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곡의 원조는 따로 있다?
우울할 때 위로를 주는
클래식 '편곡' 4선
음악 토크쇼나 라디오에서 종종 '곡의 탄생비화'를 듣곤 한다. '어느 작곡가가 곡을 만들어 어떤 가수에게 줬는데 그 가수가 받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가수에게 줬는데 그 곡이 대박이 났다더라' 등 뭐 그런 이야기들. 이런 일화를 들을 때면 '노래'와 '노래의 주인' 사이에도 인연이란 게 있는 거 아닌가 싶다.
하지만 곡이란 게 한 주인의 것만으로 평생 운명 지어지기엔 너무 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다. '편곡'이 그 가능성이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편곡이란 "지어 놓은 곡을 다른 형식으로 바꾸어 꾸미거나 다른 악기를 쓰도록 하여 연주 효과를 달리하는 일. 또는 그렇게 만든 곡"을 일컫는 용어다. 곡의 형식을 조금만 바꾸어도, 다른 악기를 활용하기만 해도 곡은 재탄생되고, 그 곡은 이제 새 주인을 맞아 새로운 운명을 산다. 실로 편곡이나 리메이크 버전이 원곡보다 더 인기를 누리는 경우도 있다.
이 글을 읽으며 가요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클래식에도 편곡이 왕왕 이뤄진다는 사실 역시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다. 서태지 노래를 방탄소년단이 다시 부르고, 윤종신 노래를 레드벨벳이 다시 부르기 훨씬 전에 모차르트가 바흐의 곡을 편곡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클래식 음악 중 편곡 버전이 있는 몇 곡을 소개한다.
[하나] 크라이슬러 '사랑의 슬픔(Liebesleid)', 라흐마니노프 편곡
'사랑의 슬픔'은 누구든 한 번은 들어봤을 법한 익숙한 곡이다. 프리츠 크라이슬러의 원곡을 라흐마니노프가 피아노로 편곡한 버전도 많이 알려져 있다. 빈의 바이올리니스트인 크라이슬러는 왈츠를 인용해 1910년경 바이올린용 소곡으로 이 곡을 작곡했다. 당시 크라이슬러가 바이올린 연주를 직접 하고 라흐마니노프가 피아노 반주를 했다는 말도 전해진다.
크라이슬러는 '사랑의 기쁨(Liebesfreud)'도 함께 작곡했는데 이 두 작품은 앙코르를 위한 곡으로 작곡했다는 말도 있지만 당시 여러 무대의 정식 레퍼토리로써 연주되며 사랑받았다. 러시아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라흐마니노프는 이후 이 곡을 피아노 독주곡으로 편곡했는데 반음계 화성의 매력을 잘 살렸다는 평을 받는다.
[둘] 파가니니 '라 캄파넬라(La campanella)', 리스트 편곡
광고 배경음악으로도 쓰이며 널리 알려진 '라 캄파넬라'는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불리는 이탈리아의 파가니니가 작곡한 대표곡이다. '라 캄파넬라'는 '종'을 뜻하는데, 연주를 들어보면 종소리를 묘사한 부분이 포인트다. 원제목은 '바이올린 협주곡 제2번'의 끝악장 '종소리 같은 론도(Rondeau à la Clochette)'다.
이 곡을 피아노로 편곡한 리스트는 파가니니처럼 역시 초절적인 기교와 악마적인 재능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다. 헝가리 출신의 리스트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파리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며 피아노 레슨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던 중 1832년 4월 20일, 우연히 파가니니의 광기에 찬 연주를 듣고 완전히 반한다. 리스트는 당시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겠다"고 결심했고, 이후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곡을 피아노 곡으로 편곡하는 작업에도 열심이었다. 리스트는 6곡으로 이루어진 <파가니니 대연습곡>을 남겼는데 특히 제3번 '라 캄파넬라'가 가장 유명하다.
'라 캄파넬라'는 화려한 기교를 필요로 하는 고난도의 곡이다. 피아니스트들은 자신의 기교를 증명하거나 자랑할 때 이 곡을 연주하곤 한다. 종소리를 피아노로써 절묘하게 묘사하는 이 곡은 과감하면서도 섬세한 타건으로 표현할 때 매력적이다.
[셋] 바흐 '샤콘느(Chaconne)', 부조니 편곡
'세상에서 가장 슬픈 곡'으로 불리는 바흐의 '샤콘느'. 오직 바이올린만을 위해 바흐가 작곡한 이 곡을 20세기 초의 작곡가 부조니가 피아노로 편곡하기도 했다. 원곡은 바이올린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곡이지만 부조니의 피아노 버전 역시 피아노만이 줄 수 있는 음색과 화성, 타건으로써 살려내는 특유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정경화의 바이올린 원곡 버전, 임동혁의 피아노 편곡 버전을 함께 들어보길 추천한다.
원제목은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제2번 제5곡 샤콘느'다. '샤콘느'란 원래 화성과 선율의 반복을 이용한 곡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장엄함의 끝인 바흐의 '샤콘느'는 한 번 연주하고 나면 진이 다 빠져나갈 정도로 연주하기 힘든 곡이자 바이올린의 최고봉에 있는 곡으로 알려졌다.
곡의 탄생 배경은 이렇다. 바흐의 아내 마리아 바바라는 몸이 많이 아팠다. 바흐는 가난했지만 돈을 위해 연주하지 않았으나 아내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먼 지역으로 연주를 떠난다. 하지만 바흐가 돈을 벌어 돌아왔을 때 아내는 이미 죽어있었고 바흐는 아내를 잃은 지극한 슬픔을 승화시켜 이 곡 '샤콘느'를 만들었다. '샤콘느'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깊은 슬픔에서 비롯된 절규로 시작해, 뒤로 가서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차분한 분위기, 하지만 끝내는 우울한 마무리로 감정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넷] 쇼팽 왈츠 7번 등, 두세(Doucet) 편곡 '쇼피나타(Chopinata)'
듣고 있으면 절로 몸이 들썩이는 두세의 '쇼피나타'는 그가 쇼팽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만든 작품이다. 쇼팽 왈츠 7번, 군대 폴로네이즈, 즉흥 환상곡 등을 섞어 '쇼피나타'라는 이름의 재즈풍 곡으로 편곡했다.
큰 변주 없는 보통의 편곡과 달리 '쇼피나타'는 여러 곡을 섞어 익숙하지만 마치 전혀 다른 곡처럼 들리게 하는 매력을 지닌다. 특히 곡의 분위기에 있어 변화가 주목할 만하다. '쇼팽 왈츠 7번'은 정적이고 슬픈 정서가 강한 데 반해 '쇼피나타'는 활기차고 역동적인 느낌이 강하다.
편곡이란 게 본디 원곡을 향한 애정에서부터 탄생하기 마련인데, 특히 이 '쇼피나타'를 듣고 있으면 두세가 얼마나 쇼팽과 쇼팽의 음악을 사랑했는지 느낄 수 있다.
기사입력 17.09.11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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