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그랬다. 책을 낸 사람은 말을 잘 한다고. 근거는 덧붙이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근거 없이도 왠지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말과 글이 남남이 아니며 둘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건 이미 많은 사람들이 눈치 채고 있는 사실이다. 나 역시 예전부터 말과 글, 둘 사이에 흐르는 심상치 않은 기류를 감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감지에 그치는 게 아니라 직접 그것을 파헤쳐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말에 대한 에세이를 쓰면서 글쓰기에 대한 언급을 빼놓는 건 아무래도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말과 글의 근본이 다르지 않을진대!
일단 ‘책을 낸 사람은 말을 잘 한다’란 문장을 참이라 가정하면, 책 한 권을 엮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양의 글을 쓰는 것이 말을 할 때 어떠한 도움을 준다는 인과관계가 성립된다. 한마디로 글이 말을 도울 수가 있다는 의미인데...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걸까? 이 질문에 두 가지의 답을 내놓으려 한다. 첫째는 글을 쓰면 생각이 분명해지기 때문이고, 둘째는 글을 쓰면 자신에 대해 더욱 잘 알게 되기 때문이다. 글쓰기 활동이 남기는 이 두 가지 부산물은 공교롭게도 말을 잘 하는 데 가장 필요한 두 가지 요건이기도 하다.
먼저 첫째로, 글을 쓰면 생각이 분명해지는 원리를 살펴보자. ‘생각’이란 건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것이지만 종이 위로 옮겨지면서 ‘글자’라는 육체를 얻게 된다. 글자로 형상화됨으로써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눈으로 볼 수 있게 된 생각, 즉 대상화된 생각은 비로소 더 분명한 존재로 거듭난다. 수증기처럼 머릿속을 떠돌던 생각이 글로 표현되면서 얼음처럼 단단하게 응결된 것이다. 응결되어 고체가 된 물질은 즉각적이고 간편하게 사용(말)할 수 있다.
책 한 권을 쓴다는 건 즉각 사용할 수 있는 분명하고 응결된 생각을 수 백 페이지 분량만큼 보유하는 일이다. 게다가 출간을 위해서는 수정작업을 여러 번 거치면서 자신의 글을 반복해서 ‘바라보게’ 된다. 이것은 마치 사진첩을 만들기 위해 사진을 보고 또 보는 일과 같다. 이 사람은 사진에 담긴 그 추억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잊지 않았기에 언제 어디서든 누구에게든 그 추억에 대해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
글로써 한 번 표현되어진 말. 그 말은 질적인 우수성을 띤다. 그 이유는, 우리가 글을 쓸 때에는 오랜 시간을 고민하여 최선의 단어를 고르기 때문이다. 즉석에서 뚝딱 만드는 물건보다, 골방에 박혀 몇 시간동안 고민해가며 한 땀 한 땀 만드는 공예품(글)이 완성도나 아름다움에서 우수할 수밖에 없다. 나의 생각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해줄 최적의 단어를 엄선해내는 과정은 사유의 땅을 끝까지 파고드는 과정과 같다. 그러므로 말과 글은 그것이 나오는 근본(생각)은 같지만, ‘말=글’의 등식이 성립되진 않는다. 받아쓰기를 하듯 말을 그대로 종이로 옮긴다고 글이 되는 건 아니다. 완성품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이 다른 메커니즘을 거치기 때문이다.
이제 두 번째로 넘어가보자. 글쓰기가 자기 자신을 더욱 잘 알게 해주는 건 무슨 원리일까? 내가 아는 한, 무라카미 하루키보다 이 원리를 간단하게 설명해낸 사람은 없다.
“원고지 4매 이내로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죠. 다만 자기 자신에 관해 쓰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예를 들어 굴튀김에 관해 원고지 4매 이내로 쓰는 일은 가능하겠죠. 그렇다면 굴튀김에 관해 써보시는 건 어떨까요. 당신이 굴튀김에 관한 글을 쓰면, 당신과 굴튀김의 상관관계나 거리감이 자동적으로 표현되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 끝까지 파고들면 당신 자신에 관해 쓰는 일이기도 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비채)
글을 쓰는 건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해 쓰는 일이다. 주제나 소재가 무엇이 됐건 글쓰기는 자기 자신에 대한 탐구활동이 된다. 굴튀김에 대해 쓰든, 동네 약수터에 대해 쓰든, 쓰레기 분리수거에 대해 쓰든 결국 그 글에 자신이 담길 수밖에 없고, 그 글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똑같은 물잔을 보고도 어떤 사람은 ‘물이 반이나 남았다’고 쓰고, 어떤 사람은 ‘물이 반밖에 안 남았다’고 쓴다. 어떤 것에 대해 써도 거기에는 자신의 사고방식과 성향이 묻어나기 마련이다. 이렇듯 글 속에 자신의 관점이 드러나는 경우 외에도, 하루키의 말처럼 대상과 나 사이의 상관관계나 거리감이 형성됨으로써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다.
만약 당신이 글을 통해 진심을 담아내려는 작가라면 글쓰기를 통해 더욱 자신을 깊이 알아가게 될 것이다. 작가든 음악가든 화가든 마찬가지다. 한 피아니스트가 인터뷰를 통해 말하길, 자신은 일상에서는 굉장히 조심스러운 스타일이지만 연주에서는 반대로 과감하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일상보다는 음악 할 때의 모습이 자신의 본성에 가까운 것 같아요.” 피아노든 글이든 그림이든, 자신의 영혼을 담아내는 대상이 있다면, 그것이 어떤 스타일로 완성되어 가는지를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본성을 알아낼 수 있다. 가령 내가 쓰고 있는 이 에세이가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문체로 쓰여지고 있다면, 나란 사람의 본성이나 추구하는 바 역시도 ‘간결함’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 책을 집필하는 시간동안,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느 때보다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좋은 말이란 나다운 말이다. 좋은 말을 하려면 나다워져야 한다. 나다워지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잘 알아야 한다. 나를 알기 위해서 글을 쓰면 된다. 글을 쓰면 내안의 나와 더욱 가까이 마주하고, 더욱 나 자신이 된다. 내가 나 자신에 보다 가까워졌을 때, 비로소 어떤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더라도 진실한 이야기, 즉 나다운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다.
위의 글은 에세이 <나를 지키는 말 88>에 실린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