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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화신 Sep 06. 2015

시스루(see through) 화법

감출수록 드러나는 말의 미학




#12. 시스루(see through) 화법
: 감출수록 드러나는 말의 미학



패션에 시스루 룩(see through look)이라는 용어가 있다. 얇고 비치는 소재로 만든 옷으로, 입으면 속살이 희미하게 비쳐서 더욱 섹시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다 드러내는 것보다 살짝 감췄을 때 극대화되는 아름다움. 얇은 천 뒤로 슬쩍슬쩍 비치는 백옥의 살결은 노골적이지 않게 은은한 청초미를 풍긴다. 패션에 센스가 있는 여자라면 섹시해 보이겠다고 무조건 짧은 치마를 고르기 보단 시스루를 선택하는 안목이 있을 테다. 


조금 가려진 것들이 더 아름답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명백한 것들은 더 이상 설렘을 주지 않는다. 활짝 핀 꽃보다 터질 듯 말 듯 금세라도 툭하고 꽃망울을 피울 것 같은 꽃봉오리가 더 아름답다. 그 아슬아슬한 긴장감. 꽃봉오리를 보고 있으면 아름다움의 모든 경우의 수가 그 안에 머금어져 있는 듯 묘한 상상력이 일어난다. 이미 정상에 오른 톱스타보다 무한한 꿈을 가슴에 품은 신인배우가 더 매력적이고, 연인에 대해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아는 것보다 알듯 말듯 궁금한 과거 한 두개쯤 있는 게 더 매력적이다. 


말도 그렇다. 시스루 룩처럼 감정이라는 속살을 노골적이지 않게 은은히 드러내는 말이 더욱 아름답다. '당신이 와 줘서 날아갈 듯이 기쁩니다'라고 감정의 속살을 확 드러내 보이는 것보다 '당신이 와 줘서 바다가 더 푸르러 보입니다'고 말하는 게 더 세련된 감정표현이다. '나 지금 너무 부끄러워'란 직접적 표현보다는 '나 오늘 밤에 이불에 대고  발차기할 것 같아'란 표현이 듣기에 더 재미있다. 이런 걸 '시스루 화법'이라고 이름 붙여 봤다.  


시스루 화법의 절정은 단언컨대, 시詩다. 시라는 게 인간의 감정을 숨기는 듯하면서 더욱 극대화시켜 드러내는데 그 아름다움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시야말로 언어의 연금술이다. 시는 언어를 단지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닌 예술로 격상시키는 무엇인데, 그렇기 때문에 '시처럼 말한다'는 건 스피치의 최고 경지에 이른 자만이 할 수 있다. 또한 시처럼 말한다는 것은 그 말이 상대방의 영혼에 가 닿는 걸 의미한다. '발표를 하려고 연단에 서니 너무 떨립니다'라고 말하는 대신 '사시나무가 떠는 걸 본 적은 없지만 지금 이 무대에 서니 알 것 같군요'라고 말하는 게 고수만이 할 수 있는 시적 스피치다. 감정의 알맹이를 얇은 종이로 한 번 감싼 후 청중에게 건네는 매너 좋은 신사 같다. 이런 게 유머이기도 하다. 유머는 시가 그러하듯 영혼의 약이다.   


아차. 노파심에서 한 마디 덧붙인다. 시스루 화법은 감정 표현을 할 때 써야지 집 계약할 때 쓰면 낭패다. 민소매 티를 입을 때와 시스루 저고리를 입을 때는 알아서 구분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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