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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화신 Sep 12. 2017

내일을 위한 시간




[리뷰]
다르덴 형제의 희망탐색기,
'내일을 위한 시간'







2015년 1월 1일.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이 새해 첫날을 열었다. 이 작품은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2회 수상에 빛나는 다르덴 형제 감독의 작품이며, 주연은 마리옹 꼬띠아르가 맡았다.


다르덴 형제는 1999년 '로제타'란 영화로 신자유주의에 경종을 울렸다. 이 영화 후 10대 노동자를 보호하는 '로제타법'이 실제로 제정됐으니, 이들은 영화 밖 세상까지 바꿔놓은 셈이다. 다르덴 형제 감독은 이번 작품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도 자본주의가 낳은 비인간적이고 아이러니한 상황을 95분의 러닝타임 동안 긴박감 있게 그려낸다.


영화는 복직을 위해 주말 동안 동료의 집을 찾아가 보너스를 포기해달라고 설득하는 여인 산드라(마리옹 꼬띠아르 분)의 이틀을 따라간다.





들어가며


다르덴 형제의 영화를 보는 일은 낚시질과도 같다. 잔잔한 듯 아닌 듯 꿈틀대는 물살에 가만히 시선을 두고 있노라면 하루가 다 간다. 하지만 늘 낚싯대를 접으려 할 찰나, 소름으로 몸이 떨린다. 바늘 끝에 묵직하고도 감당 안 되게 펄떡이는 월척. 마지막에 걸리는 건 '희망'이다.  



산드라의 우울증과 로제타의 복통


당신에게 묻는다. 공황장애나 우울증이란 단어가 당신의 것이었던 적이 있는가. 이유 없이 불안하고 이유 없이 우울한 사람들. '내일을 위한 시간'의 산드라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다. 원인은 알 수 없다. 마치 다르덴 형제 감독의 전작 '로제타'에서 이유 없는 복통에 시달리는 로제타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우울증을 가진 산드라와 복통을 가진 로제타의 공통점에서 그 실마리를 더듬어본다.


그들에겐 '일'을 잃어버린 사람, '일'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이란 공통분모가 있다. 그렇다면 일의 상실 혹은 임박한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이들에게 스민 고통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그게 맞다면 일의 상실이 왜 그토록 그들을 공황에까지 빠뜨린 걸까. 원인의 원인을 찾고 싶다. 또 하나. 마지막 장면에서 산드라와 로제타의 얼굴에 깃든 희망의 빛은 대체 무엇의 결과였을까. 절망의 가장 질퍽한 어디쯤에서 이들이 발견한 희망의 정체가 바로 다르덴 형제가 말하고자 하는 진짜 이야기다.


노동력을 팔면서 위태로워진 인간


산드라의 우울과 희망의 원인을 찾아보려 한다. 공장 직원인 산드라의 우울은 삶에 대한 불안의 씨앗에서 싹터났다. 어디 한 군데 아프거나, 일상에 작은 문제라도 생겨서 일을 못하게 되면 산드라의 삶은 그대로 무너진다. 한 발짝만 헛디뎌도 쉽게 부서져버리는 일상. 산드라가 대표한 우리 모두의 처지다.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먹고사는 자본주의 시대에 불안은 우리의 숙명이 돼버렸다.


인간은 더욱 비굴해지고 있다. 갑에게 노동력을 팔아서 먹고사는 을이 비굴해지지 않고 버틸 재간은 없다. 내가 먹을 것, 내가 쓸 것을 직접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내가 먹고 쓸 것을 사기 위한 '돈'을 위해 일하면서 인간의 존엄성은 급격히 추락했다. 돈 밑에 사람이 서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이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처럼 전락한 지금, 노동력이 내가 가진 자본의 전부일 때만큼 불안한 상태도 없다. 산드라와 로제타의 뼛속 깊이 자리 잡은 '절망'은 따라서 개인적인 질병이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질병이다.  


'로제타'의 한 장면


인간다운 삶에 대한 혼란


산드라가 처한 상황은 아이러니의 극한에 닿아있다. 복직을 해야 먹고살지만 복직을 하면 동료의 보너스를 빼앗게 된다. 잔인한 선택지다. 이런 진퇴양난의 상황은 끊임없이 '윤리'와 '현실'이 서로 충돌하게끔 한다. 산드라의 공장 동료들이 겪는 윤리적 가치와 현실 사이의 갈등이 이토록 거칠고 봉합하기 어려운 이유는 현실이 가진 '정당성'을 무시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인간다운 삶'과 '인간다운 삶'의 정면충돌. 내 가족의 안정된 삶을 지키는 인간다운 삶과 동료의 어려움을 돌아보는 인간다운 삶의 격렬한 부딪침. 보너스를 받아 가족과 더 나은 생활을 꾸리겠다는 이에게 어느 누구도 비윤리적이라며 손가락질 할 수 없다. 이런 갈등에서 영화적 서스펜스는 심화된다.


정말이지 '내일을 위한 시간'만큼 '별 것 아닌' 이야기도 없지만, 또 이렇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이야기도 없다. 복직을 위해 동료들을 설득하러 다니는 이틀간의 단순한 여정과 여기에서 묻어나는 농도 짙은 스트레스. 이 상황이 빚어내는 요란한 심리적 갈등은 전쟁영화의 포성만큼이나 관객의 내면을 시끄럽게 만든다. 현대인들의 내면은 산드라의 이틀처럼 늘 전쟁터다. 산드라가 꼭 자신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카메라는 산드라와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 그녀의 등 뒤를 따르니 더욱 자신과 산드라를 동일시하게 된다. 관객은 마음이 착잡해지고 말로 표현 안 되는 더러운 기분을 고스란히 체험한다. 마침내는 산드라가 이 처절한 전투에서 승리해주길, 다르덴 영화의 형식이 낳은 특수효과는 관객의 간절한 바람을 부추긴다.



인간이고자 하는 싸움


산드라가 상대하는 적은 너무 커서 눈 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그녀의 일상을 둘러싼 자본주의와 이기주의라는 거대한 사회적 틀이 이 영화의 안타고니스트다. 단순하게 바라보면 공장 사장과 반장이 반동인물 같지만 실은 산드라마저 사장과 반장의 그럴 수밖에 없는 입장을 이해한다. 그러니 애초에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산드라는 자신이 질 것을 알고도 싸웠다. 재투표로 복직이 되더라도 자신 때문에 보너스를 빼앗긴 동료들과 전처럼 지낼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산드라의 싸움은 '인간'이고자 한 싸움이었다.


"우리 잘 싸웠지? 나 행복해."


산드라가 남편에게 건넨 마지막 대사에는 모든 게 담겨있다. 그녀가 두 번의 낮과 한 번의 밤 동안 겪은 투쟁은 지든 이기든 마지막엔 인간성을 회복케 하는 참된 성질의 것이었다. 누군가는 싸워야 하고, 누구나 싸우고 싶지만 두려워서 피하기만 했던 싸움에 산드라는 투신했고 그 시도에 이미 모든 가치가 깃들어있다. 따라서 이 영화는 그저 따뜻하기만 한 휴먼드라마라기 보단, 인간성 회복의 거친 여정을 기록한 정신의 난중일기다. 나치 시대 아우슈비츠에서도 끝까지 인간의 존엄을 지켰던 이들은 존재했듯, 산드라도 그들처럼 인간이 왜 인간일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을 행동으로 해보였다.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형제


신경안정제가 필요한 세상, 그러나 희망


산드라는 졌지만 지지 않았다. 월요일 오전, 회사를 걸어 나오며 진정으로 홀가분하고 진정으로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산드라의 미소에 담긴 희망은 그녀 삶 전체를 비출 빛이며, 노동력을 팔아 하루하루 먹고사는 우리의 삶을 비출 빛이다. 어쩌면 산드라는 '처절한 이틀'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 싸움의 승기를 잡았는지도 모른다. 산드라의 해고를 자신의 일처럼 여기고 반장에게 재투표를 요구한 동료 줄리앙이 있었기 때문이다. 단 한 명이라도 자신의 편에 선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산드라가 패배자일 수 있겠는가. 또한 티무르가 축구장에서 산드라의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려주었을 때, 이미 산드라는 결정된 승자였다.


'로제타'에서도 이런 희망이 마지막에 월척처럼 펄떡였다. 자신에게 진심 어린 선의를 베풀어준 친구를 매정하게 배신한 로제타.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의 삶의 무게만큼이나 무거운 가스통을 옮기다가 쓰러졌을 때, 로제타에게 손을 내민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배신당했던 친구였다. 그 친구를 바라보는 로제타의 눈빛을 응시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그 눈빛은 희생을 감수하고 자신의 편에 서 준 동료를 바라보던 산드라의 눈빛과 닮아있었다.


나오며


산드라가 이틀의 인내 끝에 낚아 올린 건 '인간에 대한 희망'이었다. 희망을 빼앗는 것도 사람이지만 희망을 되찾아주는 것도 사람이다. 인간 본성에 깃든 마지막 한 줄기의 거룩함. 진탕 속에서도 고결함을 지켜내는 인간 밑바닥의 진주 한 알. 인간이 제 손으로 만든 이 사회가 괴물이 되어 다시 우리의 인간성을 괴물로 만들고 있지만, 희망도 결국 인간 안에 존재한다는 아이러니로 다르덴 형제는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다르덴 형제는 진정 참을성 있는 낚시꾼이다.



* 위 글은 2015.01.27 스포츠투데이에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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