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6. humanity
#17. 자신의 말을 경청하다
: + chapter6. humanity
'자신의 말을 경청하다.'
이런 소리를 들어본 적 있는지? 그에 앞서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지? 보통 경청이라 함은 타인의 말을 들어주는 것을 뜻하고, 자연스레 배려와 존중 같은 이타적이며 따뜻한 가치들과 연결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자신의 말을 경청한다니? 의아하게 들릴 법도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좋은 스피커의 우선적 요건임을 주장하려 한다. 자신의 말을 경청하는 것은 배려 혹은 존중과도 무관해 보인다. 이는 차라리 한없이 이기적인 행동이다. 한없이 이기적이어서, 그렇게 자신에게만 온전히 몰두하는 것이어서, 그래서 프로페셔널의 핵심 덕목인 것이다.
2015년 쇼팽 콩쿠르. 한국의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결선 연주를 마치고 무대 뒤로 내려왔다. 외국의 한 리포터가 그에게 물었다. "오늘 연주 어떠셨나요?" 조성진이 대답했다. "아무 생각 안 하려 했고요. 제 연주만 집중해 들었습니다."
피아니스트 손열음도 비슷한 말을 한 적 있다. 앞서 JTBC <뉴스룸>에 출연한 그녀는 손석희 앵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다. "연주를 할 때 어떤 생각으로 하십니까?" 손열음이 답했다. "무대에선 아무 생각이 안 나요. 무아지경이라고 해야 하나? 다만 제가 딱 한 가지 염두에 두는 게 있는데, 제가 하고 있는 것을 계속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남의 음악을 듣듯이요." 그녀의 말에 손석희 앵커가 반가이 맞장구를 쳤다. "그 말은 저 같은 사람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네요. 저는 말하는 직업을 가졌잖아요. 저 역시도 평소에 생각하길, 제가 하는 말을 제가 다 듣고 있어야 한다고 보거든요. 그래야 잘못된 말을 하면 나중에라도 수정할 수가 있으니까요. 자신의 연주를 자기가 듣는 것과 똑같은 거라고 보면 되겠군요."
조성진, 손열음, 손석희. 세 프로페셔널의 공통점은 자신이 내는 소리를 스스로 경청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음악소리를 놓치지 않는 조성진과 손열음처럼 자신이 뱉는 말을 놓치지 않고 듣는다는 손석희의 '말하기 노하우'는 특히나 흘려 듣기 아까운 소스다. 타인을 위하거나 말거나, 그런 것을 떠나서 일단 내가 제대로 말을 하려면 자신의 말부터 잘 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말의 고수가 되기 위한 기본기다.
그렇다면 최고의 피아니스트, 최고의 스피커가 제대로 된 소리를 내기 위해 자신의 소리를 먼저 경청하는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이 전체 그림을 보는 사람이어서다. 그들은 전체 그림에서 현재 자신의 좌표가 어디쯤 위치해 있는지 실시간으로 확인해가면서 그림을 그린다. 그러니 이들만큼 이타적 연주자(스피커)는 없는 셈이다. 앞서 언급한 '이기적'이란 단어는 이기적일 정도로 자신의 소리에 몰입한다는 의미일 뿐, 이타성의 반대를 의미하진 않는다. 피아니스트는 자신의 감정에 심취되어 도를 지나치는 연주를 하지 않기 위해 '전체 그림'이라는 대상 아래에 자신의 감정을 종속시킨다. 일종의 이타성의 발휘다. 진행자도 마찬가지다. 좋은 진행자는 타인의 말을 경청하는 건 당연하거니와, 자신의 말을 경청하기 위해 메모를 하며 말하기도 한다. 그는 알고 있다. 타인의 말을 열심히 메모하면서 정작 자신의 말은 메모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내 입에서 나온 말이라도 가끔 그 속에서 길을 잃기도 한다는 것을.
협연을 떠올려 보면 이해가 쉽다. 조성진이나 손열음이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하는 것을 보면 연주 중간중간에 계속 오케스트라 쪽을 바라보면서 소리를 '맞춰나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의 피아노 소리와 오케스트라 악기 소리 모두를 들으며 동시에 연주를 해나간다.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 시간이다. 전체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느라 찌그러진 미간. 최고조로 몰입하여 자신과 타인이 내는 소리를 경청하는 그들의 얼굴은 도저히 반하지 않고는 못 배길 프로페셔널의 모습이다.
마지막으로 유재석과 김제동. 말 잘하는 사람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두 사람 역시 경청의 고수들이다. 이들은 자신이 MC라는 사실을 한 순간도 망각하지 않는 듯하다. MC는 쇼의 주인공이 아니며 주인공인 게스트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사람이란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그들은 게스트의 말과 자신의 말을 잘 경청한다. 그런 후 자신의 말이 게스트의 말을 재미있게 살려줄 수 있는,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좌표에 딱 맞게 위치하도록 만든다. 그들은 마치 노련한 피아니스트 같다. 어떨 때는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자신의 피아노 농도를 조절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자신의 피아노가 오케스트라 전체를 이끌어 가게끔 리더십을 발휘하기도 한다.
조성진, 손열음, 손석희, 유재석, 김제동. 이들이 인정받는 프로페셔널이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경청'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특히나 이들은 자가경청의 대가들이다. 자신의 소리를 잘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이들은 전체 그림을 볼 줄 아는 진정한 마스터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