‘나는 음치다’라고 꼬리표를 만들어 붙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무심코 붙이는 꼬리표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노예 되는 건 결국 자신이다. 음치를 탄생시키는 건 음치라고 말하는 자기 자신이다.
법정 스님은 이리 말씀하셨다. "말씨는 곧 그 사람의 인품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또한 그 말씨에 의해서 인품을 닦아갈 수도 있는 거야." 법정의 말씀은 말씨와 인품에 대한 이야기지만 넓게 보면 위의 이야기와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말이란 건 나의 의지로 나의 입술을 움직여 만들어내는 것이지만, 되레 내가 만든 그 말이 나를 만들어가고 나의 운명을 앞에서 끌어당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긴장되거나 자신이 없을 때 본능적으로 긍정적인 자기 암시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무언가 해낼 수 없을 것 같을 때 '나는 할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그 언어가 나의 손을 붙잡고 나를 끌어올려주길 바란다.
나는 옷을 입듯이 말을 하리라. 정장을 입으면 몸가짐도 정장처럼 각이 서고, 구두를 신으면 걸음걸이도 구두처럼 우아해지듯이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을 이끌어줄 말을 입으려 한다. 그 말을 입고 그 말을 닮아가는 새로운 내 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언제나 기분 산뜻한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