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재 오닐의 비올라에선
달콤쌉싸름한 초콜릿 향이 난다
[공연 리뷰] 리처드 용재 오닐 리사이틀 < BRITISH & ROMANTIC >
리처드 용재 오닐의 리사이틀이 밸런타인데이에 열린 건 신의 한 수였다. 그의 비올라 소리를 비유할 단 한 가지 대상을 고르라면 나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초콜릿을 댈 것이다. 분명 달지만은 않은 맛.
꼭 혼자 맞이하는 밸런타인데이 같다고 할까. 왠지 모르게 설레지만, 마냥 분홍빛 마음만은 아닌 것. 쓸쓸하고 우울하고 그러면서도 마음을 위로하는 '달달함'이 섞인 이상한 감정. 딱 용재 오닐의 비올라 소리가 그렇다. 14일 오후 8시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의 리사이틀 <BRITISH & ROMANTIC>에 다녀왔다.
[1부 브리티쉬 비올라] 멜랑콜리의 묘한 위로
초콜릿을 먹을 때 쌉싸름한 맛을 지나야 단맛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이날 용재 오닐의 공연이 딱 그랬다. 쌉싸름한 1부를 지나 달달한 2부로 가는 여정은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게 했다. 벤자민 브리튼(Benjamin Britten), 프랑크 브리지(Frank Bridge), 요크 보웬(York Bowen) 등 세 명의 영국 작곡가의 곡으로 채워진 1부는 미스터리하고 우울했다. 초콜릿의 쓴맛 혹은 자욱하고 습한 영국의 안개를 떠올리면 된다.
그 '멜랑콜리'가 싫었단 게 아니다. 사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감성이다. 영국 작곡가들이 만든 혼란스럽고 우울한 비올라 곡들은 신기하게도 마음이 똑같이 혼란하고 우울한 상태일 때 들으면 위로가 된다. 아름답고 차분한 음악을 듣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과 또 다른 느낌이다.
용재 오닐이 1부에서 들려준 곡들은 그가 지난해 12월 발매한 앨범 <British Viola>에 수록된 곡들이다. 이 앨범을 들을 때 나는 '이상한' 위안을 받았다. 마음이 즐겁고 행복할 때 이 앨범을 들으면 별 감흥이 없는데, 마음이 어지럽고 감정적으로 평온하지 못할 때 들으면 희한하게도 깊이 와 닿는다. 감정의 정화가 일어난다. 달달한 사탕은 절대 줄 수 없는 것. 진하게 내린 에스프레소만이 줄 수 있는 충만한 위로 같은 것.
1부 프로그램들은 피아니스트 스티븐 린이 함께 했다. 그는 용재 오닐의 비올라가 묻히지 않게끔 절제하면서도 피아노의 감성을 잃지 않았다.
[2부 로맨틱 비올라] 달콤한 슬픔
2부는 '로맨틱 비올라'라는 콘셉트로 좀 더 친숙한 곡들이 연주됐다. 드보르자크의 '유머레스크(Humoresque)', 크라이슬러의 '사랑의 슬픔(Liebesleid)' 등 대중적인 곡들은 달콤함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2부 첫 곡은 바흐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이었다. 두 대의 바이올린의 주인은 바로 신지아와 용재 오닐. 비올라가 아닌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용재 오닐을 목격하는 흔치 않은 이벤트였다. 1바이올린 신지아의 멜로디를 2바이올린 용재 오닐이 부드럽게 받쳐줬다. 때론 용재 오닐의 바이올린이 전면에 나서 리드하며 다양하고 조화로운 소리를 만들었다. 두 사람의 연주를 디토 체임버 오케스트라가 지원했다.
다음 곡은 온전히 디토 체임버 오케스트라가 주연이었다. 이들은 드보르자크의 '현을 위한 세레나데'를 연주했다. 나의 경우 체임버 오케스트라(소편성 관현악단) 연주를 들을 기회가 많지 않았는데 이번 계기로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매력을 알게 됐다.
2부의 마무리는 리처드 용재 오닐과 디토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조합이었다. 이들은 앞서 언급한 '유머레스크'와 '사랑의 슬픔'을 비롯해 피아졸라의 '위대한 탱고'를 선보였다. 특히 '사랑의 슬픔'은 많은 다른 연주자의 버전을 들었는데, 군데군데 자기만의 개성 있는 주법으로 감성을 표현한 용재 오닐의 버전도 인상 깊었다. 용재 오닐의 연주는 그의 집중력 때문인지 곡이 끝나고 남는 잔향이 백미였다.
용재 오닐은 그의 '친구들'과 함께 두 곡의 앙코르곡을 들려줌으로써 객석에 작별인사를 건넸다. 디토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카를로스 가르델의 'El dia que me quieras'를 연주했고, 이어서 스티븐 린-신지아와 엘가의 '사랑의 인사'를 들려줬다. 용재 오닐의 비올라, 신지아의 바이올린, 스티븐 린의 피아노. 이 매력적인 조합의 연주로 몇 곡을 더 듣고 싶었던 건 나뿐이었을까. 쌉싸름한 맛으로 문을 연 용재 오닐의 리사이틀은, 이날 레퍼토리를 통틀어 가장 달콤한 곡인 '사랑의 인사'로 달달한 여운을 남기며 막을 내렸다.
기사입력 17.02.15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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